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혁명, 생각할 수 없는 것
모순들은 다른 곳에서도 분명히 존재했다. 콩도르세는 익명을 사용해서 유태인성과 흑인성 둘 다를 환기시키면서 노예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사악함을 다 드러내는 동시에, 점차적인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디드로는 노예제 폐지주의자였으면서도 동시에 노예제를 존속시켰던 미국혁명을 환호했다. 장 피에르 브리소 (Jean-Pierre Brissot)는 자신의 친구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검둥이 친구들의 모임’에 합류하라고 요구했는데, 프랑스에서는 그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미셸-롤프 트루요 지음,『과거 침묵시키기』, 165쪽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은 아이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볼테르, 콩도르세, 디드로 등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들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작 그 인간의 범주에 자국이 식민지배를 하고 있는 아이티 흑인노예들이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못하는 것이지요. 당시에 프랑스에서 ‘검둥이 친구들의 모임’(Société des Amis de Noirs) 회원이자 반식민주의자였던 장-피에르 브리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무장도 변변치 않게 하고 훈련도 받지 않았으며 1,800명의 대담무쌍한 프랑스군과 맞닥뜨렸을 때 두려워하곤 하던 그 5만 명의 남자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란 말인가? 어떤! 1751년 뒤플렉스(Dupleix)[18세기 인도에 설치되었던 프랑스 정치기구의 총독]와 수백 명의 프랑스군은 퐁디셰리(Pondichéri)[인도 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1674년 프랑스가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던 곳]의 포위망을 뚫고 무장이 잘 되어 있던 10만 명이나 되는 인도 군인들을 무찌를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군인들과 대포들을 가지고 있는 블랑슈랑드(M. de Blanchelande)가 무장도 거의 안 한 훨씬 열등한 흑인 군대를 두려워나 할까?(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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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맹그에서 벌어진 아이티혁명. 1791년에 일어났던 생도맹그의 반란만이 새 나라로의 영원한 독립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아이티혁명은 신세계 아프리카인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손꼽힌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흑인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지식인/정치가들도 흑인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믿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관건은 프랑스 군대가 아이티혁명을 잠재울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흑인혁명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그 혁명을 프랑스 지식인/정치가들이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이 계몽주의자들은 역사가 인류의 진보를 반영한다고 믿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그 진보의 개념이 19세기에 들어서며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면 신대륙의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신대륙과 자신의 대륙을 시간적으로 서열화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인들은 근대 ‘문명’을 이루어냈고, 신대륙인들은 문명 이전 단계에 살고 있다고 말이지요(‘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시대의 발명물입니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동(오리엔트)에서 서(서구)로의 역사발전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이 아이티혁명의 주체가 흑인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말이지요. 문명의 선구자인 자신들이 설마 문명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 의해 패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패배가 인정되는 순간 ‘서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자기정체성이 흔들릴 테니 말이죠. 이 책의 저자 트루요는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입장에서 아이티혁명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설명하는데요. 이 설명이 말해 주는 것은 아이티혁명이 당대 서구인들의 인식 지평 자체를 벗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서구 역사와 서구 철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군대를 무찌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아마도 아이티 흑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말이죠.
 
-편집부 고태경
과거 침묵시키기 - 10점
미셸-롤프 트루요 지음, 김명혜 옮김/그린비
2011/12/26 09:00 2011/12/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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