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학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세이렌들(Sirènes). 확실히 그녀들은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노래의 진짜 원천과 진짜 행복이 어떠한 방향으로 열려 있는지를 듣게 하기 위한 방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도래할 노래에 불과한 그 불완전한 노래를 통해, 노래하는 행위가 진실로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 그 공간으로 뱃사람을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뱃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곳에 도착하고 났을 때 어떻게 됐을까? 그곳은 어떤 장소였을까? 그곳은 사라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런 장소였다. 왜냐하면 이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영역에서는 음악 그 자체가 세계 속의 다른 어떤 지점에서보다도 더욱더 완벽하게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영역은 생명존재들이 귀를 막은 채로 가라앉아 버리는 바다이며, 세이렌들도 또한 자신들의 선의의 증표로서 언젠가는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될 바다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도래할 책』, 그린비, 12쪽

블랑쇼의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오르페우스의 체험”과 “세이렌과의 만남”. 『문학의 공간』이 오르페우스의 체험에서 시작하는 책이라면, 『도래할 책』은 “세이렌과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우리가 생각하던 괴물스런 팜므파탈 세이렌의 이미지를 버리고, 그의 해석을 한번 따라가 보자.

세이렌들의 노래는 우리가 말하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세이렌들의 노래는 경이롭고 비현실적인 어떤 것들을 담고 있으며, 오디세우스를 유혹한 것처럼 뱃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노래에 이끌린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그곳은 바로 노래가 진정으로 시작되지만, 또한 노래가 사라지는 지점이다. 세이렌들의 속임수에 빠진 것일까? 그저 세이렌들은 “노래의 진짜 원천과 진짜 행복”이 어떤 방향으로 열려 있는지를 들려주기 위해 그저 그들을 이끌었을 뿐이다. 세이렌과의 만남은 그렇다면 어떤 작품과 만났을 때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 세잔의 그림을 만났을 때(나에겐 피에르 보나르의 노란색을 만났을 때?), 말러 9번을 들었을 때, 작품과 만나서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순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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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보나르, <미모사가 있는 아틀리에> _
사람들은 글쓰기를 구하기 위해 글을 쓰며, 글을 씀으로써 자기자신의 생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쓴다.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도래할 책』, 356쪽

그렇게 본다면 문제는 세이렌이 아니라 그 순간 만나게 되는 노래(순간)다. 그것이 문학으로 한정하면 문학적 체험, 예술적 체험의 본질이 되는 것이고. 하지만 그 체험들은 내 입을 막고, 기존의 나를 죽게 만든다. 갑자기 내가 있는 곳을 폐허로 만들고, 삶을 망가뜨려 놓는다.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늘 죽음을 나쁜 의미로 생각하지만, 블랑쇼에겐 그렇지도 않다. 그는 죽음을 통하지 않고선 누군가와 새롭게 만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죽음은 곧 시작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곧 죽음에서 시작되고, 타자와의 만남도 문학이 이끄는 혹은 예술이 이끄는, 더 이상 안정된 “나”가 존재하지 않는 그 황야에서 새로이 시작된다. 블랑쇼는 그래서 문학적 체험이야말로 세이렌의 노래와 같이 낯설고 어두운(밤의 체험) 체험에 기꺼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독자가 저런 체험들에 기꺼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면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이렌이 끌어들인, 그 모든 생명존재들이 귀를 막은 채로 가라앉은 바다에서는 오직 침묵만이 소리인 것처럼 존재한다. 여기서는 작품이 불가능하다. 오직 그 음악이 사라져 버린 곳에 다가가기 위한 글쓰기만이 가능하다. 음악이 시작되는 곳이었지만 침묵만이 존재하고, 글쓰기라는 창조를 생성하지만 결국은 무(無)인 공간. 블랑쇼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이다. 예술의 본질은 없다. 작품의 궁극적인 기원은 없다. 하지만 이 무는 모든 예술이 시작되게 만들며, 독자에게 밤의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작가는 그 무의 공간을 향해 글을 쓰고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블랑쇼의 사유가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성의 사유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침묵과 무에서 모든 것들이 시작되니 말이다.『도래할 책』을 읽고 있으면, 다른 소설들이, 다른 작품들이 만나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이 만드는 무의 세계 속에서 나의 죽음을 만나고 싶어진다. 예술적 체험, 문학적 체험 뒤엔 분명,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 편집부 강혜진
도래할 책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그린비
2012/01/18 09:00 2012/01/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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