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와 함께 읽는 아시아 역사 2편

전쟁 없인 못 살아

조지 워싱턴의 독립전쟁, 링컨의 남북전쟁 그리고 유럽과 태평양, 인도차이나, 한국, 베트남에서의 전쟁. 워싱턴 D.C의 상징인 내셔널 몰은 전쟁으로 포위되어 있는 형국인데 그게 바로 미국의 역사이다. 후일 테러와의 전쟁 또한 기념물이 되어 이 부근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유재현, 『거꾸로 가는 미국』, 318~319쪽

미국은 제국주의 후발주자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시아를 식민지배하고 있을 때, 미국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미국은 직접 분쟁에 끼어들기보다 배후에서 지원을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있었던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고무와 아편을 착취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프랑스가 식민지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프랑스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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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는 인도차이나 반도 및 아시아 지역에서 비밀리에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의 임무 중에는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을 지원했지만, 1949년 혁명으로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자본주의의 적인 공산주의는 당연히 미국의 적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종전을 선언했다. 1954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인도차이나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대한 국제회담이 열렸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인도차이나의 경우는 3개의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협정의 내용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적대적인 행위를 중단하고 남부와 북부를 나누어 통일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가국 중 미국만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비밀은 이후 미국의 행보에서 드러난다. 북베트남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의 영향이 강했다. 미국은 인구가 많은 북베트남이 선거에서 유리할 것이라 예상하고 남베트남에 친미세력을 양성했다. 사실 이 방법은 이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미국은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 북베트남의 인구를 남베트남으로 이주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 해군은 이주민을 수송하기 위해 '자유로의 항해'라는 이름의 작전을 펼쳤다. 미국과 남베트남의 친미정권은 1956년으로 예정된 남북 통일선거 대신 남베트남 자체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전개 같다는 생각이…) 부정투표를 통해 98.2%의 선거율로 남베트남은 베트남공화국이 되었다. 이 과정에 CIA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당시 CIA 책임자 에드워드 랜스데일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핵심은 자본주의라구

남베트남 친미정권 수립의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끼워졌다. 남베트남에서는 바로 공산주의자 제거작전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되었다. 탄압이 극심해지자 공산주의 세력은 밀림과 지하로 숨었는데, 이들에게 무장투쟁은 필연적이었다. 미국과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농촌을 근거지로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병행하였다. 민심은 공산주의 세력에 온정적이었다. 그러나 1960년, 미국의 대통령 존 F.케네디에 의해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킬 '전략촌' 사업이 시작된다. 베트콩들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마을을 정부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위치로 이주시키는 것이 바로 전략촌 사업이다. 하지만 전략촌 사업은 농민들의 반대와 군의 부패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이를 계기로 친미정권은 미국에 신뢰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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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를 거리에서 바로 사형에 처하는 이 사진은 풀리처 상을 받았으며, 반전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3년에는 미국의 지원 아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남한에서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도,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도 모두 이 즈음이다. 존 F. 케네디도 비슷한 시기에 암살되었고,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케네디의 뒤를 이었다. 존슨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대리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고 이를 빌미로 베트남을 침공한다.

1965년 2월, 미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했고 도시의 모든 것이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전선은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확대되었고, 게릴라와 군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확산되어 병력 증원이 어려워지자 우방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바로 남한의 박정희 정부이다. 남한에서는 32만 명이 베트남 전쟁에 동원되었다. 미군이 전쟁에서 퍼부은 폭탄의 총량은 270만 톤으로 베트남 2백만 명, 캄보디아 70만 명, 라오스 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5만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군산복합체는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다. 미국이 패배한 것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군산복합체는 그들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다.

값비싼 자유의 대가

2001년 9월 11일 직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 정권은 평소답지 않게 매우 합리적으로 증거의 제시부터 요구했지만 9월 19일 미국은 증거 대신 전폭기와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이 작전에는 '무한의 정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9월 26일 유럽연합과 이른바 연합군을 결성한 후 작전의 명칭은 '항구적 정의'로 바뀌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정의에서 자유로 바뀌는 데에 1주일이 걸린 셈이다. 이 전쟁에 정의보다 자유가 적합하다는 걸 깨닫는 데에 1주일이 걸렸다고도 볼 수 있다. 정의란 자유보다 덜 추상적인 반면 보다 구체적인 개념이어서 악당들이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예컨대 만인의 자유란 만 개의 자유로 호도될 수 있지만 정의란 오직 하나로 인식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경우에 자유란 오직 힘의 논리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된다. 강자가 폭압의 자유를 휘두를 때 약자의 자유란 기껏해야 늦기 전에 도망갈 자유 뿐이다.
—유재현, 『거꾸로 가는 미국』, 314쪽

