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 1957년, 푸코 연표 1편
1958 ~ 1971년, 푸코 연표 2편

※ 푸코 연표 2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972
1월 5일, 푸코는 툴에서의 새로운 집회에 참가한다. 사르트르는 “우리 모두를 수용소와 같은 세계에 가둬 두는 체제”(『르 몽드』)를 탄핵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1월 15일, 낭시의 형무소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푸코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감옥정보그룹의 역사를 말하면서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대한 질문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수감자들은 다른 질문으로 응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반란과 요구의 핵심에 있는 물음, 즉 노동의 여러 조건, 감옥 내부에서의 수감자들의 법적 보호, 정보에 대한 권리, 범죄 기록으로부터의 탈출과 삭제라는 물음이었습니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1972년 1월 17일 『플레벤의 감옥』 특집호.)

1월 18일, 사르트르와 미셸 비앙Michele Vian―이 이후 그녀는 자신이 속한 감옥정보그룹과의 사르트르 간의 우호적 관계를 주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그리고 들뢰즈, 클로드 모리악, 장 쉐노Jean Chesnaux, 알랭 조베르Alain Jaubert 등 모두 4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푸코는 법무부 현관의 홀에서 연좌농성을 조직하고 여러 형무소들에서 오는 요구들을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2월 25일, 비앙쿠르의 르노Renault 공장에서 마오이스트 운동가 피에르 오베르네Pierre Overney가 수위에게 사살당한다. 그날 밤 일어난 시위 중에 푸코는 체포된다. 그에 이어지는 수일간 그는 자동차로 한 번인가 두 번 사르트르를 비앙쿠르 공장에 데려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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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베르네 암살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는 푸코와 사르트르.(1972년 2월 28일)

2월 26일, 낭시에서 감옥정보그룹의 저항운동이 행해지고 알제리 해방전선(F.L.N.)을 지원한 것 때문에 투옥된 적이 있는 남녀들이 다음과 같은 성명을 작성한다. “대부분은 사회적 부정의에 의해 형무소로 보내진, 대부분은 젊은 사람들인, 많은 수감자들의 반란을 우리는 단호하게 지지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반란을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의 요구들이 설령 옥중에 있더라도, 모든 인간이 그 권리를 가진다는 존엄을 위해, 수감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할 것을 맹세한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1972년 3월 6일호.) 경찰은 혹독하게 시위를 탄압한다.

3월 8일, “프롤레타리아 좌파”의 비합법조직 “신 프롤레타리아 레지스탕스”(N.R.P)는 오베르네 살해의 보복으로서 르노의 간부를 납치한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에서의 테러리즘의 위험은 심각해진다.
구조주의적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말, 개념, 표현을 삭제하고 담론 형성의 분석에 보다 많이 신경 쓴 『임상의학의 탄생』 제2판이 출판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의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capitalisme et schizophrénie)의 제1권 『앙티-오이디푸스』(L'Anti-Œdipe)가 출판된다. 푸코가 들뢰즈에게 농담 삼아 “프로이트-맑스주의로부터 탈출해야겠어요”라고 하자 들뢰즈는, “프로이트 쪽은 제가 맡을 테니 당신은 맑스 쪽을 맡아 줄래요?”라고 답한다.

『아르크』(49호, 들뢰즈 특집호)에 이 두 철학자가 정치논의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된, 권력의 문제를 강조하는 대담이 게재된다.

감옥정보그룹을 모델로 보건정보그룹(G.I.S.), 정신병원정보그룹(G.I.A.), 그리고 좀더 뒤에는 이주노동자정보지원그룹(G.I.S.T.I) 등, 여러 그룹들이 생겨난다. 푸코는 보건정보그룹(G.I.S.)과 함께 의학에 대한 선언서를 준비한다. 마오주의자들은 “경찰에 대한 재판”을 기획했지만 금지당하자, 대신에 몇몇 소송을 둘러싼 “진실-정의 위원회”(Comité Vérité-Justice)를 결성한다.

버펄로를 다시 방문한 푸코는 경제불황과 실업에 경악한다. 뉴딜정책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는다. 미국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진실의 의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의 『디오니소스의 여신자들』에서의 재판의 형성”, 그리고 화폐의 기원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한다.

4월 7일,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에서 개최된, «17세기 프랑스 문학에 대한 제4회 연례 강연»에서 «17세기의 의식, 연극 그리고 정치»에 대해 강연한다.

