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ogue : “오겡끼데스까?”

1.
매 호마다 하나씩의 특집주제를 중심으로 삼아 왔던 『일본비평』. 이번 호는 ‘현대 일본을 정신분석하다’라는 야심찬 특집제목 아래에 10편의 글을 꽉꽉 눌러 담았습니다. 어쩐지 정신분석이라고 하면 프로이트나 라캉 등 특정한 경로로 발달한 이론체계를 쉬이 떠올리게 됩니다(지레 골치가 아파집니다). 여기 『일본비평』 5호는, 물론 그런 정신분석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무의식과 같은 정신의 심층에 있는 내용을 관찰ㆍ분석하는 일’이라는 말뜻 그대로의 정신분석에 보다 충실한 책입니다. ‘현대 일본의 정신분석’이 아니라 ‘현대 일본을 정신분석하다’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흔히 한 사람은 그의 몸과 정신의 결합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국가를 정신분석하겠다는 말에 조금은 의아스런 기분도 듭니다. 이른바 국민성(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이라는 것의 분석을 말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일본비평』 5호에서 읽게 될 ‘분석’이 일본 국민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성질들에 대한 것이어야 할 텐데요. 막상 책을 펼쳐보면 오히려 일반이라는 그물망에서 일탈한 예외들이 주된 탐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보자면, 젊은이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정규직에 취업할 생각은 안 하고, 몇 개월 ‘프리터’로 일해 돈을 벌거든 방콕(‘방에 콕!’이 아니라 진짜 방콕이지 말입니다)에 가 ‘히키코모리’(이게 ‘방에 콕!’이죠ㅋ) 생활을 하다 오길 반복한다는 ‘소토코모리’(外こもり) 현상, 이거 상당히 괴이하지요? 그런데 한술 더 떠서, 고요한 시골마을의 여고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문자 삼매경인 것도 모자라, 막장 연애담으로 넘쳐나는 ‘휴대폰 소설’ 탐독에 심취해 있다면? 심지어 이 여고생들 중 상당수의 ‘현실적인’ 진로 고려대상에 ‘갸바조’(キャバ孃, 호스티스)가 포함돼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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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31일자 산케이 신문(産經新聞)에 실린 소토코모리 생활에 관련된 기사.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 일을 하고, 쉬는 동안 일본보다 물가가 저렴한 태국에 체류하는 소토코모리의 삶을 분석하는 내용의 만화책도 출간되었다고 한다.

『일본비평』 5호는 이런 사회적 ‘병리’랄 수 있는 현상들을 들여다봄으로써 현대 일본의 정신을 분석하려 합니다. 한 사회의 병리현상은 곧 그 사회의 그림자라 말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림자는, 어떤 개별적 대상에서 생겨날 때조차 단지 그 대상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성질을 갖고 있죠. 빛의 작용으로 새삼 ‘생기는’ 게 아니라 원래 있었으나 빛에 의해 가려져 있던 것의 ‘드러남’인, 그래서 우리가 보는 건 항상 ‘개별’이 아니라 ‘부분’인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그림자로서의 사회적 병리현상이야말로 가장 예외적이자 가장 익명적(비인칭적)인 경로이므로, ‘현대 일본 정신’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한 첩경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요컨대 이번호 『일본비평』은 “현대 일본사회의 제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일본인의 ‘마음’을 읽어 보자는” 것이며, 그러자면 “‘그림자’를 간과한 채 마음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

2.
아시아 국가 중 근대의 시작을 ‘폭력’으로서 경험하지 않은 곳은 없을 겁니다. 그건 가해자 쪽에 섰던 일본이라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른바 흑선(黑船 ; 1853년 우라가에 내항한 페리함대)의 충격에 의해 메이지 시대가 열리고,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만주 학살, 한일 합방, 반천황파 숙청으로 치달은 일본 근대사의 롤러코스터적 질주는 오늘날에 이르러 멈추기는커녕 더욱 가속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비평』 5호에서 다뤄지고 있는 사회병리들은 그 질주가 노정한 현대 일본 정신의 황폐한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과거(19~20세기 초) 서구 문화계에 유행했던 자포니즘(Japonism)을 현대에 앞장서 재현하는 것만 같던 오타쿠 문화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에 의해 원자력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가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한 아톰과 함께 표류 당했습니다. 고도성장기 의기양양해진 일본에서 창궐했던 각종 일본인론·일본교론(종교를 포함해 어떤 외래문화도 일본 토양에 일본식으로 흡수되고 만다는) 또한 옴진리교 테러 사건으로 급반전을 맞았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정신적 황폐를 호소하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더욱 격렬하고 소모적인 경쟁을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시스템은 도무지 고삐를 늦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저는 최근에 일본 도쿄에 다녀왔는데, 거리의 광고판에서 가장 많이 본 단어가 ‘겐키’(元氣)였습니다. ‘힘내자’ ‘기운내자’ 이런 의미를 담은 메시지들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던 이유가 뭐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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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를 거듭하고 한계를 뛰어 넘어 '초사이어인'이 되면,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드래곤볼』의 설정. 이러한 '초사이어인'의 등장 역시 '더욱 강해져야 한다'라는 신자유주의적 경쟁구조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일본인론에는 ‘저울의 논리’라는 말이 있답니다. 주어진 사건에 대해, ‘그것도 가능하지만 이것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균형을 잡음으로써 가치판단을 보류하는 사고 논리를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사회적 차원에서 봤을 때 이 논리는 상당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당장은 별다른 사회적 갈등을 낳지 않고 현상 유지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모순적이고 상호배리적인 것들을 무차별하게 끌어들임으로써 사회가 서 있는 지반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소의 창구를 찾지 못하는 사회적 불만들, 미래 전망이 부재한 데서 오는 절망에 휩싸인 사람들, 결국 사회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타자성. 이런 것들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할 때 일본사회는 옴진리교 사건 이상의 파국을 맞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을까요? 결국 일본 정신에 드리운 그림자는 이 위태위태함의 반영인 셈입니다.

3.
타자는 결코 ‘나’의 언어게임 규칙에 의해 코드화되거나 영토화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가부장제부터 근대의 파시즘,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간중심주의에서 현대의 정치이데올로기, 종교적 근본주의, 신자유주의 및 환경파괴적 경제논리 등에 깔려 있는 모든 형태의 모놀로그적 사유는 동일한 언어게임 안에서 그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들을 동질화 내지 배제하는 동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박규태, 「편집자의 말_아프게 피지 않는 꽃은 없다」 , 『일본비평』 5호, 9쪽

『일본비평』은 창간사에서부터 밝히고 있듯, 일본에 대해 ‘말하기’가 아닌, ‘말 걸기’로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지식인으로서 「일본정신분석」을 시행했던 가라타니 고진이 “비판은 자신의 입장으로부터 다른 것을 공격한다는 의미이고, 비평은 오히려 자신의 근거 자체를 되묻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며, ‘현대 일본 정신을 분석하다’를 표제로 내건 『일본비평』 5호에서도 그대로 관철되는 자세입니다. 일본을 타자로서 ‘비판’하지 않고 병리현상의 진단을 ‘말하기’로 끝내지 않으며, ‘힘내라!’ ‘다시 뛰어라!’라고 닦달하는 목소리에 맞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건네는 ‘괜찮아요?’의 안부. 이 끝나지 않는/끝낼 수 없는 ‘말 걸기’로서 준비된 오늘의 다이얼로그 제목은 “오겡끼데스까?”입니다. ^^

- 편집부 김효진
일본비평 5호 - 10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엮음/그린비
2011/09/19 09:00 2011/09/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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