미국의 국방비는 2000년 2,672억 달러에서 2008년에는 4,814억 달러로 무려 80%가 증가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분류된 예산를 제외한 수치이다. 부시 행정부는 2009년 국방비 예산으로 5,154억 달러를, 테러와의 전쟁으로는 1,900억 달러를 요청했는데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금융공황에 빠진 미국을 구하기 위해 요청된 구제금융 예산과 맞먹는다. 금융은 공황이었지만, 군산복합체들에게는 호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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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이름 아래 미국과 적대적인 국가들은 '악의 축'이자 '테러범'들로 규정되었다. 미국이 벌인 전쟁에 관해 종교적인 이유(일신교)도 영향이 없다고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전쟁 비용' 역시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힘인 것 같다.

201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일어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고 정권도 교체되었지만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평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바마 정부 역시 무기판매 국가 1위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까.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에 대한 책이 국내에도 얼마나 많이 출간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오바마처럼 되어라'는 말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겠다.

오바마, 말로만 중동평화 ‘들통’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가 2009년 이스라엘에 벙커버스터 유도폭탄을 판매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 최신호는 “오바마 대통령이 공개적으론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상에서 양보할 것을 압박하면서 뒤로는 비밀리에 최신형 벙커버스터 제공 등 주목할 만한 군사 지원을 승인했다”고 양국 관리들의 증언을 인용해 폭로했다. 조지 부시 전 정부도 수출을 거부했던 첨단무기를 오바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이스라엘에 넘겨준 꼴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정식 명칭이 ‘GBU-28’인 벙커버스터는 최신형 지중관통 정밀 유도폭탄으로, 5000파운드(2268kg)의 폭약을 장착하고 지하 30m 깊이의 목표물을 파괴하거나 6m 두께의 콘크리트 벽까지 뚫을 수 있는 막강한 파괴력을 지녔다.

이스라엘은 2005년 처음으로 미국에 이 무기의 판매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당시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이 첨단무기 기술을 중국에 이전하고 있다고 의심해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을 대부분 동결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체 개발을 추진하다가 미국산 수입이 더 저렴하다고 보고 미국 쪽에 벙커버스터 인도를 집요하게 요청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07년 당시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2009년 이후에나 벙커버스터 판매를 지시하겠다고 밝혔지만, 정권 말기인 2009년 1월에도 이스라엘의 요청을 또다시 거부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오바마 정부가 이를 뒤집은 것이다.

미 군부는 이런 결정에 대해 중동 지역의 민감한 대치 상황을 고려해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군 합참 부의장이었던 제임스 카트라이트 전 해병대 사령관은 “(벙커버스터 판매를) 이란과 이스라엘이 각각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이란 핵 의혹 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에 ‘청신호’를 켜준 것으로 비치지 않겠느냐는 경계심이었다.

한편 <뉴욕 타임스>는 24일 미 의회 보고서를 근거로, 지난해 전세계의 무기 판매와 계약이 그 전해보다 38%나 줄었지만 미국은 213억달러 어치의 무기를 판매(점유율 52.7%)해 1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독일 등이 뒤를 이었다. 무기 수입은 인도(58억 달러)가 1위였으며, 우리나라는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에 이어 8위에 올랐다. [2011년 9월 25일자 한겨레신문]

자유와 정의를 외치던 미국, 그 외침 아래 숨겨진 것은 탐욕스러운 자본 외에 무엇이 더 있는가?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병사 기념관에는 미군과 유엔군의 사망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의 숫자가 적혀 있다. 그러나 미군이 희생시킨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곳곳에 있는 전쟁기념비도 마찬가지이다. 적에 대해서 철저하게 숨기는 것, 그것이 미국이 말하는 '이른바 자유'인 것일까. 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기념관에 적힌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가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 그 자유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값비싼 가치로만 남게 될 것이다.

- 웹기획팀 이민정
교과서가 깜빡한 아시아 역사 3 - 10점
유재현 글, 김주형 그림/그린비
2011/09/28 09:00 2011/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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