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잡지 <기획회의>의 청탁을 받아 전자책을 주제로 쓴 글을 포스팅합니다.

‘혹시나’로 시작된 한해가 ‘역시나’로 저물어간다. 전자책은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 버렸고, 태어나기도 전에 늙어버린 것 같다. 받아들이자니 찜찜하고, 무시하자니 켕기는 애물단지, 2011년 말 현재, 한국출판에서 전자책이 갖는 위상이다.

낡은 것은 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흔들릴 때는 잡을 것이 필요하다. 최효종이 일상의 소소한 애매함에 명쾌한 기준을 잡아주는 남자라면, 선굵게 전쟁터에서의 생존 기준을 정해주는 남자로는 손자가 있다. ‘애정남’ 손자에게 물어보면 전자책으로 가는 길이 조금은 잘 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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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는 『손자병법』 제1편 첫머리에서 “전쟁 전 헤아려야 할 다섯 가지”를 언급한다. 이른바 도, 천, 지, 장, 법.

먼저 ‘도’(道)는 말 그대로 가야 할 ‘길’을 가리킨다. 그 길은 욕망(needs) 위로 나 있다. 욕망이란 ‘~을 하고자 함’이다. 의식적인 것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도 있으며, 개인적인 것도 있고, 시대적인 것도 있다. 전자책과 관련해 ‘도’를 묻는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이 시대와 독자는 진정으로 전자책을 원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천’(天)타이밍(timing)을 말한다. 인간의 삶과 일에는 도(度)가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타이밍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서는 안 되며, 빠르거나 느려서도 안 된다. 도(度)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도(度)는 도(道)와도 통한다. 도(度)를 넘거나 도(道)를 보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고, 일은 성사되지 않는다.

‘지’(地)는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대지로서, 갖고 있는 역량(capacity)을 가리킨다. ‘천’과 ‘지’는 서로를 전제하기 때문에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때를 맞춘다는 것은 그것을 현실화시킬 역량이 있을 때 가능한 얘기다. 또 아무리 역량이 있어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역량은 현실화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 ‘천지’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천과 지가 딱 맞아떨어졌을 때다.

‘장’(將)인재(human resources)를 가리킨다. 종이책이 요구하는 인재와 전자책이 요구하는 인재는 다르다. 후자가 요구하는 인재는 사람의 흐름과 콘텐츠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기획하고 조직하는 사람이다. 웹시대는 ‘기술 우위’ 혹은 ‘기술 만능’의 착각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도 사람이고,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네트워크망도 사람들의 활동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단순한 ‘선’(線)에 지나지 않는다.

‘법’(法)은 생산, 유통, 소비를 둘러싼 프로세스나 시스템, 제도, 법규 등을 가리킨다. 디지털 파일 표준화,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전자도서정가제법이나 부가가치세법 등등의 문제가 여기에 속한다.

이제, 애정남의 조언에 따라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스마트폰 사용자가 2천만 명에 육박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가 생활의 트렌드가 된 것은 지금이 웹시대이고, 웹시대는 당연히 전자책을 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도’와 ‘천’은 확인되었다. 문제는 ‘지’다.

출판계는 지금 전자책을 생산하고 유통시킬 역량이 있는가? 대답은 “노”다. 전자책은 홀로 올 수 없다. 미국 전자책 시장이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은 강력한 디바이스를 장착한 플랫폼이 있기 때문이고, 한국 전자책 시장이 유령처럼 떠도는 것은 그런 플랫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애플이나 구글, 아마존 같은 플랫폼이 있는가. 플랫폼은 하드웨어(디바이스), 소프트웨어(디지털 콘텐츠), 네트워크가 웹상에서 삼위일체로 구동되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충족되어야만 생산, 유통, 소비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전자책 시장이 활성화된다. 만약, 플랫폼 기업인 미국 아마존이 내년에라도 킨들을 들고 한국시장에 진출한다면 한국 전자책 시장은 당장에라도 활짝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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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으로 전자책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그러나 전자책이 종이책처럼 일반화되는 시기가 언제쯤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전자책을 죽이고 살리는 건 플랫폼이다. 그렇다고 해서 출판사가 플랫폼 기업이 될 필요는 없다(실현가능성이 없기도 하지만). 다만 웹시대의 출판기업으로 생존하기 위해선, 세 가지 중 적어도 두 가지는 확보해야 한다. 선택지는 자명하다. 디바이스는 아니다. 디바이스를 확보한다는 건 독자적으로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콘텐츠(저자)와 네트워크(독자)를 틀어쥐어야 한다. 전자책을 만드는 건 출판사한텐 기본에 속하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전자책 하나만 달랑 갖고 있어서는 휘둘리기 쉽고 쓸려가기 쉽다. 이 기본을 넘어서야 한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전자책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자책에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출판사의 생존 여부는 전자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전자책에 대한 관심은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플랫폼에 들어가 차려진 밥상에 밥숟가락만 얹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쯤되면 인재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지금 필요한 인재는 아날로그 콘텐츠를 디지털 콘텐츠로 바꿀 줄 아는 인재가 아니다. 그런 인재는 지금도 많다. 올 1년 우리 출판사는 ‘인문학 네트워크’ 만드는 일을 해왔다(igreenbee.net에 접속해 회원가입을 하면 자신의 블로그가 만들어지고 타임라인이 생성되면서 그린비 웹서비스 내의 다른 회원들과 소셜네트워크 방식으로 교류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웹기획자와 웹개발자를 구하는 일이었다. IT 쪽과 출판 쪽이 교류가 없다보니 사람 구하기가 하늘에 별 심기보다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 출판의 길을 낸다는 것은 전자책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콘텐츠 관련업계 전체의 경계를 지우고 인적·물적 교류의 새 물꼬를 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판의 위상 재정립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다섯 번째 ‘법’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고민과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아직 시장지배적인 생산-유통 방식이 등장하지 않아서 이익집단 간에 눈치보기와 힘겨루기가 나타나고 있는 형국이지만, 전자책 시장이 윤곽을 드러내면 점차 자리를 잡아갈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변화된 환경에서 특정 시장지배자(플랫폼 기업)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시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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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곤살베스, <도서관> _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책은 또다른 세상과 만나는 통로라는 것이다!

세상의 만사는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대개 좋은 것은 좋은 것을 낳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을 낳는다. 악순환이 나쁜 것은 시작이 안 좋으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내딛는 첫발이 중요한 이유고, 전자책이 기다려지는 이유고, 새해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 대표 유재건

2011/12/20 09:00 2011/1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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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미와 찔레 2011/12/28 10:37

    좋은글 감사합니다!
    전자책 공부중인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 그린비 2011/12/28 13:55

      장미와 찔레님 안녕하세요.
      출판·편집 이야기에는 전자책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있답니다~
      함께 읽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

    • 장미와 찔레 2011/12/28 14:13

      아하! 그렇군요! 처음부터 정주행 해야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그린비 2011/12/28 14:21

      네~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