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 1957년, 푸코의 활동을 살펴 본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58
2월, 푸코와 로셰Daniel Rocher는, 빅토르 폰 바이츠제커의 『구조의 주기』 제4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데클레 드 브루어Desclée de Brouwer에서 신경정신의학 총서(Bibliothèque de neuropsychiatrie)로 출판한다.
모리스 팽게가 프랑스를 떠나 일본으로 출발한다. 푸코는 함부르크에 정착할 생각을 한다.

5월 30일, 장-크리스토프 외베리와 함께 정치적 사건에 맞서기 위해 서둘러 파리로 돌아온다.

6월 1일, 드골 장군이 정부의 수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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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1일, 프랑스 제4공화국 대통령 르네 코티와 드골의 모습.

9월 28일, 프랑스는 국민투표로 제5공화국헌법을 채택한다.

10월, 푸코는 스톡홀름을 떠나 아직 거의 폐허상태인 바르샤바에 부임한다. 바르샤바 대학 안에 프랑스문화 센터를 만드는 임무를 맡는다. 당시의 지식인이 모이는 카페가 있는 건물 윗층 브리스톨Bristol 호텔에 체류한다. 『광기와 비이성』을 수정한다.

동유럽에의 정치적 문호개방에 관심을 가진 드골 장군은, 1930년대에 그 자신이 군사 참사관이기도 했던 폴란드의 외교대표기관을 중시했다. 거기서는 장군의 측근이었던 신임 대사 에티엔 뷔랭 데 로지에Étienne Burin des Roziers를 좌파색 짙은 팀이 둘러싸고 있었다. 점차로 푸코는 뷔랭 데 로지에 곁에서 문화고문 역할을 하게 된다.

11월, “넌 위뷔 왕[Ubu roi]1이 폴란드, 즉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나는 감옥에 있어. 근데 반대편이야. 완전 최악이지. 바깥에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창살에 생채기가 나고 간신히 머리를 집어넣으면 안에서는 모두들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보이는 거야. 신호를 보내면 더 멀리 가 버려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다음번에 지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미소 지어 줄 준비를 할 뿐이야. 하지만 그 사이에도 그들은 발길에 걷어 차이고 있고 더 이상 대응할 힘도 용기도 없어. 이 미소는 소용없는 게 아니야. 이번에는 다른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서 이 미소를 가지고 간다. 비스와 강에서는 끝없이 구름이 피어 오른다. 이제 그 누구도 빛이 뭔지를 몰라. 난 사회주의자들의 아방궁에 묵고 있어. 나는 내 『광기와 비이성』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 이 정신 나간 것들을 늘어놓는 사이에,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던 그 광기가 되어 버릴 지경이라니깐.”(1958년 11월 22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크리스마스에 매우 두꺼워진 『광기와 비이성』 원고를, 자신이 두렵게 생각하던 캉길렘에게 건네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고칠 데가 없네, 이걸로 박사학위논문이구만.”

1959
바르샤바에서는 뷔랭 데 로제와의 사이에 상호존중이 자리를 잡는 가운데, 푸코는 드골과 공화제 혹은 드골과 알제리의 관계에 대해 “파시즘은 안 된다”고 외치는 프랑스의 좌파와는 다른 의견을 갖게 된다.
후설과 브렌타노Brentano와 친해진 푸코는 당시 폴란드 학술원장이며 리보프 바르샤바Lvóv-Warsaw 학파의 기호론 계승자였던 코타르빈스키Tadeusz Kotarbiński와 친해진다.

크라쿠프Kraków와 그단스크Gdańsk에서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에 대한 강연을 한다.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나 모리스 팽게가 있는 일본에서 살까 생각한다. 프랑스말을 하는 여러 계층의 폴란드 사람들과 사귄다. 감금에 대한 그의 두꺼운 원고와 그러한 여러 계층과의 친교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 정권은 푸코를 경계하고, 경찰은 젊은 통역자를 이용하여 함정에 빠뜨리고2[국외로] 떠날 것을 요구한다.

9월 14일
, 아버지 폴 푸코 박사 사망.

10월 1일
, 독일에 파견되게 되고 푸코는 바르샤바를 떠나 함부르크의 프랑스 문화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1960
박사학위 소논문 『칸트 인간학의 생성과 구조』를 집필하고, 칸트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을 번역한다(출판되지 않은 이 소논문은, 타이핑된 원고로 소르본의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2월, 드디어 완성한 『광기와 비이성』의 서문을 쓴다.

4월, 조르주 캉길렘은 푸코를,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대학 철학과장인 쥘 뷔유맹Jules Vuillemin에게 추천한다. 뷔유맹은 심리학 전임교수직을 제안한다. 이것은 『광기와 비이성』의 출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는 브리스 파랭Brice Parain이 원고를 거절한다. 『구체제하에서의 어린이와 가족』으로 프랑스 역사연구를 혁신하고 있던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가 플롱Plon 출판사의 그의 총서 «문명과 망탈리테»(Civilisation et mentalité)에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라는 정확한 제목으로 이를 받아들인다(출판은 1961년 5월) . (☞ 관련 글 읽기)

함부르크에서는 아프리카 학자인 롤프 이탈리안더Rolf Italiaander와 친하게 지내고, 때로는 상트파울리Sankt Pauli 환락가의 구불구불한 길들로 로브그리예, 롤랑 바르트, 그리고 당시 추리소설의 왕으로 불리던 장 브뤼스 등을 안내한다. 콕토의 연극이 상연될 수 있게 한다.

6월 19일, 콕토Jean Cocteau가 그에게 감사의 말을 써 보내온다.

10월, 클레르몽페랑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귀국하고 파리의 몽주Monge 거리 59번지에 자리 잡는다. 로베르 모지가 생클루Saint-Cloud의 고등사범학교 신입생 다니엘 드페르Daniel Defert를 소개한다. 드페르는 1963년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푸코의 반려자가 된다.

푸코는 파리에 살되 지방에서 가르친다고 하는, 프랑스 대학 특유의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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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드페르는 푸코의 도움으로 후에 뱅센 대학 사회학과 조교수, 전임강사가 되었다.

1961
클레르몽페랑에서 푸코는 쥘 뷔유맹뿐만 아니라 미셸 세르Michel Serres, 장 클로드 파리앙트Jean-Claude Pariente 등의 철학자들 및 역사학자 베르트랑 질Bertrand Gille과 어울려 지낸다. 파리에서는 국립도서관에서 긴 나날을 보낸다. 독서실 쪽으로 기울어진 반원형의 둥근 천장 아래에서 몇 해에 걸쳐 연구하게 된다.

5월 20일,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목적으로 두 개의 학위논문을 제출한다. 우선 박사학위 소논문 「칸트의 『인간학』 서문」 번역과 주석, 장 이폴리트의 첨삭. 박사학위 주논문 『광기와 비이성: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Folie et Déraison. Histoire de la folie à l’âge classique), 주요주제에 대한 캉길렘과 라가슈의 첨삭.

로베르 망드루Robert Mandrou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등의 역사가들은 『광기의 역사』가 망탈리테 mentalité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며 찬사를 보낸다. 모리스 블랑쇼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풍요로운 책 속에서, 필연적인 반복들을 통한 고집스러움 속에서, 거의 비상식적인 이 책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박사학위논문인 만큼, 우리는 비이성과 대학의 충돌을 기쁨으로 목격한다.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  no. 106)

장 이폴리트가 총괄하는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의 시험관으로 선정된다.

5월 31일, 프랑스 퀼튀르3에서 «광기와 문학의 역사»에 대한 라디오 방송 시리즈를 시작하고 이는 1963년까지 계속된다.

7월, 무척이나 친했던 외할머니 레노-말라페르가 돌아가신다.

7월 22일, 『르 몽드』에서 푸코를 인터뷰하고, '단호하고 젊은, 시간을 초월한 지성'으로 소개한다.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독퇴르 핀레Docteur-Finlay 거리 13번지의 창이 넓은 신축건물 꼭대기 층에 입주한다. 한쪽에서는 프롱드센느Front de Seine4가 재개발 중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옛 실내경륜장이 철거된 채였다.

11월 27일, 『광기의 역사』의 ‘자투리’부분으로서 소개되는 『임상의학의 탄생』(Nassaince de la clinique)의 집필을 끝낸다.


12월 25일, 『레몽 루셀』(Raymond Roussel)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962
『정신병과 인격』의 재판을 찍자고 출판사로부터 재촉을 당한 푸코는 제2부 «질환의 조건들»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 제2부는 «광기와 문화»라는 제목을 달고, 1954년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이론과 실존적 인간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광기의 역사』의 정리가 된다. 책의 제목은 이 이후로 『정신병과 심리학』이 된다.

2월, 『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  PUF)를 발표한 직후인 질 들뢰즈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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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우정이 깊어지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집을 비울 때 자기 아파트를 들뢰즈와 그의 부인에게 빌려 줄 만큼 꽤 돈독한 관계였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250쪽

3월 18일, 에비앙 협정에 따라 알제리 전쟁 종결.

