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블랑쇼 읽는 여자~

소설을 (제대로) 읽어 본 지는 벌써 육 년이 더 지난 듯합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읽어 보기도 했겠지만 소설을 구입해서 읽은 건 언제였던가 싶기도 하네요. 한때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좋은 글이라는 게 결코 소설이나 시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건 아시죠?) 문학평론가들의 글을 추천받아 읽어 보기도 했지만, 거기서 인용되는 작품을 알아야 말이죠. 저의 문학 수준이란....고등학교 문학 수업 이후로 정지되어 있었습니다(그래도 필수 문학작품들은 입시를 위해 아주 열심히 읽었지요) 거기다 프랑스문학이라뇨. 불문과 다니던 친구들이 “말XX메, 쥑일~” 뭐 이러기도 했지만, 저는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지, 프랑스문학 전공은 아닌지라 별 생각 없이 (성적하락의 원인이었던) 다양한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그녀들의 원망을 들어주며 술잔을 채워 주곤 했지요. ㅎㅎ
 
하지만 블랑쇼의 『도래할 책』은 느낌부터 달랐습니다. 많은 문학이론서들이 작품의 분명한 목적을 밝힌다거나, 인용하는 작품들을 퍼즐 풀듯 해석해 준다거나, 아니면 작품에서 사회의 무의식을 찾아내려고 한다면, 『도래할 책』은 작품에 대한 확실한 해석이나, 작품에 담긴 어떤 요소들이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는 세세한 분석은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디세우스를 매혹시키고, 뱃사람들을 이끄는 ‘세이렌의 노래’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어떤 지향도, 어떤 목적도 없고 오직 무(無)의 생성, 자기자신과 본질적인 비인칭성을 갖고, 끊임없이 가능을 불가능으로 만드는 예술작품의 기원을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여기까지 읽고 계신 분들은 벌써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아니 그럼 이게 뭐야? 무(無)는 없음이 아닌가? 그게 뭘 생성한다는 거지? 자기자신과 본질적인 비인칭성을 갖는다는 말은 또 뭐야? 하여간 프랑스 것들은 적응이 안 돼~.라고 생각들 하시겠지요. 역시나 블랑쇼는 어렵다고 생각하시며, 블랑쇼만 어렵나~ 푸코니, 데리다니, 블랑쇼한테 영향받았다는 애들 전체가 어렵다고 한탄하시는 분들도 꽤 되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선 안 됩니다.

작품, 블랑쇼의 중요 요소

예술 전반으로 생각했을 때 범위가 넓다면, 문학만 놓고 생각해 보도록 하죠. 앞서 세이렌들의 노래가 이끄는 곳이 무의 생성인 장소였죠. 어쨌든 그곳은 무의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블랑쇼에게 있어 문학의 본질은 죽음이기도 하고, ‘사라짐’이기도 합니다. 이 사라짐이 본질이라면 문학의 목표가 어떤 인간적이거나 문화적인 외부의 원천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모두들 문학작품은 명료하고 분명한 (작품 내부의) 세계 해석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블랑쇼는 이런 전통적 의미의 문학 체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꾸준히 천착했던 대로 문학적 체험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 뿐이고, 작가는 무에 이끌려 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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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세이렌>

그래서 그는 작가를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글을 쓰며 패배감만을 느낍니다. 무를 향해, 심연에 다가서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은 결코 그 중심(물론 이 중심을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분명한 핵! 물리적 실체가 있는 코어로 생각하믄 곤란합니다~)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글은 그저 작가 재능의 표현일 뿐이지 기원으로서의 예술, 우리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 빈 중심을 표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블랑쇼는 작가가 해야 할 일이란 작품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드러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품의 고유한 현실성이라는 것도 비평이나, 작가의 주관성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로서만 드러나야 하는 것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블랑쇼에게 중요한 건 작품이고, 작품만이 문학이 살아내는 현실이다~뭐 이런 이야기죠.

