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위기’ 시대에 다시 읽는 푸코

요컨대 법은 금지하고, 규율은 명령합니다. 본질적으로 안전은 금지도 명령도 하지 않지만, 사실상 몇몇 금지와 명령의 도구를 활용해 현실에 대응하는 기능을 합니다.

─미셸 푸코 지음,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85쪽

신자유주의적 공안탄압?

국가가 인민들의 저항과 일탈을 억제하기 위해 상징적이고 대규모적으로 활용하는 폭력적 탄압의 방법을 흔히 ‘공안탄압’이라고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공안탄압은 주로 국가보안법을 통해 작동해 왔지요. 70년대의 인혁당 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이며, 대공분실은 공안탄압의 흉물스러운 거점을 상징합니다.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사회당 당원 박정근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공안탄압 사례가 아닐까요? 박정근 씨는 북한 체제를 풍자하기 위해 북한의 대남기구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의 트위터 맨션들을 리트위했다가 ‘찬양고무죄’로 지난겨울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박정근 씨는 흔히 말하는 ‘종북좌파’ 혹은 넓은 의미의 ‘반미민족해방파’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가 속한 사회당은 2001년 당명 개정 당시 민족주의적 통일론자들과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슬로건으로 ‘반조선로동당’을 명시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계정의 맨션을 RT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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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사진가 박정근씨는 현재 보석결정이 나온 상태라고 한다.
'농담 리트윗 국가보안법 구속 박정근, 보석 석방' 기사 원문 보러 가기☞

기존의 공안탄압은 반공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여 대형 사건으로 이슈화되었던 경향이 있습니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향했다 해도 그 탄압은 직간접적으로 모든 국민의 사유와 행동 방식을 규제하는 효과를 양산합니다. ‘국민’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이 사건을 보며 너의 신체와 두뇌를 정화하라 등. 개발독재 시기라 불렸던 박정희 정권기에 극심했던 이러한 탄압 유형은 기본적으로 ‘국민’이라는 ‘규범’에 모든 사람들의 삶을 조응시키고자 했던 일종의 전 국민적 규율체계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와서, 즉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인권운동가의 글을 읽어 보겠습니다.

과거 정권에서 공안정국이 조성될 때는 국가보안법 조직사건이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 등 대형 사건을 중심으로 공안몰이를 했다. …… 하지만 이런 고강도 탄압을 중심으로 한 공안탄압은 이명박 정권의 것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서 이명박 정권에서는 공안탄압이 대형 사건이 없음에도 일상화되었고, 국가보안법 사건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는다. 또 전통적인 공안기구들만 동원하는 것도 아니다. 국세청이나 정보통신위원회, 문화관광체육부까지 필요한 정부기관들이 모두 동원된다.(박래군, 「공안탄압 대응과 운동방향」, ‘이명박 정부의 공안탄압 양상과 대응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 발표문, 2010. 강조는 인용자)

이른바 ‘공안몰이’를 통해 ‘조직사건’을 만들어 내던 기존의 공안탄압과 비교하면 박정근 씨 사건에 ‘공안정국’이라 할 만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는 그냥 홀로 잡혀갔고, 그 사건으로 인해 그가 속한 정당이 배후 이념세력으로 지목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서 국가안보상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일도 물론 없었습니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전 국민적 차원의 대형 사건이 아니라 그냥 일상화된 국가폭력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박정근 씨 사건에서 우리는 공안탄압의 변화된 형태를 봐야 할지, 아니면 공안탄압과는 거리가 먼 작은 에피소드를 봐야 할지 판단의 모호함을 느끼게 됩니다. 박정근 씨의 사건을 통해 우회적으로 설명했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통치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통치양식이 등장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잠시 눈을 돌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푸코의 말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의 위 말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양식과 강하게 연결된 무언가를 지시해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안전메커니즘의 역사적 변별성
푸코는 위 인용문에서 법과 규율(discipline), 그리고 안전(security)을 구분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의미심장한 한 문장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요컨대 법은 금지하고, 규율은 명령합니다.” 이 문장의 앞부분, 즉 “법은 금지하고”는 법이 사회적 삶에서 허와 불허의 영역, 즉 적법한 것과 불법적인 것을 나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규율은 명령합니다”는 사회적 주체가 법의 범주 내에서 기능할 수 있도록 규율권력이 그 주체의 신체와 의식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활동을 규범화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명령한다는 것은 주체의 활동 내용과 범주를 주체에게 의무적인 것으로 명시한다는 것, 즉 주체의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공안탄압은 법의 가능 영역을 명시하면서(혹은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면서), 그 가능 영역 내에서 ‘국민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즉 ‘국민’이라는 주체의 규범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안전메커니즘은 어떨까요? 18세기 유럽 경제교역의 발흥 속에서 푸코는 중농주의에 기반했던 18세기 중후반의 자유주의가 근본적으로 기존의 규율 및 사법 메커니즘과 변별되는 새로운 통치메커니즘을 확립시켰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그가 볼 때 이 새로운 통치메커니즘에서 중요한 것은 규율 및 사법 메커니즘에서 중요시되었던 ‘안’과 ‘밖’ 혹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그 새로운 메커니즘(안전메커니즘) 속에서 이 이분법적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조금 다른 화두(전염병)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푸코의 또 다른 말을 읽어 보겠습니다.