5월 18일, 푸코의 노트. ‘사드와 비샤, 서로를 모르지만 쌍둥이인 동시대인들이 서구 인간의 신체 속에 죽음과 성현상을 위치시킨다. 이 두 경험은 너무나 비자연적이고, 너무나 위반적이며, 절대적인 이의제기의 힘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있다. 이 두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의 문화는 호모 나투라(Homo natura)를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지식의 꿈을 기초 지운다. ’

자크 데리다의 긴 서문이 달린,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Origine de la géométrie)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판된다. 이 책은 곧 파리의 인식론적 논의의 표적이 된다. 1950년대에 이 텍스트를 상세하게 연구하던 푸코는 당시, 고고학 개념을 더 깊이 파 내려가도록 강요하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이 텍스트의 중요성”(서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클레르몽페랑 대학 심리학 교수로 뽑힌다. 1961년 5월 4일에 갑자기 사망한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이어서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된 쥘 뷔유맹의 후임으로서, 클레르몽페랑 대학 철학과장이 된다.

9월, 알튀세르에게 『임상의학의 탄생』 원고를 보여 준다.
구조적 분석에 대한 열광이 고등사범학교 내에 퍼진다.

1963
1월, 롤랑 바르트, 미셸 드기Michel Deguy와 함께 『크리티크』(Critique)의 편집위원으로 들어간다. 『크리티크』의 운영자 조르주 바타유의 처남인 장 피엘Jean Piel에 따르면, 푸코가 실질적으로 참여한 것은 『말과 사물』(1966)의 출판 이후부터 1973년까지였으며, 다만 그의 이름은 1977년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3월 4일, 철학학회의 강연에서 자크 데리다는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 『성찰』 제1성찰을 다룬 부분들에 대해 비평한다. 데리다는 2월 3일 편지로 푸코를 초대했었다. “성탄절 휴일 동안에 선생님의 책을 쉬지 않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제가 대략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선생님의 데카르트 독서가,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깊이의 수준에서 정당하며 계시적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텍스트들을 통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의미 있거나 특별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 같고, 아무튼 그래서 제 생각에 저는 전혀 선생님처럼 그렇게 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고발한 ‘구조주의적 전체주의’는, 자신의 구조주의 고고학을 구별하고자 애쓰는 것이 분명했던 푸코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왜 언제나 역사성은 망각으로서 사유되어야 하지? ”(서신)

4월, 조르주 캉길렘이 프랑스대학출판사(P.U.F.)에서 운영하는 컬렉션 «생물학과 의학에서 역사와 철학»에서 『임상의학의 탄생 :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Naissance de la cilnique : une archéologie du regard médical)이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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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갈리마르에서 조르주 랑브리슈Georges Lambrichs의 컬렉션으로 『레몽 루셀』이 출판된다. 『텔 켈』지에서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비평의 탄생”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이 책이 출판되고 나서 루셀 작품의 재판을 찍게 된다.

7월, 모스크바 협정이 평화적 공존을 결정한다. 솔제니친은 강제노동수용소goulag의 기억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8월 5일, “방되브르에 도착했어. 종잇장들로 사과 채우듯 바구니를 채우고, 나무를 자르듯이 자르고, 어린아이의 세심함으로 한 줄 한 줄 책을 읽는 계절이네. …… 이게 매해 여름의 지혜지”(서신). 칸트의 『인간학』 번역과 지난해에 사망한 바타유에 대한 추모논문을 교정한다. 니체를 토대로 클로소프스키를 읽는다. 고고학과 비평철학 간의 관계에 대한 짧은 메모들을 축적한다.

외무성이 푸코에게, 그가 오랫동안 원했던 도쿄 프랑스 연구소 소장직을 제안한다.

9월, «누보로망 이후 문학에서의 상황에 대한 논점정리»를 원한 『텔 켈』 그룹에 의해 스리지-라-살르Cerisy-la-Salle로 10일에 초대된다. 이 그룹 멤버들(솔레르스, 플레네Marcelin Pleynet, 티보도Jean Thibaudeau, 보드리Jean-Louis Baudry, 올리에Claude Ollier, 그리고 1962년에 솔레르스와 헤어진 알리에Jean-Edern Hallier)과의 사적인 관계가 시작되고 푸코는 이들 작가들의 저작에 관한 몇몇 논고를 쓴다.

10월, 철학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는 다니엘 드페르Daniel Defert의 곁에 머물기 위해 도쿄에 정착하는 것을 포기한다. 형벌적 정신의학의 역사를 목표로 삼게 된 『광기의 역사』 속편을 단념하고 «기호들에 대한 책»에 착수한다. 일이 너무 혹독해서 더 이상 생제르맹 데프레Saint-Germain-des-Près에서 롤랑 바르트와 늦은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없게 되었고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11월, 리스본에서의 강연에서 보슈Hieronymus Bosch의 그림에 대해, 그리고 마드리드에서는 『성 앙투안의 유혹』(La Tentation de saint Antoine)5 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9일에는 프라도Prado[미술관]에서 『시녀들』(Las Meninas)6 과 만난 것을 묘사한 편지를 쓰는데, 이 그림을 축으로 하여 « 기호들에 대한 책 »이라는 그의 기획을 구체화시킨다.

12월, 하이데거를 다시 읽는다. 『말과 사물』의 기획을 중단한다.

1964
국립도서관에서 연구에 많은 나날들을 보낸다. 여러 권의 연습장에는 독서노트, 각 장의 계획, 논문의 초안이 이어져 있다. 『광기의 역사』 이래로 그의 ‘좋은 스승’이 된 조르주 캉길렘의 『반사 개념의 형성』(La formation du concept de réflexe aux XVII et XVIII siècles)을 읽는다.

질 들뢰즈,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와 꾸준히 관계를 유지한다. 장 보프레Jean Beaufret와도 만난다. 이 네 명은 7월, 들뢰즈가 루아요몽에서 조직한 니체에 대한 집중 토론에, 니체의 신판 전집을 편집하고 있던 칼 뢰비트Karl Löwith, 앙리 비로Henri Birault, 지안니 바티모Gianni Vattimo, 장 발Jean Wahl, 콜리Giorgio Colli 그리고 몬티나리Mazzino Montinari와 함께 참가한다.

4월, 앙카라와 이스탄불에서 강연한다(«동양의 탈마술화»). 에페소스Ephesos를 방문한다(“헤라클레이토스의 발자취를 따라……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를 본 적이 없어”)(서신).

8월 10일, “나는 완전히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는 쪽으로 다시 가까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러면 해방될 텐데” (서신). 말콤 로우리Malcolm Lowry의 『화산 밑에서』(Under the Volcano)를 열심히 읽는다.

9월, 미국군에 의한 통킹만 폭격에 이어서, 다니엘 드페르는 병역의무를 위해 신청한 베트남 해외협력 파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드페르는 튀니지로 배치되게 되며 푸코도 곧 뒤따라간다.

신판 시리즈 “10/18”(플롱출판사)의 하나로서, 푸코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에 따르면 “기차역 구내 용” 『광기의 역사』 축약 신판을 출판한다. 당시, 학술총서를 염가판으로 간행하는 것에 대해 지식계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다량으로 찍어 내는 대중출판을 반기던 푸코는 출판사가 완결판 간행을 거부했다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이때 푸코는 플롱출판사와 관계를 끊는다. 1963년에 리초리 사에서 출판된 이탈리아어 번역을 제외하고 『광기의 역사』의 외국어 번역은 축약본 번역이다.

10월 18일, “난 하루종일 지긋지긋한 기호들을 뜯어고치고 있어.”(서신) 들뢰즈, 뷔유맹, 드장티, 클로소프스키와 어울려 지낸다. 클레르몽페랑에서는 성현상에 대한 강의를 한다. 학부의 많은 동료들과 함께 로제 가로디Roger Garaudy의 철학과 교수 임명에 반대한다. 공산당 중앙위원이던 로제 가로디의 임명에는 고등사범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던 조르주 퐁피두(당시 수상)의 입김이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었다.

12월, 장 브랭Jean Vrin 출판사에서 칸트의 『인간학』을 번역 출간한다. 박사학위청구 소논문이었던 원고는 불과 30쪽의 역사적 해제로 축소되고 “비판적 사유와 인간학적 고찰의 관계는 추후 출판될 저작에서 전개될 것이다”라고 마지막 주에서 말하고 있다. 이는 푸코가 «기호에 대한 책»이라고 부르고 있던 『말과 사물』을 예고한 것이다.
브뤼셀의 생 루이 대학 공개강좌의 강좌 담당교수로서 «언어와 문학»에 대한 강연을 한다.
크리스마스, 튀니지에 체류한다. 기호에 관한 책의 첫번째 원고가 완성된다.

1965
1월 5일, 제르바Djerba 섬에서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다와의 경계에서 땅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서 엽서 위에다가 『말과 사물』의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을 휘갈겨 쓴다. 카르타고 만이 내려다보이는 시디 부 사이드Sidi-Bou-Saïd의 동네에 몹시 살고 싶어 한다.

알랭 바디우, 조르주 캉길렘, 디나 드레이퓌스Dinah Dreyfus, 폴 리쾨르 등과 함께 학교교육용 텔레비전 라디오를 위한 토론방송 시리즈에 참가한다.

