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속에 거의 완전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실존한다. 비의, 편위(偏位)의, 마주침의, 응고(prise)의 “유물론”이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개념들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사태를 간단히 하기 위해 일단 이렇게 말해 두자. 하나의 전혀 유다른 사고로서 이러저러한 모든 검사필(recensés) 의 유물론들에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따라서 우발성(l’aléatorie)과 우연성(contingence)의 유물론이라고 말이다. 이 검사필의 유물론들에는 보통 맑스, 엥겔스, 레닌의 것으로 간주되는 저 유물론이 포함되거니와, 그것은 합리주의적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관념론의 변형되고 위장된 형태이다. …… 이 마주침의 유물론을 그 억압에서 구출하는 것, 그것이 묵묵히 작용하는 그곳에서 그것의 은밀한 효과들(effets)을 식별하면서, 그것이 철학과 또한 유물론에 대하여 함축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고자 하는 과제이다.

─ 루이 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서관모·백승욱 편역, 새길, 1996, 36~37쪽.

『알튀세르 효과』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를 잘 몰랐던 제게 루이 알튀세르는 그저 한 명의 옛날 맑스주의자였습니다. ‘과잉결정’과 ‘이데올로기’, ‘재생산’ 같은 개념을 통해 맑스주의를 개조(refonte)하려 한 ‘지나간’ 한 명의 맑스주의 철학자, 이 정도만 알고 쉽게 그를 지나쳐 버렸죠. 그의 ‘구조주의적’ 접근법이나 ‘주체 개념의 해체’라는 문제의식도 이런저런 기회로 들어볼 수 있었지만, 알튀세르는 ‘지나간’ 한 명의 철학자였기에, 그때도 대충 듣고 흘려버렸던 것 같습니다. 또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등 여기저기서 자주 접하게 되는 사상가들의 저작에서도 그의 이름과 영향력을 종종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역시나 알튀세르는 ‘지나가 버린’ 한 명의 철학자에 불과했기에, 그의 책을 붙들어 볼 생각까진 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갔습니다. 마주침 이전, 알튀세르와 저의 관계는 대충 이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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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메디오스 바로, <계시 혹은 시계 수리공> _ "스피노자가 나를 매료시킨 또 다른 것, 그것은 철학적 전략이었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545쪽

