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혼자인 것은 그가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고, 그가 고립되어 온 것은 그의 사상을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사상으로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 이것이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고독에서 궁극적인 지점일 것입니다. 즉 그가 단호히 기각한, 오랫동안 도덕화된 종교적 관념적 정치사상의 전통과 자연법이라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전통—모든 것을 가렸으며 상승하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발견한 곳인—사이의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그가 독특하고 불안정한 지위를 점했다는 사실 그것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그가 두번째 전통이 모든 것을 가리기 전에 첫번째 전통에서 벗어났다는 점에 있습니다.

─루이 알튀세르,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 233~235쪽.

내 책들을 읽어 보기만 하면 독자들은 거기에서 고독이라는 주제와 책임이라는 주제가 마치 하나의 강박관념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얼마나 수없이 되뇌었던가! 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내가 한 일이라고는 언제나 전부에 대항해 혼자서(적대자들은 내가 고립된 처지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그리고 ‘모든 위험을 나 스스로 지고’ 개입하는 것뿐이었노라고. 그렇다. 나는 내가 혼자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사람들도 내게 그것을 느끼도록 했다. 하지만 내가 언제나 그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 내 책을 읽으면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은 나 자신이 내가 하는 개입과 마주해 느끼는 철저한 고독, 그리고 결국 나 하나 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내 극단적인 책임감, 그리고 내 고독과 내 책임감이 내게 부과한 모든 ‘위험들’을 항상 의식했다는 사실이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232~233쪽.

루이 알튀세르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맑스(주의)였을 겁니다.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고”, “레닌과 철학”을 한 이가 그였으니 말이죠(『알튀세르 효과』 7장, 양창렬의 「알튀세르를 위하여 원자론을 읽자」 참조). 하지만 알튀세르에겐 맑스(와 레닌, 그람시)뿐 아니라 에피쿠로스를 비롯한 원자론자들, 마키아벨리, 스피노자도(그리고 그 외에 다른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알튀세르와 이들의 마주침은 『알튀세르 효과』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이 사상들을 통해 맑스주의에 결핍되어 있던 부분들을 보완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알튀세르와 이 사유들의 관계를 좀더 정확히 해명하는 일은 알튀세르를 이해하는 데도, 맑스주의를 갱신하는 데도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알튀세르 효과』에서 특히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의 마주침이었습니다(8장, 에마뉘엘 테레의 「하나의 마주침: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우선 제가 알튀세르의 글 「마키아벨리의 고독」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고, 또 그 글에서 등장한 ‘고독’이라는 단어가 (지극히 사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매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가 ‘고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기묘해 보입니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토록 많은 찬양자들과 비판자들을 거느린,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 아니었던가요? 어째서 알튀세르는 이 인물을 묘사하면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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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Cuentos de hadas> _ "주변부의 운동은 꽉 찬 장 안에 새로운 경계를 그리며 자리를 재분배하는 한에서만 텅 빈 중심과 맞닿을 수 있다." ─「알튀세르를 위하여 원자론을 읽자』, 『알튀세르 효과』, 352쪽

그건 마키아벨리가 “혼자서” 낡은 정치이념과 단절해 새로운 정치체(와 정치사상)를 모색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오랫동안 도덕화된 종교적 관념적 정치사상과 자연법이라는 정치철학의 새로운 전통 사이”에서 사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는 ‘근대의 정치’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알지 못하는 중세의 정치사상에서 벗어났으며, 또 근대를 단순히 진보로 상정하는 동화 같은 정치사상(자연법 사상과 사회계약론 따위의)에도 물들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는 국민국가 창건이 지닌 폭력성과 잔혹성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가 봉건제의 몰락과 절대군주제의 탄생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즉 마키아벨리가 “고독”했던 건 “아무도 그의 사상으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가 이처럼 독특한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건 이와 같은 ‘조건들’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처해 있었던 역사적 조건을 통해 마키아벨리 사상의 특유성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저는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의 고독에 관해 쓴 글을 읽으면서, 또 자신의 고독에 관해 쓴 글을 읽으며, 그리고 또한 『알튀세르 효과』에서 여러 사상가들이 알튀세르에 관해 쓴 논문들을 읽으면서 ‘알튀세르의 고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튀세르는 당대에 가장 혁신적으로 맑스 텍스트를 읽어 낸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맑스 외에 다른 사상가들의 사유 역시 이단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냈습니다(그리고 이 이단적인 해석들의 진정한 의미가 알튀세르 사후에 점점 더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 그 자신이야말로 ‘혼자’서, 그리고 ‘사이’에서 사유한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 효과』는 알튀세르가 바로 이런 종류의 사상가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알튀세르가 자서전에서 쓴바, 그의 “철저한 고독”이 무엇인지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편집부 김재훈
알튀세르 효과 - 10점
진태원 엮음, 강희경 외 옮김/그린비
2012/01/05 09:00 2012/01/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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