드골 장군이 임명한 교육부 장관 크리스티앙 푸셰Christian Fouchet가 설치한 대학교육위원회에 위원으로 임명된다. 푸코는 뾰족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지방대학의 수를 늘리는 안을 우려하며, 각 지방 별로 상호보완적인 방법으로 학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대안을 준비하여 에티엔 뷔랭 데 로지에가 내무부 장관으로 있던 엘리제궁에 제출한다.
인문과학 고등교육원의 부원장으로 푸코가 임명된다는 소문이 돈다.

2월 13일, “내가 말한 건 기호가 아니라 질서였어.”(기호에 대한 책에 관한 서신)

4월 4일, “드디어 끝났어. 스팍스Sfax7에 있었던 이후로 전혀 다른 밸런스로 300쪽을 다시 썼어. 나쁘진 않은데 지루해.” 클레르몽페랑에서 탈출하기 위해 콜레주 드 프랑스에 입후보하려고 생각하지만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Georges Duby의 입후보 소식을 듣고 단념한다.

5월 2일, «기호에 대한 책»의 원고를 보고 캉길렘이 열광한다.
푸코는 몇몇 대학생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비판한 것이 자신이 고등교육원 부원장으로 임명되지 못했던 이유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5월 14일,  «기호에 대한 책»의 원고를 갈리마르의 랑브리크Georges Lambrichs에게 넘긴다.

6월, 로제 카유아Roger Caillois가 초고에 감탄하는 편지를 보내고 자신의 잡지 『디오게네스』(Diogenes)를 위한 원고를 의뢰한다.
뷔랭 데 로지에Burin des Roziers는 푸코에게, 그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말로Malraux와 함께 생각하고 있다고 알린다.

6월 9일, 그의 임명과 관련된 음모에 충격을 받은 푸코는 스웨덴으로 여행을 가고 엘리자베트 빌르Élisabeth ville를 입후보시킨다. (그는 그의 조국 벨기에령 콩고가 자이르Zaïre라는 이름의 독립국이 되자 루붐바시Lubumbashi로 이름을 바꾼다) 엘리자베트 빌르는 윤리학자인 G. G. 그랑제Granger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사회학자 구르비치Georges Gurvitch는 소르본의 심리사회학과 교수 자리에 입후보하라고 부추기지만 푸코는 너무 많은 적들 때문에 단념한다.

스팍스와 시디 부 사이드에 다시 체류한다.

8월, 취리히의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의 회고전을 방문한다. 바젤 미술관에서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들을 본다. 아비장Abidjan에의 임명을 신청할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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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 미술관의 전경, 1662년 바젤 시와 바젤 대학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세잔, 드가, 고갱, 마네, 모네, 피카소, 샤갈, 몬드리안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9월, 알튀세르가 푸코에게, “이 구닥다리들”이라는 헌사를 붙인 『맑스를 위하여』(Pour Marx)를 발송한다.

10월, 쥘 뷔유맹, 루이 알튀세르와 같이 마르시알 게루Martial Guéroult의 학생인 제라르 르브륑Gérard Lebrun이 푸코를 상파울루 대학 철학과로 초대한다. 푸코는 거기서 지아노티Gianotti, 뤼 파우스토Ruy Fausto 등의 철학자, 비평가인 로베르토 슈바르츠Roberto Schwartz, 시인 루페 코르팀 가라우데Lupe Cortim Garaude, 정신분석가 베티 밀란Betty Milan 등과 알게 된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몇 장을 읽어 준다. 매주마다 계속되는 장성들에 의한 권력탈취로 인해 예정됐던 순회 강연은 중단되게 되고 곧이어 장성들의 군사정권에 의해 그의 [브라질] 친구들은 실직하거나 망명하게 된다.

1966
1월, 고등사범학교에서 라캉과 캉길렘의 이중적 비호 아래 자크-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와 프랑수아 레노François Régnault를 중심으로 한 인식론 동아리가 만들어진다. 그들이 출판한 학술지, 『분석 노트』(Cahier pour l’analyse)는 “논리학, 언어학, 정신분석학 등의 모든 분석학을 다루며, 담론이론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표방한다. 이 동아리는 젊은 맑스-레닌주의 공산당원 연맹8―로베르 린아르트Robert Linhart를 축으로 한, 학생들 가운데서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운동―과 구별되고자 하면서, 동아리를 만듦으로써 그들에게 응수하고자 한다. 『말과 사물』이 인쇄 중이던 이 시기에 푸코는 이러한 고고학에서 제기된 방법론의 문제에 대해 글을 쓸 계획을 세운다. “철학은 진단의 시도이고 고고학은 사유를 기술하는 방법이다.”(서신).

워프Benjamin Lee Whorf와 사피어Edward Sapir9를 읽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문제는 언어가 아니고 발화가능성énonciabilité의 한계야. ”(서신)

2월, 들뢰즈와 함께 콜리와 몬티나리가 교정한 니체 전집 프랑스어판의 편집책임자가 되기로 수락한다.

3월, 11~13일, 아르장퇴유Argenteuil에 모인 프랑스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가 알튀세르의 주장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휴머니즘이다.”

3월 28일, 부다페스트의 대학 극장에서 강연한다. 예정된 구조주의에 대한 강연은 헝가리 당국에 의해 극소수 사람들만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간주되어 학장실로 강연회장이 국한된다. 푸코는 그때 동유럽에서는 그 기원이 프라하적이고 러시아적인 형식주의 사유에 있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유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것을 푸코는 발견한다. 푸코는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의 의례적인 방문 코스를 거절하고 세프뮈베세티Szépmüvészeti 박물관에서 마네가 그린 잔느 뒤발Jeanne Duval의 초상화를 보는 쪽을 선택한다.

3월 31일, 헝가리의 영접 관계자는 루이 아라공 이 주제하는 잡지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s10에 『말과 사물』의 간행을 알리는 레몽 벨루Raymond Bellour와의 긴 대담이 나온 것을 보고 대단히 안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의 나라에서 자신들이 덜 의심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스터Puszta 11에 있는 데브레첸Debrecen12을 여행한다. “여행을 하면서 난 좀 감동받았는데, 아니 글쎄 우리 귀여운 알튀짱[알튀세르]의 사유가 이 대초원의 맑스주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와 있지 뭐람.”(서신). 부츠하레스트Bucharest13에 체류한다.

4월, 갈리마르에서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기획한 «인간과학 총서»라는 컬렉션에서 인간과학의 고고학, 『말과 사물』이 출간된다. 원래는 『사물의 질서』(L’Ordre des choses)라는 제목을 달고 싶었지만, 바슐라르가 서문을 쓴 자크 브로스Jacques Brosse의 작품에 이미 사용된 제목이었기에 좌절되었다. 고집을 부린 것인지 잊어버린 것인지, 푸코는 나중에 컬렉션에 브로스의 같은 저작의 한 장의 제명인 «병행하는 삶, 열전»(Les vies parallèles )을 총서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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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데리다와 알튀세르와 교우하다. 16일, 푸코는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의 과업은 휴머니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결정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 내가 하는 작업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데요. 그 이유는 동유럽이 되었건 서유럽이 되었건 모든 체제는 그들의 상품을 휴머니즘이라는 깃발하에 유통시키기 때문입니다.” 『말과 사물』의 1쇄가 한 달 반 만에 매진되었다.

5월 23일, 『엑스프레스』(L’Express)14에서 이 책을, 실존주의 이후 철학에서의 가장 거대한 혁명으로 소개한다. 그 이후로 “인간의 죽음”과 “맑스주의는 물속의 물고기처럼 19세기적 사유 안에 빠져 있다” 등이 이 책의 상징적 문구로서 언론에 회자된다.

5월 26일,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찬탄으로 가득찬 편지를 받는다. 푸코는 마네의 『발코니』(Le Balcon)에 대한 그의 해석을 물었고, 이렇게 둘은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한다. 마그리트는 그해 연말에 푸코를 만나고 싶어 한다.

6월, 매스컴은 책 자체와 동시에 이 책의 판매를 논평하게 된다. 『말과 사물』의 판매는 시대의 징후로서 책 자체는 단절로서 평가되고 해석된다. 1966년은 프랑스의 인간과학이 엄청나게 수확을 거둔 해 중 하나였다. 라캉, 레비-스트로스, 에밀 방브니스트Émile Benveniste, 주네트Genette,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 두브로프스키Serge Doubrovsky, 토도로프Tzvetan Todorov 그리고 바르트가 그들의 아주 중요한 책들을 출간한 해였다. 그때까지는 영역적 방법론으로서 받아들여져 온 구조주의가 갑작스럽게 사상운동으로서 취급된다.

7월, 방되브르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하루에 여섯 시간씩 글을 쓴다. “도메나크Domenach에 이어 장 다니엘Jean Daniel마저도. 오늘날의 철학적 담론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해.”(서신). 그는 후설의 『형식논리학과 선험논리학』에 대해 다시 연구하는데, 이번에는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본다. “난 처음으로 추리소설들을 읽기로 했지.”

이폴리트는 푸코에게 『말과 사물』이 “비극적인 책이네”라고 말한다. 푸코는 “선생님밖엔 그 책을 안 읽었어”라고 털어놓는다.