하지만, 이렇게 몇 번 지나치기만 했음에도, 워낙 여러 경로로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1965)나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 1965)의 알튀세르,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1970)의 알튀세르에는 어느 정도 낯이 익었습니다. 여기서의 알튀세르는 맑스 텍스트를 엄밀하게 읽어 ‘헤겔 변증법과 구분되는 맑스 변증법’, ‘사회적 전체의 심급들의 구조’, ‘자본주의 구조의 재생산’ 등을 엄밀하게 밝혀내는 맑스주의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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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른바 ‘후기’ 알튀세르 사상을 담고 있는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은 (위에서 인용한) 첫 부분부터 너무나 낯설었습니다(참고로 그의 후기 사상을 읽을 수 있는 한국어 저작은 『철학과 맑스주의』, 『철학에 대하여』,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등이 있습니다. 모두 1980년대에 쓴 작품들이죠). 이 글에서 알튀세르는 ‘구조의 재생산’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들의 마주침’을 내세우며, 엥겔스나 레닌, 그람시가 아니라, (맑스주의와는 공유하는 점이 별로 없어 보이는, 나아가 맑스주의와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하이데거 등의 ‘계보’를 제시합니다. 『알튀세르 효과』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 후기 텍스트들이 그토록 낯설었던 건 제가 이 텍스트들에 익숙하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물론 그 탓도 있겠지만요). 왜냐하면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후기 알튀세르는 초기 알튀세르와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통설에 따르면 ‘이른바’ 후기 저작들은 초기(와 중기) 알튀세르와는 양립할 수 없는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고, 나아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 엘렌을 살해한 뒤 요양 중에 작성한) 후기의 원고들은 어쩌면 정신병원에 갇힌 한 비합리주의자의 광기의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알튀세르 효과』에 수록된 몇몇 글들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은 모두 알튀세르에 대한 이런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 후기 철학을 진지하게 고려하려 한다면, 아마 이런 질문들을 제기해야 할 겁니다. 알튀세르가 후기 텍스트들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알튀세르 후기 사상은 전기 사상과 얼마나 연속적이며 또 어떤 점에서 단절적인가? 후기 사상이 전기에 비해 전진한 부분은 무엇이며, 또 퇴보한 면은 어떤 것인가? 이 후기 사상이 오늘 우리의 실천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는가? 등등. 『알튀세르 효과』에 실린 글들은 각각 나름의 방향에서,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 질문들을 제기하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장에서는 ‘유물론의 우위에 대한 변증법의 종속’이라는 착상 아래 알튀세르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이 (비록 강조점은 다를지 몰라도) 여전히 연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진태원,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 5장은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유물론’(혹은 우발성의 유물론)과 그 계보를 제시하면서 하고자 했던 말을 전반적으로 설명해 줍니다(앙드레 토젤,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의 우발성들」). 7장은 이 계보의 시초에 해당하는 에피쿠로스를 비롯한 원자론자들이 알튀세르 사유에 미친 영향을 드러내 주며(양창렬, 「알튀세르를 위하여 원자론을 읽자), 8장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마키아벨리 사상을 알튀세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 줍니다(에마뉘엘 테레, 「하나의 마주침: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이 글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후기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 나름의 내용과 합리성을 지닌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글들은 알튀세르 후기 철학은 초중기 철학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 역시 밝혀 줍니다. ‘구조’와 ‘재생산’을 강조하던 초중기 알튀세르과 ‘우연성’과 ‘마주침’을 사고한 후기 알튀세르가 연속적일 수 있는 건, 그가 일관되게 맑스주의를 ‘목적론’에서 구출하고자 했기 때문, ‘목적론’에 빠지지 않고 ‘계급투쟁’을 사고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사유 역시 ‘목적론’에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했고(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 검사필의 유물론들에는 보통 맑스, 엥겔스, 레닌의 것으로 간주되는 저 유물론이 포함되거니와, 그것은 합리주의적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이다”라고 말한 것이죠), 이 오염에서 맑스주의를 정화해 내기 위해서 이런 (얼핏 보기에는 엉뚱해 보이는) 계보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론’을(그리고 덧붙인다면 ‘주체’ 개념을) 해체하려 한 알튀세르의 시도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신념을, 역사의 목적이 우리를 ‘공산주의’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어찌 보면 알튀세르는, 조만간 좋은 세상이 올 것임을 보증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울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아직 그 무엇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좋을 세상‘을 위해’ 행동해야 하며, 또 행동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성의 논리에 안주하지 않고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 항상 ‘정세’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것, 그렇게 할 때야 대중운동이, 계급투쟁이 세상을 변혁할 힘을 갖게 될 것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알튀세르가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 글들은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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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가장 비범한 측면이 그의 비교조적인 사고 양식, 가장 이단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쇄신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의 사고 양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가장 알튀세르다운 시도, 알튀세르식으로 일관된 시도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태원, 「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 『알튀세르 효과』, 107쪽

이것이 이 책을 통한 저와 알튀세르의 여러 마주침 중 하나입니다. 역사의 목적과 그 필연성이 우리를 좋은 미래로 데려가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는 순간, 현재를 새롭게(그 우연성 속에서, 그 복잡성 속에서) 파악하고 행동할 여지가 열립니다. 물론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불확실한 것들밖에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상수들과 변수들을 고려하고 고민해야 할 겁니다. 알튀세르가 묘사한 대로 말하면,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기차에 올라탄 후 기차의 풍경들을 관찰하고 여러 가능성을 실험해 보는 것, ‘유물론적’으로 사고하고 운동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일 겁니다.

유물론 철학자는 미국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항상 '달리는 기차'를 타는 사람입니다. 기차 한 대가 철로 위로 달려갑니다. 이 사람은 그 기차가 그냥 지나가도록 놓아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와 기차 사이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고 기차에 뛰어 올라탈 수도 있지요. 이 철학자는 기원도, 제1원리도, 목적지도 알지 못합니다.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서 비어 있는 자리에 걸터앉거나, 여기저기 차칸들을 걸어다니기도 하고, 다른 여행객과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게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그것들을 예견하지 못한 채 끼어들고, 기차에 관해 그리고 여객들과 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에 관해 무한한 정보와 관찰을 모읍니다. 요컨대 일련의 우발적인 마주침들을 기록하지요.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1984~87)」, 『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을 옮김, 동문선, 1997, 73~74쪽.  

- 편집부 김재훈
알튀세르 효과 - 10점
진태원 엮음, 강희경 외 옮김/그린비
2011/12/21 09:00 2011/1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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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비출판사 :: '지나간 알튀세르'와의 마주침 - 우연과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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