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슬럼프』 편집후기
이제 ‘위기’라는 말도 지친 사람들을 위하여

『글로벌 슬럼프』의 편집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 살고 있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계약기간이 석 달 후면 만료되는데, 주변 시세에 맞게 전세금을 좀 올려야겠다는 것이었죠. 예상하고 있던 터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몇 주의 유예기간을 요청하고는 인터넷 카페와 주변 부동산 유리창에 나붙은 광고들을 들여다보면서 열심히 주판알을 튕겼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금 가진 돈으로는 이만한 위치와 넓이와 옵션을 모두 갖춘 방을 찾기란 진짜 힘들겠구나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해 지는 겨울 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쉴 곳 어데요, 하며 짜증이 슬슬 솟아오를 참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골목 전봇대마다 찬란히 붙어 있던, 하지만 평소엔 잘 눈에 띄지 않던, “신축빌라 분양! 실입주금 얼마부터!!” 광고들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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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봤던 것이 바로 이런 광고였습니다. 2700만원에 집에 들어가 살 권리를 주고, 15년간 대출금을 갚을 의무를 주겠다는 광고죠.

이쪽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그동안엔 사기성인가 아니면 근저당이 걸려 있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광고들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아아, 이게 이런 거군요. 들어갈 집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게 해주고 그 집에서 살면서 10~20년에 걸쳐 빚을 다 갚으면 진짜 자기 집이 되는 것. 일단 사기는 아니니까, 보자…… 대출금과 이자 따위를 머릿속에 넣어 계산을 해보니, 하! 멋지네요! 절대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집만 생각하고 허리띠 단디 졸라매는 거 한 15년만 하면 그럴싸한 홈홈스윗홈이 생기는 거네요!! 라고 비꼬는 척은 하지만…… 솔직히, 아주 잠시, 어차피 집 한 채 얻기 쉽지 않은 세상에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본 것도 사실입니다(ㅠㅠ). ‘정규직’인 ‘맞벌이’ 신혼부부 정도면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해도 또 덥석 물기도 꺼림칙한 게, 15년 동안 무슨 일이 어떻게 있을 줄 압니까?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지, 사는 동네가 질릴 수도 있지, 아파서 큰돈이 들어갈 수도 있지, 금융 대혼란으로 대출이자가 확 올라가기라도 하면? 아이고, 머리야. 집주인느님, 저 그냥 좀 더 내고 여기서 계속 살겠습니다. 굽신굽신!!

보통 때의 저라면, 이전의 저라면, 이 정도 생각에서 멈췄을 겁니다. 그저 대한민국 주택 정책에나 욕을 한 바가지 하면서 툴툴거렸겠지요. 하지만 『글로벌 슬럼프』를 편집하는 입장에서는 교정지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그대로 제 삶에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라고 들어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2007~2008년 미국발 금융공황을 촉발시킨 주범으로 지목되는 요 녀석, 쉽게 말하면 ‘비우량 주택융자’지요. 미국에서는 이렇게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게 일반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은행도 이런 대출을 해주지만 아예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요. 이런 회사들은 신용도가 높은 대출자에게는 안정적인 금리로 대출을 해주는 반면, 저소득층이나 유색인종 등의 사람들에게는 높은 변동금리를 적용합니다. 바로 이 후자의 경우가 ‘프라임’(우량)하지 못한 ‘모기지’(mortgage, 융자), 즉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융자)가 되는 것이죠. 경기침체로 수많은 대출자들이 실직을 하고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이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던 회사들이 파산하게 된 것이 바로 2007~2008년 금융 공황의 표면적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대출자 몇몇이 대출금을 좀 못 냈기로서니 회사 전체가 휘청거렸단 말이죠. 그리고 회사 몇몇이 파산 좀 했기로서니 금융 ‘공황’이라고 할 만큼 난리가 났단 말이죠?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비실비실한 걸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 회사들이 전통적인 금융기관들처럼 ‘이자를 받아서’ 이윤을 차리는 회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이자는 더 이상 주요 수입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대출금을 받지 못할 위험, 주가가 하락할 위험 따위를 가지고 보험 성격이 짙은 금융상품을 만들어 냈고, 그것들을 사고팔기를 반복함으로써 기하급수적인 규모의 돈놀이 판을 벌였습니다. 실제로 물건이 오가는 거래가 아닌, 장부상에서 오가면서 0자가 무한히 덧붙는 이 거래 속에서 CEO와 임원들은 돈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반이란 너무도 취약했지요. 대표적 투자회사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할 당시를 보면 자본금 중 진짜 자기 돈은 45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규모는 6,350억 달러(현재 환율로 무려 727조 원)나 되었던 데다가, 그 돈들 대부분이 다른 회사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이러니 그 난리가 안 날려야 안 날 수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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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풍자한 만화. 집들은 자유낙하하고, 은행들은 부실의 첨탑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절묘합니다.

