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되면 ‘경제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한국 경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킨 전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의 뜻을 이어받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얘기한다. 그 ‘경제발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한 적이 있던가? 그 당시 정치적인 억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희생당했던 일은 ‘경제 발전’이라는 이상 앞에 철저히 가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맑스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고문당한 대학생들, 언론 탄압과 통제는 이미 잊혀진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인도네시아에도 군사쿠데타가 독재로 이어진 경우가 있다. 수하르토는 쿠데타를 통해 33년 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1965년~1967년까지 50만~150만 명에 달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학살되었다. 1968년 CIA 보고서에는 20세기 최악의 대량학살 중 하나로 이 사건을 꼽았다. 인도네시아 천연자원의 이권은 수하르토를 지원했던 미국에게 돌아갔고, 소수의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해갔다.

1997년 동아시아를 덮친 금융위기, 인도네시아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민중들은 가난하고 고달픈 삶 속에서 절망했고, 분노를 느꼈다. 이들의 분노는 민주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1998년, 수하르토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퇴진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하르토의 잔존세력들은 개혁에 강하게 저항하며, 수하르토의 경제적 업적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2008년 수하르토가 사망한 이후 언론에서는 그가 인도네시아에서 이룬 업적을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의 ‘경제적 업적’이란 한줌에 불과한 사람들의 부의 축적이 아니었던가? 발전과 진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무수한 폭력과 불평등은 어느새 가려지고 말았다.

수하르토를 보면서, 거울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경제적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경제발전’이 정치인들의 공약이며, 우리는 계속 그 ‘발전’에 ‘희망’을 걸고 있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대중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를 견지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 한다. 내부 난민의 경우에도 이런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은 대개의 경우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내치는 국가와 자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대중은 ‘내치는데도’ 매달리며, ‘내치기 때문에도’ 매달린다.
─고병권, 『추방과 탈주』, 57쪽

이제 우리는 ‘누가 우리에게 경제발전을 가져올 것인가’에서 ‘누구를 위한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는가’로 질문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무수한 폭력이 숨어있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발전’을 원하게 될까? 경제는 발전하는데, 왜 우리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별반 달라지지 않는 우리의 삶을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반을 확실하게 아는 것, 이것이 사유와 행동의 시작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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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기획팀 이민정
교과서가 깜빡한 아시아 역사 4 - 10점
유재현 글, 김주형 그림/그린비
2011/09/09 09:00 2011/09/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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