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민족』표지 디자인 이야기

젠더, 그리고 민족. 둘의 관계를 슬쩍이나마 고민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입니다. 한때 뜨거운 주제가 되었던 ‘위안부 누드’ 사건에 온 국민이 분노했던 것과 관련하여 어딘가 해결되지 않는 찜찜한 기분을 안고 있던 중, 이 책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제야 젠더와 민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부끄러움?)과 함께 처음으로 그 생각으로 저를 데려가 준 책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나의 문제 제기는 ‘군 위안부’ 문제가 성적 표현의 금기 영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섹슈얼리티를 어떠한 시각에서 재현하느냐이다(‘군 위안부’ 할머니가 직접 그린 피해 여성의 누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황당한 사건이 아니라, 남성의 이윤과 쾌락을 보장하려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위안부 ‘누드’여서 문제인가? 누드의 소재가 위안부였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면, 일반 누드와 포르노그래피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폭력이 이처럼 성애화(sexualized)될 때, 남성 권력은 보이지 않게 되고 여성 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되어 비정치화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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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 <양의 머리, 하얀 접시꽃-언덕>

이후 다시 한 번 젠더와 민족이라는 주제로 저를 끌어당긴 책은 『오빠는 필요없다』입니다. 그것은 몇 년 전과 다름없이 슬픔과 분노, 통쾌함과 흥미로움이 뒤섞인 오묘한 주제더군요.  

여성은 민족의 정신적 강인성과 순수성을 상징하고, 또 어떤 때는 고통을 통해 민족의 영광을 드러내는 민족 담론의 기표로서 모순적으로 동원된다. 수동적인 목격자이거나 희생자로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처지거나 남성을 대리하는 강한 어머니로서, 민족 담론을 구성하는 여성은 삶의 경험과 무관하게 동질화된 민족의 기호로 기표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 사회운동의 이런 지배적 인식틀 속에서 여성은 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운동의 ‘계기’가 되고, 민족 자신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이 되며, 통일의 주체가 아니라 통일의 ‘꽃’이 된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107~108쪽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비에서 곧 출간될『젠더와 민족』의 표지 디자인 의뢰서를 받았습니다. 사실 디자인 의뢰서를 받기 전부터, 그러니까 출간 예정 목록에서 『젠더와 민족』이라는 제목을 발견했을 때부터 저는 반가운 마음에 두근거리기까지 했었습니다. 제목부터가 너무나 명쾌하여 흥미로운 기운이 마구마구 감돌지 않으신가요? (저…저는 그랬어요;) 그리하여 어쩐지 제가 꼭 담당하고 싶은 책이었더랬습니다.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꼭 담당하고 싶기도 하고 꼭 피하고 싶기도 했는데, 그것은 욕심이 나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스스로 낙담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도 아직 잘 모르는 분야인데 의욕은 넘치고, 수많은 텍스트를 하나의 시각적 결과물로 응축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어쩐지 나는 이 책을 디자인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 초라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이런 저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젠더와 민족』의 표지 담당자는 제…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젠더와 민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처럼 뒤늦게 이 주제를 접하게 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러니 좀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다가가기 쉽도록 지나치게 추상화되지 않은 밝은 느낌의 표지 디자인을 구상해야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주제를 명확하게 담아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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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아이디어 스케치

책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담당 편집자인 미선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해보자면, 이 책은 젠더와 민족의 담론들이 교차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한 방식을 다루고, 민족주의 기획의 전 영역에 걸쳐 젠더가 어떻게 공고화되었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선행 연구를 통해 면밀히 살피는 책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민족주의 정치에 맞서는 대안정치로서 ‘횡단의 정치’를 제시한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뿌리내리되,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과도 교류할 수 있도록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지요.