9월, 푸코는 튀니지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튀니지에서 처음으로 (심리학이 아닌) 철학 강의를 [그의 오랜 스승인 소르본 대학 명예교수 장 발의 후임으로] 제안받은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매스컴에서의 성공 때문에 자신의 연구가 잘못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푸코의 다음 책[『지식의 고고학』]이 무미건조한 것은 이런 식의 성공과 단절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15일, 프랑수아 모리악은 『말과 사물』의 안티휴머니즘에 그의 «비망록»15일부를 할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당신 덕분에 사르트르를 좋아하게 됐어요. ” 그때부터 푸코는 사람들이 “인간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주 멀리서, 그리고 선별적으로 지켜보게 된다.

10월 1일, 푸코는 대학에서 튀니지로 3년간 파견을 나가게 된다.
사르트르는 『아르크』(Arc)지의 사르트르 특집호에서 구조주의를 공격하는데, 역사보다 구조를 우선시하는 푸코와 알튀세르의 경향을 배척하고, 고고학을, 변혁을 성층구조로 대체하는 지질학이라고 명명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푸코는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보루이다.” 주요 지식인 잡지들은 1968년 5월 직전까지도 『말과 사물』에 대한 논쟁을 계속한다. 1967년 1월에는 『현대』, 1967년 5월에는 『에스프리』, 그리고 1968년 2월에는 『라 팡세』(La Pensée) 등등.

11월, 다르 자루크Dar Zarrouk 호텔에 짐을 풀고 푸코는 시디 부 사이드 동산의 황량한 언덕 위 집을 구한다. “나는 바다랑 직접적이고 절대적인, 문명의 개입이 없는 관계를 원해.”(서신).

11월 12일,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철학을 가르친 것은 처음이었다. «철학적 담론»에 할애된 강의는 『말과 사물』의 연장이었다. 서양문화에 대한 공개 강의를 한다. “담론 이론은 여전히 미개척지야. 396쪽들을 다시 써야 해”(서신).

11월 16일, “난 어제랑 오늘 아침이랑 방금 전에, 몇 년 전부터 나한테 필요했던 담론의 정의를 발견했단다.”(서신).

12월,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출판될 예정이었던 『포르 루아얄 논리학』(Logique de Port-Royal)의 재판이 갈리마르에서 출판되는데, 여기에 서문을 단다.

튀니지의 학생들에게 알튀세르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참 신기해. 우리한테는 순수한 이론적 담론이 여기서는 느닷없이 수직화된단 말이야. 그리고 거의 직접적인 명령이 되지.”(서신).

12월 9일, 당시 알게된 장 다니엘이 묘사하고 있듯이 이슬람 고급관리의 옛 마구간이었던 하얗고 높은 궁륭이 있는 집에 정착한다.

성탄절 알제리 남쪽 사하라 대사막 내 타실리 아제르Tassili Ajjer 고원 위에서 당나귀 낙타들과 함께 야영한다.

1967
1월, 『현대』(22호)가 푸코 비판을 공격한다. 푸코는 그를 곤혹스럽게 한 미셸 아미오Michel Amiot의 논문 「미셸 푸코의 문화상대주의」중에서 질문 항목에 개인적인 편지로 대응하는 데 만족한다. “저는 이 책에 매뉴얼의 역할을 할 방법론적 서문을 다는 것을 단념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한 토론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또 당신의 논고에 대한 실질적인 공감 때문입니다.” 푸코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역사, 적어도 사유의 역사를, 영향, 전진, 지연, 발견, 의식화 등을 문제로 삼는 낡은 도식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생각해서 저는 경험적인 비연속성의 규칙으로서 작동하는 변형의 총체를 규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

당시 튀니지 문화부 장관이며 후에 아랍연맹 대표가 되는 샤디 클리비Chadi Klibi와 때때로 만난다.

1월 31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참 흥미로워. 봄에는 [『지식의 고고학』을] 끝낼 거라는 희망을 내년으로 미뤄야겠어.”(서신).

2월, “역사학은 역시 엄청 재밌어. 덜 외롭고 또 자유롭지.”(서신). 지중해에 관한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을 재판을 찍을 때에 논문을 쓰자고 계획, 혹은 더 나아가서 «에피스테메»가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또 하나의 인간과학의 고고학이 될 수도 있는, 역사학에 대한 저작을 쓸 계획을 구상한다. 뒤메질을 읽는다. 뒤메질 독서는 푸코의 평생 동안 이어진다. 트로츠키Trotsky의 『영구혁명론』을 읽고 매우 감동을 받아서 1968년에는 때때로 스스로 트로츠키스트라고 자칭하기에 이른다. 사실 그의 튀니지 학생들이 읽는 책들은 푸코의 독서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3월 14일, 파리로 가 건축연구 동아리에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에 대해 강연하고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라디오 방송을 제작한다.

3월 17일, 소르본의 레몽 아롱의 세미나에서 경제와 같은 문화적 형성태를, 여러 다른 에피스테메를 통해 어떠한 기준에 따라 역사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발표한다. 레몽 아롱은 에피스테메를 어디까지나 «세계관»(Weltanschauung)과 동일시하려 한다. 이러한 토론은 『지식의 고고학』에서 에피스테메 개념을 포기하는 한 요인이 된다. 이 인식론적 논의의 배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임용을 향한 두 사람의 전술이 교차되어 있었다. 레몽 아롱의 세미나에서 제시된 논점은, 레몽 벨루와의 두번째 대담에서 전개되고 있다.

푸코가 플로베르에 대해 연구하면서 모아 놓은 도상을 사용한 베자르Maurice Béjart의 발레 『성 안투완느의 유혹』이 오데옹Odéon 극장에서 초연하게 되는데 푸코는 여기에 참석한다.

4월,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영국의 분석주의자들을 더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 모든 글쓰기를 전면적으로 중단했어.”(서신). 영국의 분석철학자들에 관해서 푸코는 “이 겨울 내가 힘들게 찾으려 했던 분석의 스타일과 수준. 이 겨울의 그 참기 힘든 불안”이라고 말한다. 푸코는 당시 존 듀이John Dewey와 미국 철학에 관한, 프랑스에서는 드물거나 거의 유일한 전문가인 동료 제라르 들르달Gérard Deledalle의 장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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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4월 12일, 『라 프레스 뒤 튀니스』(La Presse du Tunis)지는 “매주 금요일 오후, 튀니지 대학의 가장 큰 강당조차도 미셸 푸코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수백 명의 학생과 청중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비좁다”고 보도한다.

5월, 『에스프리』가 «구조주의, 그 이데올로기와 방법»이라는 특집호를 발행한다. «모든 개별적 혹은 집단적 주체를 가로막는 시스템의 차가운 사유에 대항하여»라는 제목으로 편집장 장 마리 도메나크는 푸코에 대한 10쪽짜리 질문을 발표한다. 그 질문들 중 푸코는 «비연속성과 구속의 사유로부터 출발한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만 답변한다. 운명의 장난으로 이 긴 답변은 1968년 5월에야 게재되게 된다.

“영국의 분석철학자들은 나를 참 기쁘게 해줘. 그들은 얼마나 언표의 비언어적 분석을 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보여 줘. 언표를 그 기능상에서 논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것이 무엇에 있어서, 또 무엇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히 하지 않아. 아마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걸 거야.”(서신).

영국에서 『광기의 역사』 영역본이, 일찍이 자신의 저작 『분열된 자아』(The Divided Self)를 빈스방거에게 헌정한 바 있는 로널드 렝Ronald Laing이 감수하는 «실존주의와 현상학 연구»(Studies in Existentialism and Phenomenology) 총서의 한 권으로 데이비드 쿠퍼David Cooper의 서문을 달고 출판된다. 이 출판에 렝의 기사 «온전한 정신과 광기: 광기의 발명»(Sanity and Madness: The Invention of Madness, The New Statesman, 1967년 6월 16일)이 이어진다. 『광기의 역사』는 이 이후 영미권 국가에서 반(反)정신의학의 기치 아래 유포되게 된다.
언제나 소르본의 요청을 받고 또 거부당하면서 푸코는 그곳을 결정적으로 단념하고 신생대학인 낭테르 대학에 응모하여 6월에 심리학 강좌 담당교수로 선임된다. 동시에 국립행정학교(ENA)의 입학시험심사원에 임명된다.

6월 1일, 튀니지의 부르기바Bourguiba 대통령과 회견한다.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를 읽는다.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기사를 쓰기 위해 더 자주 글을 쓰게 되었다(no. 51).

6월 5~10일, 6일 전쟁16을 계기로 튀니지의 미국 대사관에 대한 반제국주의 시위와, 권력당국이 반체제활동가를 체포하기 위해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유대인 상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난다. 정치화된 학생들은 푸코의 집에서 집회를 갖게 된다. 푸코는 “그들은 중국-카스트로주의자들sino-castristes이다”라고 쓴다. 부르기바 대통령의 푸코에 대한 “중대한 염려의 이름으로” 튀니지 당국은 갑자기 푸코의 집에 전화선을 설치한다.

7월, 방되브르로 귀환한다. “이 땅 언저리에는 나를 위한 힘들이 깃들어 있어서 나는 여기서 거의 안식처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신)

7월 16일, “나 니체를 읽고 있어. 왜 니체가 나를 계속 매료시켜 왔는지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아. 권력에의 의지를 분석하기 위해 여지껏 등한시 되어 온, 유럽 문명에서의 앎의 의지의 형태론.”(서신).

