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앎이 위험했던 시간
―나를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어느 한때를 떠올리며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 주고 인식 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그렇다면 철학이란 — 철학적 행동이란 —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575~576쪽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벌써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눈물이 워낙 헤퍼서 그런지, 슬쩍 눈물도 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은 푸코가 쓴 『쾌락의 활용』(성의 역사 2권)의 서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사망했을 당시 친구였던 들뢰즈가 읽은 푸코에 대한 조사(弔詞)이기도 하니까요. 푸코의 죽음 때문에 슬펐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때 저의 수치스러웠던 기억. 지금도 제가 만나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그 누군가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아쉬움, 내 빈약했던 이해심 때문에 상처받았던 사람들. 그들에게 뭘 안다고 그렇게 지껄여 댔는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지고, 할 말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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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통치할 때의 합리성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때의 합리성과 동일한 것이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3: 자기 배려』, 이혜숙·이영목 옮김
, 나남출판사, 112쪽

한때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모여 공부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철학자를 정해 놓고 구체적으로 알아 간다거나, 앎의 범위를 넓혀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도 없었던 그저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각기 삶의 방향이란 것들이 있고,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있어서, 가벼운 텍스트 하나만 읽어도, 누군가의 발제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되면 거의 난장판(?), 혹은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싸움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거하게(정말 거하게) 한 잔 하며 다음 세미나를 기약하며 헤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술자리에서 그 세미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와 제가 또!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전부터 그의 허술한 논변과 나이주의와 성차별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저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못할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아마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그저 제 인생의 자서전에서 짧게 기록될 만한 격렬한 사건 중 하나로 지나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후 아주 비열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보다 더 많이 배웠고, 내 입장을 설명하기 충분한 언어들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게다가 어린 나이의 여성이라는 입장은 다른 세미나 구성원들에게 어떤 말을 해도 충분히 설득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걸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더 크게 만들며, 그를 세미나에서 쫓아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습니다. 결국 제가 승리했습니다. 그를 왕따로 만들고 세미나에서 쫓아냈으며, 혼자 의기양양해 했습니다.
 
너의 그런 수치스러운 경험이 푸코의 저 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하지만 저 글은 제게 어딘가 묻혀 두었던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때의 너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 당시 너의 앎은 도대체 어떤 형태였는지. 스스로를 여성주의자라고 칭하고, 소수자 정치학 운운하던 네가 실상은 아집과 편견에 갇혀 결국 모든 앎을 자기변명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했던 그런 인간이 아니었냐고 물었습니다.
   
철학이란 정말 무엇일까요? 동네마다 하나씩 들어 있는 철학관에 달라붙어 있는 말일까요? 아니면 삶의 방식? 사유의 경향? 사람마다 답은 다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철학이란 아마 푸코가 말했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더 많이 알기에 뭔가 잘 모르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입을 닫게 만들며, 내 이득만을 취하게 만드는 게 정말 철학일까요? 지식에 대한 욕구 역시도, 그저 마치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처럼, 상품을 많이 갖고 있으면 부자처럼 보이니까, 더 많이 알아두면 뭔가 똑똑한 사람,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니까, 어쨌든 뭔가 ~척 하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런 지식욕이야말로 자신을 스스로 안에 가두고, 아는 것이 늘어나면서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지식욕은 아닐까요? 푸코의 말대로 스스로를 더 낯설게 바라보고,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으로 옮겨 가게 도와주며, 어쨌든 나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게 만드는 지식욕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알면 알수록 나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앎들이 곧 철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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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우리를 단숨에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은 다른 모든 활동에서 우리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철학만이 우리를 치료할 수 있다. ─장 살렘 지음, 『고대원자론』, 양창렬 옮김, 난장, 121쪽

푸코는 위의 인용문처럼 “철학, 철학적 행동은 사유에 대한 비판작업”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푸코의 작업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에 집착하던 철학에서 벗어나 비이성을 사유했던 이유. 정상인에 대해 사고하는 게 아니라, 비정상인에 주목하며 오히려 비정상인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의 위험성을 사고했던 이유.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어떤 억압 기제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던 그의 철학이 저 문장을 만나서야 하나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렸듯,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나를 억압하는 것들을 예민한 눈으로 보기 위한 공부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그저 해명이나 하려고 공부했던 것은 아닌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구요.
   
푸코가 그렇게 비판했던 배제와 분할, 통제와 규율을 은연중에라도 행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바라봐야 하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들을 다르게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무지가 오만이 되지 않기 위해, 그 오만으로 한때의 저처럼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도 저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 BJR(배째라) 정신으로 주장해 대고, 내 의견과 맞지 않으면 쉽게 적으로 간주하며, 그러면서 제 앎들의 경계를 넓히지 못합니다. 게다가 소인배인지라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타인들이 다가오면 지난번처럼 내 입장만 설명하기에 바빠지죠. 그러하기에 푸코의 저 글은 어떤 면에서 제 맘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게 만듭니다.

푸코의 지성은 글자 그대로 한계가 없다. 너무 기발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는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념 등의 전통적인 구분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살아 있는 존재의 영역에 관찰대를 설치했다. 광기・성・범죄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서 그의 시선은 마치 등대처럼, 아무리 불확실한 것이라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채, 그리고 정통이라는 교조에 머무르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채, 역사에서 현재로 서서히 빛을 비추었다. 수많은 중심점을 갖춘 지성,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울이 달린 그의 지성 안에서 생겨나는 판단들은 그 반대 이론에 부딪혀도 파괴되거나 물러남 없이 오히려 더욱 두터워졌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이 모든 것은 극도의 호의와 선량함의 기초 위에 놓여져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 1926~1984』, 박정자 옮김, 574쪽

뒤메질이 쓴 푸코에 대한 부고 글처럼, 저 역시도 알면 알수록 호의와 선량함으로 삶의 범위를 넓혀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면서 갇히지 않고, 모르는 것들에 솔직할 수 있으며, 불확실한 것들이 다가와도 물러서지 않고, 과감하게 타인의 입장으로 날아갈 수 있으며, 필요할 때면 내 언어들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말하자면, 부족한 앎으로 상처받았던 그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습니다. “철이 없는 여자애”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변명거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태도로 상처를 주고, 다시는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비겁한 행동을 했던 것, 그것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 편집부 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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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1926~1984 - 10점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그린비

2012/02/10 09:00 2012/02/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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