출판은 위기산업이다

위기(crisis)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의미한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은 언제나 위기와 나란히 가는 한 짝이다. 그러나 우리는 덮쳐오는 순간에만 위기를 인식하고, 따라서 위기를 특정 국면에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비일상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IMF 사태 이후로 우리는 늘상 위기를 입에 달고는 살았다. 하지만 대개는 “단군 이래의 최대 불황”이라는 식의 과장된 수사적 방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위기를 일상으로 살아내진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책이 안 팔리고 매출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그걸 싸잡아서 동어반복적으로 위기라고 말했던 것뿐이지, 그 위기의 원인을 미디어적 관점, 콘텐츠적 관점, 저자적 관점, 독자적 관점 등 다양한 지점에서 진단하고, 낡은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의 구상으로까지 확장하진 못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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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첵 예르카 , <Bible Dam> _
"한 시대가 과거와 맺는 관계는 상당 부분 그 시대가 문화적 기억의 매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276쪽)

사실 지금의 출판모델이 너무 낡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지난 10년 넘게 왜 매출은 제자리걸음인가. 반품률은 왜 줄어들지 않고, 공급률은 왜 점점 낮아지는가. 절판되는 책은 왜 그리 많은가. 소수의 베스트셀러 작가 외에는 전업작가로 살기가 왜 그리 힘든가. 번역서 로열티는 왜 그리 높아지며, 번역자 구하기는 왜 그리 어려운가. 책의 수명은 왜 갈수록 짧아지는가. 출판계로 들어오는 신규인력은 왜 이리 제한적인가……. 사태가 이런데도 우리는 낡은 모델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것에 붙박여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위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리 거부해도 위기는 찾아온다. 우리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제는 위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답해야 한다. crisis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의 결을 살펴보면 위기가 갖는 풍부한 함의를 알게 되고, 그때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날 어떤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crisis의 형용사형 critical에는 ‘위태로운’, ‘비판적인’ ‘(앞으로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정적인’ ‘비평적인’ 등등의 뜻이 있다. crisis는 이런 여러 가지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위기라는 단 한마디로 표상되는 현재 우리 출판의 모습 속에는 critical이 지시하는 이런 여러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으며, 그런 점에서 출판은 ‘위기산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출판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데다 쉽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공황(crisis)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것이 구조적인 것은 미디어 지형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장기적인 것은 10년 넘게 매출과 이익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며, 탈출구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출판계가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출판을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하면서 ‘이후’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계상황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은 ‘비판’(criticism)을 낳으며, 이 비판으로 우리는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얻기 때문이다. 이 비판의 힘을 출판 패러다임을 바꿔내는 ‘결정적인’(critical) 힘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어 출판의 새로운 가능성의 지대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위기와 한계는 양면성을 갖는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고, 한계는 확장의 계기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확장은 한계를 부단히 지워나가는 과정이고, 따라서 한계가 없다면 확장도 없다. 위기를 발명해내고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은 성공을 끊임없이 연장해 나간다는 얘기와 같다. 성공에 안주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위기를 불러오고,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출판은 존재론적으로 위기와 더불어서만 성립하는 업종이다. 지식과 사유를 다루는 미디어가 출판인데, 지식이나 사유가 매번 새롭게 갱신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출판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했을 때,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기적’(critical)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고서 출판이 어떻게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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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에서 공개한 2011년 상반기 1인당 판매 권수 통계 수치.

출판은 존재론적으로 위기산업일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임계점’이나 임계상태(criticality)는 ‘결정적 순간에 딱 한번 찾아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매번, 매순간 만들어내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1의 임계점을 넘어 2로, 2의 임계점을 넘어 3으로…우리는 임계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정해진 임계점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각자가 처한 조건에 따라 수천의 다른 임계점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임계점을,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정한 양이 축적되어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양의 축적과는 상관없이 질적 전환은 언제든 시도할 수 있고, 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매출이 적다거나 사람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방기해선 안 된다. 지금 그린비출판사는 플랫폼 성격의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거대 플랫폼 입장에서 보면 가소로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조건에서, 우리의 방식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질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진화해 갈 것이다. 저자·독자와 서로를 감염시키고 감염되면서 매순간 변화하고 달라지는, 영원한 진행형의 플랫폼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출판이 존재론적으로 위기산업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출판에 어떤 완성되고 고정된 모델이 없다는 말과 같다. 전자책이 처음 등장했을 때 종이책의 운명을 놓고 벌어진 ‘논쟁 아닌 논쟁’은 이제 종이책과 전자책의 공존을 얘기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또 다른 미래에 전자책과 대결하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우리는 또 다시 전자책의 운명을 놓고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일 것이다. “출판은 종이책산업이다” “출판은 전자책산업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출판을 정의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출판이라는 주어는 오직 술어로서 종이책 혹은 전자책만 가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가수다”라고 할 때 그 ‘나’가 오로지 ‘가수’일 리만은 없지 않은가. ‘나’는 누구의 친구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하고, 직장인이기도 하다. ‘나’라는 속성과 ‘가수’ ‘친구’ ‘화가’ ‘직장인’이라는 속성이 상황과 배치에 따라 가변적으로 맺어지는 것처럼, 출판도 ‘출판’이라는 속성과 ‘종이책’ ‘전자책’ ‘콘텐츠’ ‘플랫폼’ 기타 등등의 속성이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 그때그때 배치에 따라 가변적으로 맺어지는 것일 뿐이다.