헤맴, 오류로 보는 블랑쇼 문학의 진실

편집후기가 뭐 이래~하시는 분들 계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시구욤. ㅎㅎ 아까 분명 블랑쇼에게 중요한 건 작품이란 이야기~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란 바깥과 관계를 맺으며 길들여지지 않는 것, 이질적인 것, 이 세계와도 어떠한 시간과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솟아납니다. 친숙한 현재의 현실이 아니라(당연히 그러겠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이 아닌 세이렌이 나를 노래의 바다로 이끌었으니까요), 낯설고 두렵지만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해주는 바깥과 접촉을 했을 때 진정한 글쓰기의 욕망과 형상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낯설고 두려운 체험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는 내 현실에 부합하거나, 현실을 포장하기 위한 글쓰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글쓰기는 방황합니다. 바깥을 향해야 하기에 정착과 지배와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덕분에 글쓰기는 제대로 된 의미를 갖지 못하고 “헛걸음”인 것처럼 전하려는 의미에서 미끌어지고, 여러 번 시도하지만 오류가 되며, 반복으로 어떻게든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나 다시 헛걸음이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듯도 합니다. 블랑쇼의 사유는 문학해석의 목적이나 어떤 지향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헤맴, 그 오류, 그 반복 자체가 목표가 되며, 거기서 오는 그 역설들을 문학적 체험의 일부로 받아들이니까요.

블랑쇼는 특이하게도 이 “헤맴”을 무척 중요하게 다룹니다. 정착하고 정주하는 것은 블랑쇼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혹시나 객관식 나오면 바로 X하세욤~). 오히려 그는『문학의 공간』같은 텍스트에서 “방황하는 자의 조국은 진실이 아니라 유배”라고 말할 정도로 “헤맴”이란 요소를 중요하게 다루죠. 또한 “오류”도 중요합니다. 진리와 대비되는 오류는 부정적 의미를 갖겠지만, 블랑쇼에게 있어 오류야말로 문학의 진실의 되어 우리를 문학의 본질로 이끕니다. “헤맴”을 세상 바깥을 향해 이리저리 헛걸음하며 세상의 뻔한 진실과는 다른 차원의 진실로 이끌어 주죠. 어떻게 보면 오류나 헤맴을 통해 우리는 각각의 문학적 체험을 하나의 진실로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블랑쇼도 아마 그런 걸 원했기에, 모든 독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신만의 개별적인 문학체험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고, 거기서 존재를 상실하고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자기를 발견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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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히 전진해도 되는 꼭 그만큼, 꼭 힘의 정도만큼, 사람들은 진리에 다가간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블랑쇼의 사유가 오직 문학이론만이 아니며, 그의 개념이 오직 작품, 헤맴, 오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아마 『도래할 책』을 읽을 때, 저 세 가지를 알아 두신다면 그래도 블랑쇼가 아주 조금은 저처럼 제멋대로 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블랑쇼야말로 오류와 헤맴 속에서 독자들이 문학적 진실의 길을 찾도록 독려했음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또한! 미래의 작가분들은『도래할 책』을 읽으며, 많은 작가들이 쓰이지 않은 글 속에서 그들의 작품을 완성해 갔음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수많은 쪽글 속에서 작품을 완성해 갔던 작가들의 이야기는 제가 기회가 되면 다음에 한 번 더! ㅎㅎ). 또한 난 작가도 아니고, 프랑스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데 왜 읽어야 하냐고 물으시는 분들은, 고정된 글쓰기에서 벗어나, 읽는 것만으로 독특한 체험을 하게 만드는 그의 글들을(굳이『도래할 책』만이 아니더라도) 읽으며, 독서의 즐거움과 블랑쇼가 말하는 독서의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다소 공익광고스럽게 오늘 글 마무리하겠습니다.

- 편집부 강혜
도래할 책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그린비
2011/12/12 09:00 2011/12/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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