4월 21일, 버팔로의 교수 존 사이먼과 함께 아티카 형무소를 방문하고, 아티카 지원 위원회(Attica Defense Committee)와 만난다. 감옥의 권력에는 억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감옥정보그룹은 폭동으로부터 정치 요구적 담론으로의 이행을 보여 주는 『형무소로부터 가져온 요구 노트』를 출판한다. 이 노트들은 엘렌 시수와 장 가테뇨Jean Gattégno가 준비했다.

5월, 펠릭스 가타리가 주재하는 “시설제도의 연구, 탐구, 형성 센터”(C.E.R.F.I.) 와의 사이에서 공동시설의 역사에 대한 일련의 토론을 9월까지 계속한다.

6월, 초판의 서문을 제외한 『광기의 역사』 완결판이 갈리마르사의 “역사학 총서”에서 재판된다. 들뢰즈의 설득으로 푸코는 이미 발표한 바 있는 “광기, 작품의 부재”를 여기에 수록한다. 더 나아가 전년도 일본의 잡지에 원고를 넘긴 “데리다 반박”을 수정하여 추가한다.

6월 8일, 낭시의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프랑스 국내 언론에서는 “이것은 형무소 현상의 재판이다”라고 헤드라인을 단다. 극좌파 신문은 푸코를 다음과 같이 규탄한다. “『광기의 역사』의 불멸의 저자는 우연처럼 바르샤바에서 찾아왔다”(『미뉘』Minuit). 아리안 므누슈킨Ariane Mnouchkine은 재판을 기록하고 태양극장에서 상연하는데, 이 공연은 노동자센터에서도 상연되게 된다. 푸코와 들뢰즈는 경찰관 역으로 출연한다.

푸코는 당시 정치 언어에 만연하기 시작한 도덕주의, 특히 마오주의자들이 4월에 정치적 주제로 삼은 브뤼에-앙-아르투아Bruay-en-Artois의 범죄사건에 관한 도덕주의를 한탄한다. 푸코는 현지로 돌아가 광부들로부터 사정을 듣지만 아무것도 공표하지 않는다. 브뤼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프랑수아 에발드François Ewald를 알게 된다. 에발드는 1977년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조교가 된다.

9월, 주네와 재회한다. 푸코가 “형벌에 대한 책”(『감시와 처벌』)을 쓰고 있던 이 당시에 주네는 푸코에게 메트레Mettray 형무소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10월, 코넬 대학의 로망어 연구 학과에 초대되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앎», «문학과 범죄», «형벌사회»에 대해 강연한다.

보건정보그룹(G.I.S.)과 푸코의 원탁회의를 정리하여 반(反)의학 선언서의 형식을 띤 『라 네프』(La Nef)지 제49호 특집호가 출간된다. 보건정보그룹은 다른 정보 그룹과 마찬가지로, ①권력의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는 비밀의 타파, ②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있어서 조사자와 피조사자 간에 존재하는 거리의 타파, ③영리의료의 반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11월 6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피에르 리비에르와 그의 작품”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개시한다. 리비에르의 기록을 간행하기 위한 집단적 준비가 이루어진다.

11월 24일, 그르노블Grenoble의 빙상장에서 집회를 주재한다. 1,500명의 청중 앞에서, 갈취와 연관되어 일어난, 많은 젊은이들이 죽은 나이트클럽 화재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던 “마피아” 중 몇몇 멤버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규탄한다. “적색구조대”의 활동가들조차도 이 마피아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12월, 감옥정보그룹은 해산하기로 결정한다.

12월 8일, “수감자 행동 위원회”(C.A.P.) 신문 제1호가 발행된다. 당시 감옥 반란의 지도자들이 출소 후 프랑스에서의 첫 수감자 조직을 발족시키고 있었다. 푸코는 당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자립적 표현이 가능하게 된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범죄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이 아닌 기억을 말하도록 지나치게 요구해 왔다”. 이와 병행하여 들뢰즈와 푸코의 지지를 받은, 도미니크 엘뤼아르Dominique Éluard, 베르코스Vercors, 장 마리 도메나크는, “수감자 권리 수호 연맹”(A.D.D.D)를 설립한다.

12월 16일, 파리의 그랑 불뤼바르에서 이주노동자 모하메드 디아브Mohammed Diab가 베르사이유의 경찰서에서 살해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다. 시위를 선동한 주네, 모리악, 푸코는 다시 체포되어 폭행을 당하고 보종Beaujon 유치장에서 밤의 일부를 보낸다.(클로드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2권, 제3권, 제9권.) 자신이 당한 폭행에 대해 신문이 너무 많이 쓴다고 생각하는 모리악에게 푸코는 “우리는 아랍인들이 보다 적게 맞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해요. 우리는 아랍인들을 위해 더 많이 소리쳐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까요”라고 말한다.(『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 430.)