8월 15일, 마그리트 사망. 25일, 『지식의 고고학』을 탈고한다. “이번 겨울에는 2, 3개월 다시 읽기만 하면 된다.”

10월, 프랑스 교육부장관이 낭테르에의 임명을 더디 승인한다고 판단해서 다시 1년 동안 튀니지에 간다.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중국여인』(La Chinoise)이 개봉된다. 이 영화에서 친중국파의 여학생 안느 비아젬스키Anne Wiazemski가 역사의 부정, 따라서 혁명의 부정을 상징하는 책으로 여겨지는 『말과 사물』에 토마토를 던지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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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여러 과학들의 계보학»을 특집으로 하는 “『분석 노트』에서 좋은 질문 항목을 받았다.” « 마그리트에 대한 소소한 글»을 쓴다. 미뉘 출판사와 『검정과 색깔』(La Noir et la Couleur)이라는 제목의 마네론을 약속한다. 리졸리Rizzoli 출판사에서 캉길렘의 «인간의 죽음 혹은 코기토의 고갈»이라는 제목의 후기를 달아 『말과 사물』의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나온 것을 계기로, 14일부터 19일까지 잠깐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한다. 밀라노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알게 된다. 로마에서는 이 시기 주 이탈리아 프랑스 대사였던 뷔랑 데 로지에와 재회한다. 뷔랭 데 로지에는 문화 참사관으로 합류하라고 제안하지만 푸코에게는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한다.
 
12월, 망막에서 아마도 종양인 듯한 상처가 발견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여, 만세 ! 불안을 잊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구나. 난 글을 쓰고 있어. 2년 사이에 네 번을 고쳐 쓰네. 제법 어렵잖게 이해되는 느낌, 기분이 좋다.”(서신)
『프뢰브』(Preuves)지 12월 호에서 역사학자인 프랑수아 퓌레Fronçois Furet가 프랑스 지식인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쇠퇴에 주목하고 그것을 맑스주의에 대해 구조주의가 승리한 탓으로 돌린다. “도메나크한테 답글 쓰면서 거기에 대해서도 대충 답해야겠다.”(서신)

1968
1월, 1950년부터 1953년에 걸쳐 베케트Beket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를 다시 읽는다. 당시의 프랑스 교육부 장관이며 푸코와 고등사범학교 동기인 알랭 페이예피트Alain Peyrefitte는 자기가 직접 낭테르 대학에 임명을 알린다. 파리에 들렀을 때 푸코는 이 대학의 여러 학생들과 만나 “이 학생들이 교수들과의 관계를 계급투쟁의 용어로 말하는 것이 기묘하다”면서 놀란다.

2월, 튀니지에서 이탈리아 회화 전통에 대한 공개강의를 한다. 훗날 튀니지 수상이 되는 벤 살라Ben Salah가 이 강의를 몰래 듣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의 정기간행지인 『라 팡세』가 『말과 사물』에 비판적인 세 개의 대담을 게재한다. 푸코가 격렬하게 반응한다. 잡지의 편집부는 푸코가, 무기로서의 공산주의적 욕설들로부터 계통적으로 차용한 어휘를 완화해 줄 것을 우편으로 몇 번이나 교섭해 왔다.

3월 10일, 『라 캥젠느 리테레르』는 제1면에서 사르트르와 푸코의 논쟁을 예고한다. 실제로는 『아르크』지에 실린 사르트르의 발언에 대해 푸코가 답하도록 유도하려 했던 것이다. 푸코는 이에 선수를 친다.

체 게바라를 읽는다.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튀니스 대학에서 전년도부터 투옥되어 있는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다. 경찰은 사진에 기초하여 학생운동의 주요 지도자들, 특히 « 페르스펙티브 »파라고 불린 « 튀니지 사회주의 연구 행동 그룹 »의 지도자를 체포한다. 몇 명은 고문을 당했고 국가보안에 대한 죄로 기소당한다. 체포를 면한 학생들은 전단을 몰래 인쇄하기 위해 등사기를 숨겨 놓은 푸코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들에게 동조하여 푸코는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물질적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위해 튀니지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는 부르기바Bourguiba와 프랑스 대사 소바냐르그Sauvagnargues와 만나지만 성과 없이 끝난다. 그는 일면식도 없던 고등교육전국조합의 젊은 서기 알랭 제스마르Alain Geismar를 파리로부터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그가 관심을 끌기 위해 튀니지를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3월 22일, 낭테르의 학생운동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다. 푸코는 “여기서는 낭테르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쓴다. 바르샤바, 마드리드, 로마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난다.

4월, 시르트Syrtes의 해안을 차로 달려 리비아 해변의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와 사브라타Sabrata를 방문한다.

5월 3일부터 13일에 걸친 파리에서의 가두 시위와 소르본 점거는 프랑스의 거의 전역으로 확대된다. 푸코는 튀니지에 발이 묶이게 된다. 모리스 클라벨Maurice Clavel은 『내가 믿는 것』(Ce que je crois)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5월 3일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리옹 역에서 신문을 샀다. 최초의 학생 봉기라는 헤드라인을 보고 나는 내 처에게 차분하게, 내 처는 그런 차분함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봐, 좋아, 우린 여기 있어, 라고. ‘어디?’라고 그녀는 물었다. 푸코로 가득 찬 곳에....... 왜냐하면 결국 『말과 사물』은 68년 5월에 일어날 우리의 인간적, 인간주의적 문화의 대(大) 지각변동에 대한 무시무시한 예고였던 것이 아닌가? 나는 서둘러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에 가서 몇 분만에 다섯 쪽의 원고를 썼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오늘, 새로운 레지스탕스가 낭테르와 소르본에서 출현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종말이, 쇠이유와 미뉘 사이에서, 다시 말해 출판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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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uno Barbey. France, Paris, Mai 6th 1968

5월 27일, 푸코는 파리로 가는 유일한 비행편을 이용하여 샤를레티Charléty 경기장에서의, 망데스 프랑스Mendès France를 포함한 좌파 지도자들의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6월 16일, 푸코는 튀니스에서 “여기서는 그것이 거대한 수수께끼야”라고 편지를 쓴다. 튀니지 경찰의 별조직이 푸코를 추방시키기 위한 여러 위협을 가해 온다.

6월 말, 푸코는 소르본에서의 마지막 시위와 집회에 참가한다. 블랑쇼는 소르본에서 푸코에게 말을 걸었지만 푸코가 그를 알아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모리스 블랑쇼,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tel que je l’imagine, Fata Morgana, 1986). 푸코는 친해지기에는 너무 존경스러운 분이라며, 결코 블랑쇼와 만나려 하지 않았다.

6월 30일, 드골 장군의 여당은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가 조직한 총선에서 대승한다.

7월, 튀니지 정부는 학생들을 재판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정을 개설한다. 푸코는 여름을 튀니지에서 보내기로 결정한다.

9월, 교육부 장관인 에드가 포르Edgar Faure가 라탱지구17 밖 뱅센Vincennes에 건설하기로 결정한 실험대학 창립회에 참가해 달라고 엘렌 시수Hélène Cixous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9일, 튀니지에서 134명의 학생 활동가들에 대한 재판이 개시된다. 푸코는 프랑스의 변호사들에게 그들의 감금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변호인측에 어떠한 변론 기회도 부여되지 않았다. 아흐메드 벤 오트만Ahmed Ben Othman은 14년의 금고형을 받았고 실제로 14년간 복역하게 된다. 30일, 푸코의 요청으로 프랑스 외무부가 그의 파견을 끝내고 푸코는 행정상 낭테르 대학으로 돌아오게 된다.

10월, 푸코는 미국의 흑인해방조직 블랙팬더의, 영어로 된 문장을 읽고 감동한다. “그들은 맑스주의적 사회이론으로부터 해방된 전략적 분석을 펼치고 있어.”(서신)

10월 27일, 마르세유로 향하는 배 위에서 푸코는 이폴리트의 죽음을 알게 된다. 미망인은 푸코에게 이폴리트의 베케트 장서를 물려준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개강 강연에서 푸코는 이 두 이름[이폴리트와 베케트]을 연결시키게 된다.

11월, 프랑스 의회는 대학에 대한 국가권력 일부를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선출한 회의에 넘기기로 하고 지식을 여러 학부로 분할하는 대신 학제적 조합을 형성하기로 결정한다. 뱅센의 새로운 대학은 이러한 새로운 권력과 지식의 조직을 실험해야 한다.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에드가 포르는 푸코가 이 실험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한다. 푸코는 그것을 거부하고 당시 알튀세르와 친했던 알랭 바디우의 조언을 받아 철학과 교수를 모집하는 데에 그쳤다. 라캉파의 정신분석학자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와 함께 최초의 정신분석학과를 창설한다. 사회학자 장 클로드 파스롱과는 인간과학 학부를 만들기보다는 과학과 정치의 학제적 접근을 추진하기를 원한다. 알랭 바디우에게 『지식의 고고학』 초고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작업을 맡긴다.
언론은 뱅센 실험대학의 인사담당자 대부분이 극좌라며 비난을 퍼붓는다.

12월, 뱅센 실험대학센터의 철학교수로 임명된다.