IMF 구제금융 이후 어차피 매일 매일이 전쟁터요, 그깟 경제위기쯤이야 만성화된 한국 사람들에겐 크게 체감되지 않았던 이역만리의 금융 공황. 한 3년 지났겠다, 대략 충격에서 벗어난 것도 같고…… 그저 그렇게 넘겨 버리면 그만인 걸까요? 우리는 다시 펼쳐질 호황의 날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면 되는 걸까요? 여기서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맥낼리는 단호히 ‘No’라고 말합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불황이 끝났으니 이제 상승곡선을 탄다고 기대하지 말라고요. 이 위기는 스쳐 지나가는 위기가 아닌, “부동산 거품의 파열, 은행 도산의 물결, 일련의 국가 채무 위기들, 경기침체의 재발 등이 서로 얽혀, 지속적인 경제 회복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그 위기들이 수년간 지속되는” 전 지구적 경기침체, 즉 ‘글로벌 슬럼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지난 25년간 호황을 구가해 왔던 신자유주의가 이윤을 뽑아 먹을 곳이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렇기에 공공 영역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지요). 이 신자유주의가 다른 새로운 형태로 변이될 때까지 세계경제는 (마치 자본주의가 1970~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변형되기까지 오랜 슬럼프를 겪었던 것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계속 허덕거릴 겁니다. 그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이윤의 원천을 발견하고 돌파구를 찾을지, 아예 새로운 가치를 좇아 방향을 바꾸게 될지가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세계경제사에서 질적인 구조 변화를 가져오는 한 국면”이며, “이 국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려면 적어도 향후 한 세대 동안 정치와 경제를 재구성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 맥낼리의 주장입니다.

물론 세계경제의 흐름과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우짜겠노, 그래도 좋은 날이 올 때까지 니가 정신 단단히 차리고 살아야 안 되겠나”라는 말을 십수 년 째 들어도 좋은 날이 안 오는데 우짜겠노, 라는 말을 되돌려주면서 정남이 엉덩이를 확 주 차 삐고 싶은 저로서는 공감 가는 분석이자 주장이었습니다. 책을 편집하면서 가만 생각해 보니 어느새 ‘경제위기’라는 것에 너무 둔감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끔 언론에서 들려오는, 경상수지니 환율이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이야기는 답은 없고 답답은 하니 들으나 마나였지요. 제가 철이 들고부터 경제란 언제나 어려운 것이었단 말입니다. 헌데 맥낼리의 글을 읽고, 또 (대개 경제상황을 장밋빛으로 포장하거나, 아니면 우리 보고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가르쳐 왔던) 언론에서조차도 심상치 않은 소식들 ― 사상 초유의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등지의 위태로운 국가 재정, 무려 900조 원을 넘겼다는 대한민국의 가계부채 등 ― 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이 체제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어떤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이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가계부채가 뇌관이 되어 터지고, 그것이 금융 영역에서 여차저차 몇 단계를 거친 뒤에, 뜬금없이 집주인이 전세금을 두 배로 올려서 거리에 나앉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무력감입니다. 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저 1%들의 이익 때문에 우리의 삶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서 많은 것을 담보로 잡히고서야 그나마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우리들이 그 담보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위기’라는 말도 지친 우리들이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이 사실에 화가 나십니까? 그럼 우리 함께 『글로벌 슬럼프』를 읽어 봅시다. 자본주의(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괴롭혀 온 악랄한 수법들을 대면하고, 우리의 상처가 단순히 일개 가정에 국한된 시련이 아니라 전 지구적 시각에서 모두의 아픔과 맞닿아 있음을 실감하며,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 편집부 태하
글로벌 슬럼프 - 10점
데이비드 맥낼리 지음, 강수돌.김낙중 옮김/그린비
2011/12/02 09:00 2011/12/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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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톡스 2011/12/02 20:19

    <글로벌 슬럼프>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익숙지 않은 내용인데 번역도 잘 읽히고 만듦새도 잘 가다듬어진 좋은 책이네요. 그린비님들의 연재물도 잘 보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 업무로도 바쁘실 텐데 다들 굉장히 정성들여 글을 쓰시는 걸 보고 놀랐어요. 개인의 절실한 경험에서 우러난 슬럼프 해석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그린비 2011/12/04 20:31

      프톡스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칭찬해주시니 기쁘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홍홍홍~ ^^;;
      프톡스님 말씀처럼 개인의 슬럼프 해석들이 더더더욱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