푸코는 “가장 비난받는 전쟁, 즉 홉스도 클라우제비츠도 계급투쟁도 아닌, 내란(시민전쟁)(서신)으로부터 출발한 권력관계 분석을 계획한다.

감옥정보그룹을 위해 르네 르포르René Lefort와 엘렌 샤트랭Hélène Châtelain이 제작한 영화 「수감자들 역시」(Les Prisonniers aussi)가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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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 역시」의 스틸 컷.

12월 26일, 형벌 집행의 감시에 있어서 재판관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범죄기록에서 어떤 종류의 유죄판결을 제외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된다. 범죄 기록의 폐지는 감옥정보그룹의 요구 중 하나였다.

푸코는 새로운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의 구상에 참여한다. 시사문제와의 관계에서 노동자의 기억에 관한 칼럼을 담당하고 동성애자들의 운동에 관한 칸을 만들자고 제안한다.(『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 422.)

1973
1월, 질 들뢰즈가 편집하고 해설한, 감옥정보그룹의 네번째 책자 『1972년 형무소 내에서의 자살』( “참을 수 없는” 총서, 갈리마르)이 출판된다.

1월 3일, «형벌사회»(당초 «규율사회»)에 대한 첫번째 강연에서 푸코는 배제의 사회와 감금의 사회를 대비시킨다.

2월, 훗날 폴리사리오Polisario(서 사하라 해방전선)의 대변인이 되는 아흐메드 바바 미스케Ahmed Baba Miské의 요청으로, 후일 『존 데 탕페트』(Zone des tempêtes)로 이어지게 될 제3세계주의 신문 『탕페트』(Tempêtes)를 검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명목상의 편집장이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2월 22일, 『리베라시옹』지의 창간준비호를 위해, 해고된 르노-비앙쿠르Renaualt-Billancourt의 노동운동가 조제 뒤아르테José Duarte와 대담한다.

3월, 존경하는 화가 르베이롤르Rebeyrolle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쓴다. 갤러리 매그Maeght와 접촉하면서 피카소의 『시녀들』에 대해 쓸 계획이 생기지만 이 텍스트는 발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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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시녀들>

3월 8일, 클로드 모리악, “큰길에서 전단지를 뿌리는 것은 처음이다. 푸코는 나에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도 그래요’.”, “수감자 행동 위원회”의 전단지였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3월 12일,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패배한다.
“형벌사회”에 대한 강연 1부가 해적판으로 출판된다. 이러한 해적판 발행은 외국에까지 퍼진다.

4월, 푸코는 『광기의 역사』 때부터 시작했던, 아르스날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는 봉인장에 대한 연구를 재개한다.

4월 2일, 세르주 리브로제Serge Livrozet의 저작 『감옥에서 저항으로』(de la prison à la révolte)에 서문을 쓴다.감옥에 대한 책(『감시와 처벌』)의 첫번째 집필을 끝낸다.

5월, 몬트리올(“1971년의 그 열광적인 퀘벡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과 뉴욕에서 연속으로 강연한다. 뉴욕에서는 중앙도서관에서 콜크혼Colqhoun과 벤담Bentham에 대한 작업을 한다. “거의 모든 산 자들의 거리 한가운데, 거의 모든 죽은 자들의 도서관.”(서신).

5월 21~25일, 리우데자네이루의 가톨릭 성직자 대학(P.U.C.)을 방문한다. 강연들 중 몇몇은 『진실과 사법형식』(La Vérité et les formes juridiques)이라는 제목으로 후에 출판되게 된다. 사회의학의 역사를 둘러싸고 의사 및 정신과의사들과 회합을 갖는다. 이것을 계기로 히스테리의 역사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 브라질의 친구들은 푸코에게, 경찰과의 협력관계에 있는 브라질 정신과의사들 그 일부에 대한 미국인 심리학자 스키너Skinner의 영향을 고발하고, 사회의학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치행동의 필요성을 인식시킨다. 철학자이며 인식론학자인 로베르토 마차도Roberto Machado와 친교를 맺는다.

5월 30일, 벨로 오리존테Belo Horizonte에서 정신의학제도에 관해 강연하고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지방의 마을들을 방문하며 마나우스Manaus에서부터 벨렘Belém까지 아마존을 오래 여행한다. 벨렘의 마을은 푸코에게 강력한 추억이 된다.