1969
1월, 뱅센 대학이 실질적으로 문을 열고, 문학과와 인간과학과의 모든 주역들을 모이게 한 정치권력의 가능성, 그리고 자신들의 자치범위를 측정해 보고 싶어 하는 학생운동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첫 충돌에서는 경찰이 개입한다. 푸코는 경찰에 대한 물리적 저항과 밤샘 점거농성에 참여하고 결국 체포되어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다. 19일, 푸코는 알튀세르, 쉬잔 바슐라르, 조르주 캉길렘, 프랑수아 다고네, 마르시알 게루, 미셸 앙리, 장 라플랑슈, 장 클로드 파리앙트, 그리고 미셸 세르와 함께 고등사범학교에서 장 이폴리트를 애도한다. 푸코는 1971년 1월에, 프랑스대학출판부에서 출판하는 이폴리트 추모서의 머리말에 서명하게 되는데, 거기에 니체와 계보학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텍스트를 덧붙인다.

2월 10일, 푸코는 대학에서 제명된 30명의 학생들과 만나는, 뮈튀알리테Mutualité에서 열린 좌담회에 초청을 받는데,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시위 참가자로서 참석하게 된 데에 크게 만족스러워한다. 사르트르도 그 좌담회에서 발언했는데 사람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M.콩타Contat와 M.리발카Rybalka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르트르는 좌담회에서 ‘사르트르, 짧게 하세요’라고 쓰여진 종이를 발견한다. 이 미팅 이후 사르트르는 그를 향한 학생들의 대우로 인해 변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그는 처음으로 직접적인 이의제기를 받았다고 느낀 것이다.”(J.-P. Satre, Oeuvres romanesques, Paris, Gallimard, «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 1981, p. XCI).

뱅센에서 «성현상과 개체성»에 대해 강의하는데, 이것은 『지식의 고고학』에서 예고했던 연구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으며 유전과 인종위생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니체와 계보학»에 대한 또 다른 강의를 하기도 한다.

2월 22일,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의 요청으로 프랑스 철학회에서 강연한다. 그는 『지식의 고고학』의 분석을 연장하면서 «작가기능»을 논한다[« 저자란 무엇인가 »]. 이 텍스트에서 그는 데리다나 바르트와의 입장차를 분명히 한다. 『철학회보』(Bulletin de la Société de philosophie)에 게재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텍스트는 작가의 죽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텍스트와 비교되고, 미국의 문학이론에 끼친 그의 영향력과 비교한다면 프랑스에서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3월 13일, 『지식의 고고학』이 갈리마르에서 출판된다. 전작들에서의 소위 사물들에 대한 건조한 기술, 그리고 구조주의와 스스로를 구별짓는 방식이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런던주재 프랑스 문화원에서 «휴머니즘과 안티휴머니즘»에 대한 몇몇 강의를 해달라며 푸코를 런던에 초대한다. 푸코는 프랑스 외무부가, 그가 대학의 기본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불쾌해 하기 때문에 그가 영국의 대학에서 발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La Nouvel Observateur, no. 227, 1969년 3월 17~23일) 그는 문화교류에 대한 통상적인 공개 강연에서 철학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하고 영국 학생들과 그들의 구체적인 사회참여에 대해 자유토론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영국에서 강의는 절대 하지 않았다.

4월 27일, 드골 장군이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지방분권화와 임금노동자들의 기업자본 참여가 유리해지고 드골은 사임한다.

5월 30일과 31일, 과학역사 연구소에서 캉길렘이 조직한 퀴비에Cuvier의 날에 푸코가 과학분야에서의 저자의 문제를 전개한다(no. 77).

7월,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Emmanuel Le Roy Ladurie,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 제라르 주네트, 그리고 미셸 세르와 함께 역사상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라디오 시리즈에 참여한다.

8월 4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소련 작가연합 기관지인 『문학신문』(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이 푸코를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고 알린다. “맑스주의 내에서 푸코가 불편해 하는 것은 그 휴머니즘이다. 맑스주의는, 자신이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유일한 원천이면서 우리 시대의 실질적이고 진정한 휴머니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1월 30일,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모임이 장 이폴리트가 맡았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사유체계의 역사»로 바꾸기로 의결한다. 전통적으로 해당 강좌의 후임 교수는 의결 중에 절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 강좌의 기획에 대해 쥘 뷔유맹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제가 이야기하는 이 기획의 철학적 전통은, 사유와 연장의 실체적 결합이라는 데카르트적 이론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관념의 역사를 짧게 환기하면서 뷔유맹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론적인 책들은 이 개념들과 관련해 개념의 시기나 기원이 그것의 본성과는 무관한 것 같다고 너무나 추상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이분법의 포기와 비-데카르트적인 인식론의 구축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유를 지키면서 주체를 삭제하고 인간본성 없이 역사를 구성해 보자는 것입니다.” 같은 날, 문명의 사회학이라는 강좌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의결한다. 이러한 기획들은 당연히 푸코와 레몽 아롱을 겨냥한 것들이다. 폴 리쾨르와 이봉 블라발Yvon Belaval 역시 마찬가지로 철학 강의의 후보자들이었다.

12월 6~7일, 『정신의학 진화그룹』(L’Evolution psychiatrique)지가 연례 심포지움에서 이틀 동안 『광기의 역사』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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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1월, 새로운 교육부 장관 올리비에 기샤르Olivier Guichard는 뱅센 대학에서 주는 학사학위에 대한 국가공인 부여를 거부한다. 정치와 맑스주의에 관한 강의가 너무 많다고 그는 표명한다(no. 70).

1월 21일, 레오 스피처Leo Spitzer의 논집 『문체 연구』(Etudes de style)가 갈리마르에서 출판된다. 푸코는 «언어의 예술과 언어학»(Art du langage et linguistique)이라는 제목으로 『언어학과 문학사』(Linguistics and Literary History, Princeton U.P. 1948)를 번역한다.

3월, 당시 미국에서의 프랑스 연구의 중심에 있었던 버팔로 소재 뉴욕 주립대학의 프랑스 문학과에 초대된다.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방미 비자 취득에 어려움을 겪는다.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écuchet)18에서의 절대의 탐구에 대해, 그리고 사드Sade에 대해 강연한다. 도널드 부샤르Donald Bouchard, 조제 하라리José Harari, 에우지니오 도나토Eugenio Donato는 이때 발표된 «작가란 무엇인가»의 수정된 버전19을 출판하게 된다. 프랑스 문학과장인 올가 버날Olga Bernal, 그리고 들뢰즈를 번역하게 되는 마크 심Mark Seem과 우정을 맺는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군학(軍學) 협동연구에 반대하는 운동이 강해지고 있었다. 푸코는 수많은, 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소송에 직면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 학생운동»(S.D.S)를 지원한다. “요컨대 나는 파리를 단 한 순간도, 1센티미터도 떠나지 않았단 말이지.”(서신). 예일 대학에서 강연한다.

4월, 포크너의 대지를 여행한다. 미시시피 계곡을 나체즈natchez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스페인 시대 때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적 건물 엘름즈Elms에 머문다.

4월 12일,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회의에 의해 «사유체계의 역사» 강좌 교수로 푸코가 선출 임명된다. 이 기회에 푸코는 «학술 업적»을 발표한다. 결정권은 없지만 자문발언권을 갖는 «정신 및 정치학 아카데미»는, 이 투표를 비준하지 않는다.

4월 30일, 소위 «반-파괴자»(anti-casseur) 법이 정치시위 조직자를 염두에 두고 집단적 형사책임의 원칙을 프랑스 사법에 도입한다.

5월, 『바타유 전집』의 서문을 집필한다. 책을 출판하는 갈리마르는 콜레주 드 프랑스 신임 교수의 권위가 당시 매우 엄격했던 검열로부터 출판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푸코는 같은 이유로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 필립 솔레르스, 롤랑 바르트의 서문이 달려 갈리마르에서 출판된 피에르 기요타Pierre Guyotat의 『에덴, 에덴, 에덴』(Éden, Éden, Éden)을 위해 보도에 개입한다.

5월 27일, 프랑스 정부는 3월 22일 반-권위주의 학생운동과 맑스레닌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통합되며 만들어진 비(非)레닌주의 마오이스트 운동 « 프롤레타리아 좌파» (G.P.)에 해산을 명한다.

6월, 다니엘 드페르는 비합법화된 « 프롤레타리아 좌파 » 내부에서, 투옥된 활동가들과의 연락 및 재판 준비를 담당하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한다.

『라 팡세』지는 폭력으로 기능하는지 아니면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지에 따라 구별되는 국가기제에 대한 알튀세르의 긴 논문을 싣는다. 푸코는 이 구별을 비판하고, 후에 『감시와 처벌』에서 이 구별에 대한 많은 반박을 대치시켜 놓게 된다.

6월 17일,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임명이 교육부를 통해 실효화된다.

8월 8일, “『말과 사물』 재판을 찍을 때 후기를 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제 그건 내게 흥미가 없는 일이야.”(서신). 크라프트첸코Kravtchenko와 미국의 과학사가를 읽는다.