여성은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민족을 재생산하며 그 가치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여성이 국가라는 각축장에 들어옴으로써 민족성의 내용과 경계, 그리고 민족 자체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Hutchinson and Smith, 1994: 287)

그러나 물론 여성들이 그저 국가라는 각축장에 ‘들어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국민의 구성과 재생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 분석 담론에 이들을 분명하게 포함시킨 것은 매우 최근의, 그것도 부분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젠더와 민족』, 18쪽

역시 너무 어렵습니다. 뭐 하나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젠더, 민족, 정체성, 교류…. 이것들을 어떻게 엮어서 보여줄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번뜩 떠오른 것이 바로 ‘우표’입니다. 민족의 개념은 근대 국가 개념과 닮아 있고, 우표 속에는 각국의 대표적, 지향적인 국민(여성)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하니까요. 각국의 우표들을 몇 가지만 수집해 살펴보아도 당대의 여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하여 미선님에게 슬쩍 제 아이디어를 내비추어 보니 역시, 좋은 생각이라고 응원해 줍니다. 꺄오-!

그리하여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이 잘 드러난 각국의 우표들의 이미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지를 찾으면서도 정말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곤 했답니다. 그렇게 찾은 이미지들을 콜라주 형식으로 구성해 보기도 하고 낱장으로 뜯기 전의 모습으로 합쳐보기도 하고 세계지도 모양으로 펼쳐 보기도 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주제를 적합하게 드러내는지 살폈습니다. 시안을 구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정체성의 뿌리’와 ‘이동의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시안이 바로 1과 2입니다.

1은 세계 지도의 분할된 면들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붙어있는 우표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고, 2는 우표들로써 구획지어진 각 면들과 그것을 토대로 나란히 하거나 위로 오르는, 앞으로 나서거나 그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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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기 다른 여성의 정체성, 그러나 그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시안(3), 또 여성과 그 정체성의 다양한 형성(탄생)을 보여주고자 했던 시안(4)도 함께 구성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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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채택된 시안은 2번입니다. 각 여성들의 ‘자리’와 그것을 ‘넘나듦’이 비교적 잘 구현이 되었나 봅니다. 시안 1의 구성 요소, 즉 지도로 형상화된 우표들과 분할면의 이미지는 뒷표지에 응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확정된 표지 대지입니다. 어쩐지 벌써부터 젠더와 민족의 관계에 대해 마구마구 알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으신가요? (저…저는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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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와 함께 표지 디자인을 진행하다 보면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이 달라서 의견이 충돌하곤 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편집자는 좀 더 정확한 내용을 담으려 하지만 디자이너는 보기 좋은 것을 우선에 놓곤 하니까요. 이번 책을 진행하면서 감동(?)스러웠던 것은 그 둘 사이의 (어쩔 수 없는) 공백을 줄이는 데에 담당 편집자였던 미선님과 제가 서로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입니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디자인에 담으려 노력했던 저의 반대편에는 제가 컨셉을 올바르게 잡을 수 있도록 시시때때로 참고할 만한 이미지나 텍스트를 전송해주고, 제 의견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고, 완성된 디자인을 해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한 글자, 두 글자를 줄이고 늘려 적당량의 글줄을 맞추어 준 미선님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아주아주 든든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현재로서 제 작업은 모두 끝난 마당에, 아직 보도자료를 작성하느라 고생하고 있는 우리 미선님에게 파이팅을 보내면서 글을 마치렵니다.^^

- 디자인팀 서주성

※ 그린비 디자이너들의 '북디자인 분투기' 코너는 한 달에 한 번씩 연재됩니다. 책의 내용을 담으면서도, 또한 예뻐야 하는 책표지를 만들기 위한 디자이너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2월에는 어떤 표지가 여러분에게 그 속사정(!)을 선보이게 될지~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
페미니즘의 도전 - 10점
정희진 지음/교양인
오빠는 필요없다 - 10점
전희경 지음/이매진
2012/01/25 09:00 2012/0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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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혜란 2012/03/18 13:22

    번역자 박혜란입니다. 우연히 포스팅 발견했어요.

    좋은 책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표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가 있었는데 완성된 표지를 보고 내 생각을 남이 더 잘 드러낼 수도 있구나 새삼 생각했더랬는데, 글을 읽어보니 뭔가 더 확실해지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김미선씨는.. 정말 좋은 편집자예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그린비 2012/03/19 09:25

      박혜란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에 저도 괜히 찡~~~ 한 감동이 밀려오네요.
      이 책이 더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