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저런 일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꽤나 ‘진보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여성주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인데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 ‘나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더 놀랐던 것은 개중에는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무지한 사람도 있지만, 여성주의에 대한 무지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는 점입니다. 후자들은 자신이 ‘좌파’이기 때문에 여성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유 없는 비난에 불과한 경우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2. 사실 이념으로서 ‘진보’는 단일한 형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 등, 다양한 부분에서 ‘진보 기준’을 만족시켜야 소위 ‘좌파’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한국의 ‘좌파’들은 너무나도 단일한 측면에서 자신의 진보성을 찾고 있습니다(가령 경제문제에만 진보적이던가, 독재/반독재의 대결구도에서만 진보적이던가).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대부분의 ‘이성애자 남자 좌파’들은 여성주의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고 보수적입니다. 물론 여성주의의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애자 남자 좌파’들은 여러 쟁점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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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보적인 척 하지만 사실은 보수적인 ‘이성애자 남자 좌파’들은, 정희진 씨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여러 번 정독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정희진 씨가 제시한 ‘언어의 문제’입니다. 정희진 씨는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좌파 이론들이 남성의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비남성, 비이성애자, 비장애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희진 씨의 비판은 상당히 타당합니다. 책을 읽다 재미있는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99년쯤 이었던가요? 민주노총에서 만든 메이데이(노동절) 포스터가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된 그 포스터는, 남편은 투쟁하러 나가고 아내는 아이를 업은 채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으로 만들어져 있었죠.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그 포스터의 의미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희진 씨가 이야기 한 것을 그때의 사건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포스터는 남성들의 언어로 사고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성 언어’를 벗어나 포스터를 바라보면, 주체인 남성과 주체에 의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포스터 안의 여성은 능동적인 자기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남편이 부여하는 의미밖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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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노동절 포스터>

4.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정희진 씨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p. 42)를 추구합니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희진 씨는 여성주의가 “정체성의 정치”의 한계에서 벗어나 더 많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멤버십에 기반을 두면서도(rooting) 그것을 본질화하지 않으며, 타자를 동질화하지 않고 상대방의 상황으로 이동(shifting)할 수 있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러한 형태의 대화가 바로 “횡단의 정치”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기존의 주장에서 벗어나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합니다.

5. 제가 흥미를 가졌던 두번째 문제의식은, “다양한 목소리”를 여성주의 내부로까지 확장하는 정희진 씨의 방법입니다. 정희진 씨는 성매매 문제를 대하는 두 가지의 여성주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동일한 집단으로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계급, 인종, 국적, 학력 등의 여러 상황에 의해 다양한 차이를 가진 여성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차이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긍정해야한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억압받는 단일한 주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여성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폭력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정희진 씨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측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희진 씨는 “‘여성’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기존 여성주의를 해체, 재구성할 것”이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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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희진 씨가 ‘차이’를 통해 여성주의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사실 기존의 사회운동 내부에서도 진행되었어야 하는 작업입니다. 90년대 초반 수입된 각종 ‘포스트~주의’의(^^) 문제의식(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다면)이 바로 차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운동의 역할을 긍정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포스트~주의’의 문제의식조차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습니다. 여성운동, 장애인인권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생겨나면서 외형적으로 ‘차이’를 생산하긴 했으나, 각 운동 내부에서는 ‘차이’가 허용되지 않는 ‘닫힌 구조’인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7. 이런 정희진 씨의 문제의식을 좀더 확장하는 차원에서, 지금 민주노동당 사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민주노동당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정희진 씨의 문제의식의 확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국회의원을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차이에 대해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의 정파가 당권을 장악하면 다른 정파의 주장에 대해서는 묵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차이, 소수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당, 도리어 당 내부의 차이를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희진 씨의 문제의식은 여성주의를 넘어, 보수세력뿐만 아니라 한국 좌파들에게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편집부 진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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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5:32 2008/01/3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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