9~10월, 일본에 초대된다. 당시 푸코는 도쿄대학 프랑스 문화과 마에다 요이치(前田陽一) 교수의 여동생이며 정신과의사인 카미야 미에코(神谷美惠子)박사의 번역으로 1969년에 번역된 『임상의학의 탄생』과 1970년에 번역된 『정신질환과 심리학』, 이 두 권의 책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마에다 교수와 카미야 박사는 1963-1964년에 푸코와 만났다. 푸코의 문학관련 논고는 와타나베 모리아키(渡辺守章) 교수를 통해서 소개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마네», «광기와 사회», «역사로의 회귀»라는 세 개의 강연을 한다. 도쿄, 나고야, 오사카, 쿄토에 체류한다. 푸코는 와타나베 모리아키에게, 유럽에서의 형벌 체계와 범죄의 역사에 대한 책을 낼 것이라고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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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잡지 『파이데이아』(Paideia)의 편집장 나카노 미키타카(中野幹隆)가 푸코에게서의 철학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특집을 준비 중이었는데, 나카노는 미야가와 쥰(宮川淳)의 데리다와 푸코에 대한 논문, 그리고 데리다의 논문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를 게재할 예정이었다. 푸코는 나카노에게 데리다에 대한 반박을 제안한다. 갈리마르가 『광기의 역사』 판권을 사고, 1964년의 축약본 이후로 사라졌던 데카르트의 “코기토” 분석을 포함시킨 완결판을 출판할 예정이었다. 일본에서는 이 완결판이 번역되게 된다.

프랑스에 돌아온 푸코는 스토아 학파를 읽고 또 『차이와 반복』(프랑스대학출판사) 및 『의미의 논리학』(미뉘 출판사)을 출판한 들뢰즈를 읽는다. 마네와 이미지에 대한 긴 텍스트와, 워홀의 마릴린 먼로에 대한 논고를 집필하지만 발표하지 않는다.

11월, 피렌체에서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에 대해 강연한다. 이 그림은 『시녀들』의 역전으로서 푸코를 계속해서 매혹시킨다.

12월 2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개강 강연을 한다. 푸코는 명확하게, 비판의 기획과 계보학의 기획을 구별한다.
이 이후로 매주 수요일 17시 45분, 연 13회, 매년 오리지널 강의가 행해지게 되고, 거기서는 푸코의 장래 저작의 가설이나 제재가 탐구된다. 청강생은 애초부터 국적이 다양했고 이 첫 해 강의는 « 앎의 의지 »라는 주제로, 앎의 의지의 두 이론 모델,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를 대비시킨 것이었다. 매주 월요일 17시 30분에는 세미나가 행해졌는데 이 해에는 왕정복고 시기에서의 형사적 정신의학의 성립에 관한 것이었다.

1971
1월, 카르타고 만의 햇살을 그리워하며 푸코는 보지라르Vaugirard 거리 285번지의 탁 트인 건물 꼭대기 층으로 이사 간다.

2월 8일, 정치범의 지위를 얻기 위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마오이스트 활동가들의 변호사들의 기자회견장에서 푸코는, 그 자신의 거처를 본거지로 삼는 감옥정보그룹(G.I.P : Groupe d’information sur les prisons)의 창립을 알린다. 1970년 12월, 사르트르를 검사로 한 «인민재판»은 푸키에르레렁스Fouquières-les-Lens에서 발생한 화재의 진상규명을 하고 책임소재를 밝히려 했다. 의사단은 규소폐증(硅素肺症)에 걸린 광부들에 대한 조사보고를 제출했다. 다니엘 드페르는 1월 14일 «프롤레타리아 좌파»에게, 투옥된 활동가들이 시작한 단식투쟁의 반향을 키우기 위해 감옥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푸코는 이 운동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여 재판이라는 양상을 완전히 없애 버리고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만든다. 푸코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의 조사»라고 그 자신이 이름 붙인 운동을 제창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것들의 사례를 조사 수집하여 폭로함과 동시에, 사회에 그 사례들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감각을 야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재판관인 카사메이요르Casamayor의 조언으로 장 마리 도메나크와 알제리 전쟁 중 고문을 고발한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Pierre Vidal-Naquet에게 그의 계획에 동조해 줄 것을 요청한다.

2월 21일, 『담론의 질서』가 갈리마르에서 출판되는데, 이 책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개강 강의 당시에 시간상 제약으로 생략되거나 변경되어 강의되었던 내용을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2월 28일, 푸코는 『뉴욕 타임스 북스 리뷰』New York Times Books Review에서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로부터, 푸코는 «오늘날의 유명인사»라는 공격을 받는다.

3~4월, 프랑스 전역에서 감옥정보그룹(G.I.P)의 활동가들이 은밀하게 감옥에 질문용지를 보낸다. 수감자들이 모은 정보의 단편을 그들의 가족이 푸코의 집으로 갖고 온다.

4월, 푸코는 맥길McGill 대학의 초청으로 몬트리올에 체류한다. 감옥정보그룹(G.I.P)의 활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M.D.P.P.Q. 및 F.L.Q.라는 퀘벡 독립파의 활동가들도 만난다. 샤트랑Chartrand, 로베르 르미유Robert Lemieux, 가뇽Gagnon과 만나고, 감옥에 있는 『아메리카의 하얀 백인들』(Nègres blancs d’Amérique)의 저자 피에르 발리에르Pierre Vallières도 만난다.

5월 1일, 푸코와 장 마리 도메나크 그리고 감옥정보그룹(G.I.P)의 10여 명의 멤버는 형무소 입구에서 ‘선동가’로서 경찰에 체포된다. 경관 한 명은 푸코를 구타하고 “하일, 히틀러!”라고 외친다.

5월 20일, 튀니지의 친구들에게 초대를 받아 타할 하다드Tahar Haddad 클럽에서 마네에 대해 강연한다. 구금되어 있는 활동가의 석방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지만 소용이 없다.

5월 21일, 감옥정보그룹(G.I.P)의 첫번째 책자 『20개 감옥에서의 조사』가 출판된다. 푸코가 조사에 대한 답을 편집하고 서문을 단 것인데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Champ libre, coll. « Intolérable »).

5월 29일, 앤틸리스20인들의 시위 후에 경찰이 운송차로 실어 나르는 부상자와 동행하고자 했던 언론인 알랭 조베르Alain Jaubert가 피투성이 상태로 병원에 실려와 경관에 대한 상해혐의로 체포된다. 푸코는 인권연맹의 변호사 드니 랑글루아Denis Laglois와 사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기자회견에서 조사결과를 발표한다. 조베르 사건은 경찰의 이러한 방식에 매일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언론인들을 집결하게 한다. 모리스 클라벨을 대표로 하는 언론사 『리베라시옹』이 발족되고 이는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맹아가 될 것이다. 조베르 사건 즈음에 푸코는 모리스 클라벨을 통해 클로드 모리악을 만난다. 당시 드골주의 좌파의 일부 사람들과 극좌파가 수렴된다(Claude Mauriac, Le Temps immobile, t. III).

6월, 카타리나 폰 뷜로우Catherine von Bülow가 보지라르 거리에 장 주네Jean Genet를 데려온다. 당시 주네는 세인트 퀀틴 San Quentin교도소와 솔대드Soledad교도소에 석방기한 없이 11년 전부터 수감되어 있던 미국의 흑인활동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의 변호를 위한 문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푸코와 주네는 이 문서를 공동으로 쓰기로 하고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다. 카타리나 폰 뷜로우는 옥중의 잭슨과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를 방문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

파리에서는 마오주의자들이 란스에서의 인민재판을 모델로 경찰에 대한 인민재판을 조직하려고 한다. 푸코는 『현대』가 마오이스트로 지목한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 좌파의 지도자인 피에르 빅토르Pierre Victor, 일명 베니 레비Benny Lévy, 그리고 앙드레 글뤽스망André Glucksmann과의 토론에서, 인민재판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고 표명한다.

6월 18일, 법무장관 르네 플레벤René Pleven은 『르 몽드』지의 편집장에게 6월 8일자 신문에 실린 감옥정보그룹(G.I.P) 책자에 관한 보도기사에 항의한다. 그러나 법무장관은 감옥정보그룹을 고발할 수 있는 어떠한 약점도 발견하지 못한다.

7월, 일간지와 라디오가 형무소 내에서 허가된다. 이러한 성공으로 감옥정보그룹(G.I.P)은 감금시설 내부에서 인기를 얻는다. 감옥에 관해서 푸코는, “이 새로운 관심은 문학적 사상과 마주하여 느끼고 있던 권태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출구를 내게 제공해 준다”고 진술한다.

8월, 방되브르에서 푸코는 사법실천의 역사를 연구한다. 『도둑일기』(Journal du voleur)21를 다시 읽는다. 주네는 불안해하며, 자신은 결코 다시 읽은 적이 없는 그 책이 “견딜 만하냐?”고 푸코에게 묻는다.

8월 10일, 시위대에 공격 당한 요르단 대사관 근처에서 두 명의 치안기동대원에게 근거리 발포 당한 크리스찬 리스Christian Riss의 변호사가 푸코에게 도움을 청한다. 리스는 경찰에 의해 방책 밑에 방치된다. 푸코, 클라벨 그리고 도메나크는 기자회견을 한다. “공화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고 클라벨은 선언한다. 이때 푸코는 이란 반체제 활동가의 변호사 티에리 미뇽Thierry Mignon과 알게 된다. 푸코는 장 주네와 샤(Shah: 이란국왕)가 페르세폴리스에서 준비하고 있는 장대한 기념제전 행사를 고발하기로 계획한다.