출판의 모든 형식은 변하게 마련이다. 출판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생산의 모델, 유통의 모델, 소비의 모델은 만들어지고, 변형되고, 폐기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말은 우리는 필연적으로 위기와 기회를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위기 탈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이질적인 것이 나타나 성공을 무위로 돌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위기에 빠져들고, 그 실패 속에서 다시 새로운 성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출판의 위기론과 기회론은 같은 얘기일 뿐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위기와 기회 앞에서 다만 매번 다시 새롭게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出版, publication, publishing이라는 단어로도 알 수 있듯이, 출판은 명사일 때조차 동사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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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들이 만나는 순간은 미디어가 우리의 감각들에 가했던 실신 상태와 감각마비 상태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순간이다."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101쪽, 민음사)

우리는 이제 출판의 ‘비평가’(critic)가 되어야 한다. 촉발된 위기 속에서 비평가의 섬세한 시선은 현실의 표층(종이책, 전자책, 앱, 도서정가제, 셀러 만들기, 경쟁적 할인판매 등)을 뚫고 내려가, 출판이 딛고 서있는 토대(근본)를 묻는 지점으로까지 가닿는다. 출판의 비평가는 그 섬세한 시선으로 출판의 토대 밑을 떠받치고 있는 ‘출판의 힘’을 발견해냄으로써 매번 새로운 토대와 형식을 발명해내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하는 존재다.  

지금까지 5회에 걸친 연재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꾸벅^^;;)

※ 플랫폼 시대에 출판이 가야할 길 다시 읽기
☞ 1편 : 출판은 마진산업이다
☞ 2편 : 텍스트와 콘텐츠 - 프로모션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 3편 : 열린 텍스트, 대중지성의 세계
☞ 4편 : 출판, 웹을 다시 생각하다

- 대표 유재건

2011/08/23 09:00 2011/08/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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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m 2011/08/23 16:36

    웹상에서 이렇게 긴 글을 이렇게 열심히 읽어 보기는 처음...
    잘 읽고, 많이 생각하고 갑니다!

    • 그린비 2011/08/23 18:23

      열심히 읽으셨다니, 훈늉하십니다! 짝짝짝~
      책에 보다 익숙한 사람들은 웹에서 긴 글을 읽는 데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뵈요!

  2. Lipp 2011/08/23 17:21

    출판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데 이 글을 읽고나니 어렴풋이 감이 잡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 분야가 아니니 금방 잊혀지겠지만요. 사실 그게 문제죠 ... ^^
    유익한 글 잘 읽고 갑니다~

    • 그린비 2011/08/23 18:27

      댓글로는 오랜만에 뵙네욤. ^^
      잘 지내시죠? 하하;; (뜬금없는 안부인사...)

      블로그에 자주 오시면, 자주 읽게 되고, 그러다 자연스레 익숙해지실지도요. 그리고 웹서비스를 오픈하게 되면, 직접 체험(!)하시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_+

  3. 예문당 2011/08/25 16:17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질적 성장을 위해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 그린비 2011/08/25 17:54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4. 잠퇘지 2011/09/20 14:44

    아이폰,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접하면서 웹 에디터 혹은 총칭할 수 있는 디지털 에디터의 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하고 있던 차, 좋은 글을 만났네요 ^^
    감사합니다.

    • 그린비 2011/09/20 15:22

      잠퇘지님의 생각과 감응할 수 있는 글을 만나셨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디지털 에디터의 역할과 능력(!)은 저도 요즘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랍니다. 앞으로도 함께 의견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