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접하는 숭고한 힘, 내셔널리즘

“무사도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가쿠레』(葉隠)의 말이다. “삶과 죽음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택하면 된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각오를 굳게 하고 죽음으로 돌진하면 된다”라는 말이 이어진다. 이 『하가쿠레』 역시 1940년대의 학생들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준비하는 책이었다. 당시 이와나미 문고판 『하가쿠레』를 주머니 속에 넣고 전쟁터로 향했던 청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가쿠레』가 말하는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라는 것은 자각의 입장에 가깝다. 일상적인 자신과 죽음을 가까이 함으로써 죽을 각오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무사도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나베가 “실제로 우리가 죽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는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를 넘어서는 것이다. 야마모토 쓰네토모의 『하가쿠레』는 주종관계를 단단한 축으로 하여 죽을 각오로 살아가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만, 1943년의 국가철학자 다나베 하지메는 국가를 위해서 단적으로 죽는 것을 말하고 있다.

-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송석원 옮김 『일본 내셔널리즘 해부』, 그린비, 169쪽


군사적 전체주의가 풍미하던 시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 이 시대 일본인의 삶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적진 속으로 자폭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모습을 이해하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상과는 거리가 먼 죽음의 삶. 다른 무엇도 아닌 ‘국가’라는 존재를 위해 죽는다는 결단이 가능한 사회의 모습은 지금의 일상과는 다르다. 그렇게 야마모토와 다나베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심연이 있다. 그렇다면 무사도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떠했길래 죽음을 향해 떠난 자들의 마음에 새겨졌을까? 추측하자면, 그것은 일상에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성찰한 자들의 긴장과 담대한 태도가 아닐까, 그것이 광기로 얼룩진 국가주의 안으로 파급되어 학생들에게 흩뿌려진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국화와 칼’과 같은 것은 일본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비판받아 마땅한 일본 내셔널리즘의 이미지이다. 문제는 무사도가 아니라 무사도를 내셔널리즘으로 미화시키는 행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가'에게 '죽음'을 명령받은 가미카제 병사 _ 무사도인가, 내셔널리즘인가? 또는 '내셔널리즘으로 미화된 무사도인가?'


그러나 일상에 내셔널리즘이 없다고 어찌 단언할 수 있으랴. 오랜 시간 길들여진 ‘국가를 위하는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한일 간의 축구평가전을 할 때, 선수들을 테스트하고 팀 간 경기력을 확인하는 자리일 뿐인 그 자리에서 선수들은 죽을 각오로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지 않으면 몰매를 맞고, 무엇보다도 이런 상황이, 이런 작태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일이 한 차례 불고 꺼지는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심성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심성이다. 며칠 전에도 난 중동의 꼼수*에 광분할 뻔하지 않았던가.

* 카타르의 축구팀 알 사드가 한국 수원과의 경기에서 펼쳤던 비매너 플레이에 이어 결승전에도 침대축구를 선사하여 아랍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심도록 내 마음속을 자극하였다.

- 편집부 주승일
일본 내셔널리즘 해부 - 10점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송석원 옮김/그린비
2011/11/09 09:00 2011/11/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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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으헿 2011/11/09 09:09

    읽..읽어보고 싶네요. (후..후회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 그린비 2011/11/09 10:34

      저도 일본 문화(만화, 드라마 등)에 익숙하지만, 그 문화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요번 기회에 함께 파헤쳐 보기로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