8월 21일, 조지 잭슨이 옥중에서 암살된다. 카타리나 폰 뷜로우는 장례식에 참가하고 주네, 들뢰즈, 드페르, 푸코와 함께, 갈리마르의 “참을 수 없는(Intolérable) 총서” 중의 하나로 『조지 잭슨의 암살』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당국의 공식발표의 기만을 고발하는 책을 출판한다.

9월 10~14일, 뉴욕 주 아티카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9월 21, 22일, 프랑스에서는 클레르보Clairvaux의 중앙형무소에서 두 명의 수감자 뷔페Buffet와 봉탕Bontemps이 인질을 데리고 간수 한 명과 간호사를 살해한다. 여론의 일부는 형무소에 정보를 넣음으로써 아티카의 폭동이 전염된 것이라고 보도한다. 언론에서는 사형 유지에 관한 논의가, 형무소 상황의 고발을 대체한다. 푸코는 몇 번이나 공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비판을 한다.

10월, 시몽 레이스Simon Leys의 『마오 주석의 새로운 의복』(Habits neufs du president Mao)이 출판된다. 푸코는 특히 린뱌오의 이해할 수 없는 실종 이후로 이러한 비판에 매우 예민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영화감독 조리스 이벵스Joris Ivens와 마르슬랭 로리단Marceline Loridan에게 푸코는, 중국의 현실에 대해 매우 회의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10월 27일, 15세의 알제리 소년 젤랄리 벤 알리Djellali Ben Ali가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 몇 천 명이 사는 파리의 구트도르Goutte-d’Or 지역에서 건물 수위에게 살해당한다. 통상적인 범죄인가, 아니면 인종차별 범죄인가? 밤낮으로 경찰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는 이 일대에서 프롤레타리아 좌파에 필적하는 팔레스타인 위원회의 압력하에 이 지역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다.

11월, “형벌이론과 형벌제도”라는 제목의 강연이 시작된다. 이 강연은 고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일정 유형의 지식의 사법·정치적 모태를 기술하는 것이었다. 1970년부터 1976년에 이르기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연은 규율사회에 있어서 규범의 형성에 대한, 그야말로 하나의 연작이 된다. 법의학감정을 주제로 하는 월요일 세미나는 푸코가 『보건위생연감』에서 발견해 낸, 19세기 초 농민의 존속살해 사례인, 피에르 리비에르Pierre Rivière를 “발굴”해 내는 계기가 된다. 푸코에게 있어 형벌적 정신의학의 역사는 언제나 『광기의 역사』로 이어지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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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르 리비에르」 속 장면

11월 7일, 구트도르에서 “우리는 젤랄리의 복수를 한다”는 슬로건 아래 이민자들의 시위가 일어난다. 푸코는 활동가들이 테러리스트적 해법을 바라고 있다는 확신으로 돌아온다. 무기를 통한 해법이냐 민주적 해법이냐는, 당시 가장 활동적이었던 마오이스트 극좌파가 복수의 장면에서 직면했던 쟁점이었다. 푸코는 꾸준히 테러리즘에 대한 반감을 표명한다.

11월 11일, 뮈튀알리테Mutualité 공회당의 대강당을 자비로 빌려서 감옥에 대한 집회를 연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솔대드와 세인트 퀀틴 형무소 안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기 위해 밀려든다. 관습법 의한 수감자의 가족들과 옛 수감자들이 이때 처음으로 공적 발언을 하게 된다.

11월 27일, 프롤레타리아 좌파는 “민주적 발언”을 선택하고 아랍인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 호소라는 행동을 한다. 이는 구트도르 지역의 집회장 라 메종 베르트la Maison verte에서 장 주네의 주선으로 푸코와 사르트르가 처음으로 만나는 계기가 된다(클로드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Le Temps immobilem t. III, p.291). 몹시 야위었지만 경찰이 손댈 수 없는 사르트르 곁에서 푸코가 확성기로 이야기하고 글뤽스망과 카타리나 폰 뷜로우가 그 옆에서 찍은 유명한 사진은 이때 촬영된 것이다. 푸코, 클로드 모리악 및 그 외의 많은 지식인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인종차별의 존재에 대한 조사를 행하는 젤랄리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지역에 상설 사무소를 설치한다. 주네는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캠프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는데, “프랑스의 문제에 개입해서 지식인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 더 많은 박해를 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블랙팬더 쪽에 서고 싶다. 그들은 너무 많은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시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 기분이 된다”고 말한다. 12월 말에 주네는 공산당과 가까워지고 운동으로부터는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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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네덜란드 텔레비전 협회로부터 아인트호벤Eindhoven에 초대되어 인간본성의 문제에 대해 노엄 촘스키와 대담한다. 촘스키는 이 대담에 대해 『언어와 책임』(Language and Responsibility, Harvester Press, 1979)에서 언급하고 있다.

12월 4일, 푸코는 감옥정보그룹(G.I.P)이 조직한 방돔Vendôme 광장의 시위, 법무부 앞에서의 수감자 가족들의 시위에 참가한다. 이 시위는 클레르보에서의 사건 이후 수감자들에 대한 보복으로서 적용된 집단제재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이 당국의 보복과 외부지원 운동은 1971년부터 1972년에 걸친 겨울 동안 형무소에서 일어난 35건의 폭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툴Toul과 낭시Nancy에서 그랬고 푸코는 그곳으로 간다. 로베르 린아르트 주변의 마오이스트 중 일부는 푸코의 입장을 “울트라-좌파”라 칭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감옥의 문제에 대해 푸코에 반대하는 사르트르의 문서를 유포한다.

12월 9~13일, 네이 드 툴Ney de Toul의 중앙형무소에서 차례로 폭동이 일어난다. 푸코는 폭력의 의식에 대한 조사, 젊은 수감자와 나이 든 수감자의 폭동 형태를 구별한다.

12월 10일, 자크-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와 프랑수아 레뇨François Régnault가 만든 감옥정보그룹(G.I.P)의 두 번째 책자 『모범감옥 플뢰리-메로지에서의 GIP 조사』(Le GIP enquête dans une prison modèle : Fleury-Mérogis, Champ libre)가 발행된다.

12월 16일, 툴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푸코는 중앙형무소의 정신과 의사 에디트 로즈Édith Rose 박사의 증언 “그녀가 직무를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를 낭독한다. 푸코에게 있어 이 증언은 특수 지식인의 행동의 전형이었다.

※ 다음 주에 3편으로 이어집니다.

1 프랑스 극작가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 1873~1907)의 산문극.  5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6년에 초연되었다. 주인공 위비는 맥베스 부인으로 자처하는 위뷔 마님의 꼬임에 빠져 왕위찬탈자가 되어 귀족들을 몰살시키고 보물을 차지하지만, 쫓기는 몸이 되어 여러 나라를 유랑하게 된다.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전편에 비어(卑語), 조어(造語), 고어(古語)가 난무하는 이 극은 신비주의적 상징극을 기대했던 당시 부르주아를 격분하게 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 종래의 형식, 미학, 연극성 등 일체를 무시하고 부조리 그 자체로 성립된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를 중계자로 오늘날 이오네스코 등의 반연극(反演劇; 不條理劇)의 원류라고 볼 수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상연되고 있다. (출처: http://www.art.go.kr/index.jsp)
2 성관계 추문.
3 프랑스의 라디오 방송국, France-Culture.
4 파리 15구역. 센느강변에 위치하며 보그르넬르Beaugrenelle라고도 한다.
* 이후로 수취인이 따로 표시되지 않은 서신은 모두 다니엘 드페르에게 보낸 서신이다.
5 플로베르Flaubert의 소설.
6 벨라스케스Velazquez의 그림.
7 튀니지 남부 상공업의 중심지
8 U.J.C.M.L., l’Union des jeunesses communistes marxistes-léninistes
9 두 사람 모두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10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레지스탕스의 은밀한 잡지로 시작해서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가 됐다가 후에 뤼마니떼의 월간지로 흡수된다.
11 헝가리 동쪽 평원
12 헝가리 동쪽의 도시.
13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Bucuresti라고도 함.
14 프랑스의 주간지로, 시사 뉴스 잡지 및 지식인들의 여론지.
15 모리악이 문예지 『피가로 리테레르』에 기고하던 기사.
16 1967년 6월 5일에는 시리아, 이집트 연합세력과 이스라엘간에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하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각기 자신의 대내외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1966년 10월 군사동맹을 맺고 주변 아랍국가들과도 협력체제를 강화하면서 대이스라엘 군사공격을 준비하였으나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양측간의 전쟁은 6일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출처:boolingoo)
17 파리 지역구.
18 귀스타브 플로베르의Gustave Flaubert, 미완의 마지막 소설.
19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Cornell University Press, September 1980
20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지역.
21 장 주네의 자전적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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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7 09:00 2012/02/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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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위묘 2012/02/21 23:53

    재밌게 읽었네요. 이후 편들도 기대됩니다.

    • 그린비 2012/02/23 00:23

      네! 조만간 3편도 업데이트 될 예정이오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