[규율메커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물론 우선은 병자의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치유가능한 한 말입니다. 그다음에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해 감염을 막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천연두․우두 접종과 함께 출현하는 [안전] 장치는 무엇을 목표로 할까요? 이 장치는 병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을 단절이나 불연속성 없이 총체적으로, 요컨대 인구로 고려합니다. 그래서 인구의 개연적인 발병률이나 사망률 계수, 그러니까 인구 중에 병에 걸리고 이로 인해 사망하리라고 예상되는 평균값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미셸 푸코 지음,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99쪽, 대괄호 내 삽입구 및 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병’과 ‘병자’를 모두 ‘범죄’와 ‘범죄자’로 바꿔 읽어 보겠습니다. 요컨대, 기본적으로 범죄의 격리와 제거를 목표로 했던 법/규율메커니즘과는 달리, 안전메커니즘은 사회 속에 범죄가 존재할 수 있고, 나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출발합니다. 오히려 안전메커니즘 속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범죄 자체를 하나의 확률적 통계수치로 환원하여 관리와 조절의 대상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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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권력이 생명을 장악했다고 말하는 것, 아니 최소한 권력이 생명을 책임졌다고 말하는 것은 규율의 기술과 조절의 기술 등 이중의 작용을 통해 유기체에서 생명현상까지, 즉 육체에서 인구에 이르기까지 권력이 모든 공간을 뒤덮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지음,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291쪽

조금 낯설 수 있는 이 변화 국면에서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리스크’라는 단어이지요. 신자유주의 시대에 금융용어로부터 우리의 일상어법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용어가 아마 ‘리스크’가 아닐까 싶습니다. 18세기 중후반 유럽사회는 사회에 불어닥칠 수 있는 위기를 ‘리스크’라는 통계적이고 질적 변별성이 탈색된 개념으로 전환합니다. 아마도 이 개념에 정확히 대응하는 또 다른 개념이 통계적 산술 단위인 인구가 아닐까 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국민과 비국민의 이분법을 제거한 균질적 단위인 인구 개념은 모든 혼란과 위기를 리스크라는 확률적 산술 단위로 환원하는 안전메커니즘의 핵심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수학적 평면 속으로 환원하는 듯한 이러한 변화양상은 물론, 기존의 국가통제적 시장메커니즘이 외부시장에 적극적으로 개방되면서 나타난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외부로 열린 시장에서 이제 국가의 국민적 통제보다 더 적합한 것은 통제될 수 없는 것을 적절한 수위에 배치하는 것이 될 테니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18세기 중후반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서 푸코가 안전메커니즘의 핵심적 기능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앞서의 박정근 씨의 사례가 그렇듯, 이 변화된 안전메커니즘하에서 사건은 국민적 공포나 위기국면으로 수용되기보다는 개별화되고 에피소드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정 사건들은 수학적 단위로 균질화되면서 개별화되고, 개별화되면서 조절가능한 무엇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분명 기존의 통치메커니즘과는 다른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오늘날 우리가 푸코를 다시 읽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변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 편집부 고태경
안전, 영토, 인구 - 10점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난장
2012/02/23 09:00 2012/02/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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