7월, 1968~1972년의 반(反)권위주의 운동에 이어지는 활동으로 여겨지던 자주관리 상태에 노동자들이 놓이게 된, 브장송Besançon에 있는 “립Lip1”의 공장을 방문한다. 함께 방문했던 사람들에게 푸코는 “문제는 반(反)권위주의 투쟁이 아니라 실업이네요”라고 말한다. 아르케스낭Arc-et-Senans의 르두Ledoux 소금공장2을 방문한다. 방되브르에서 “신체형에 대한 책, 개인화의 주요 기술들, 임상의학과 정신의학, 교육학 그리고 범죄학에 대한 책”(서신)의 집필을 재개한다

8월 10일, 장 바라케 사망. 50년대 이후로 푸코는 그와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9월, 콜레주 드 프랑스 세미나 참가자들이 구성하고 연구하여 주석을 단 『나, 피에르 리비에르: 내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죽인』(Moi, Pierre Rivière, ayant égorgé ma mère, ma sœur et mon frère)가 갈리마르-쥘리아르 출판사에서 “아카이브” 총서로 출판된다. 농촌 민속학의 유행을 타고 크게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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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프롤레타리아 좌파”가 은밀하게 자체 해산하고 이는 극좌파의 종말을 고한다.
임신중절 합법화를 주장하는 보건정보그룹(G.I.S.)의 소책자, 『그래, 우리는 낙태한다』(Oui, nous avortons, Paris: Gît-le-cœur)의 공동책임자로서 푸코는 사법경찰로부터 출두명령을 받는다.

펠릭스 가타리가 주재하는 “시설제도의 연구·탐구·형성 센터”(C.E.R.F.I)에 의한 다음의 두 연구를 후원한다. ①정상화 시설들의 계보학(보건과 학교), ②도시계획에서 도시시설들의 위치 분석(『프랑스의 도시연구 협동센터 편람』, 1973~1974).

몽펠리에Montpellier의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출판사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출간한다. 이것은 이미 발표된 마그리트에 대한 오마주를 수정하고, 이 화가의 두 통의 편지를 첨부한 것이다(푸코의 편지는 1987년 7월에 런던에서 마그리트의 아틀리에와 함께 매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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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여권, 마그리트 옆에 있는 사진 속 여성은 마그리트의 아내이다.

12월, “시설제도의 연구·탐구·형성 센터” (C.E.R.F.I)의 잡지 『르셰르셰』(Recherches) 특집호는, 그들이 진행한 연구를 집대성한 “권력시설들”에 할애된다.

1974
1월, 일찍이 소비에트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언론인 K.S.카롤에게, 중국에 대한 난처함을 표명한다.
“정신의학의 권력”에 대해 강의하는 한편, 18세기 병원건축과 1830년 이후 정신의학에 있어서의 법의학 감정을 번갈아 다루는 세미나를 시작한다.

3~4월, 몬트리올 대학에서 강연한다. 코트-데-네주Côte-des-Neiges의 숙소에서 “형벌에 대한 책”의 몇몇 부분을 다시 쓴다.

4월 25일, 포르투갈의 ‘국군운동’(MFA)이 카에타누Caetano 정권을 전복한다. 프랑스의 인텔리겐차는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린 이 운동에 열광한다. 푸코는 포르투갈을 방문하지는 않는다(클로드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 531).

4월 26일, 『르셰르셰』는 『동성애 대백과사전』(Grande Encyclopédie des homo-sexualités)을 간행했다는 이유로 “책을 통한 풍기문란”으로 고발당한다. 들뢰즈와 푸코는 증인으로 소환된다. 푸코는 법정에서 “언제 동성애는, 모든 정상적인 성(性)과 같은 표현과 행사의 권리를 부여받게 될 것인가?”라고 진술한다.

5월 19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새로운 대통령은 정치적 삶의 “긴장완화”를 시작하고자 하고 그것을 지식인과의 관계로도 확대하고자 한다. 먼저 뤼시에 포르Lucie Faure가, 그리고 이어서 리오넬 스톨레뤼Lionel Stoléru가 대통령과 푸코의 만남을 주선하려 하지만 푸코는 늘 그것을 거절한다.

6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판된다.

7월, 감옥의 반란을 빼고는 사회투쟁이 폭력성을 잃는다. 알랭 바디우 등의 소규모 마오이스트 그룹은 투쟁을 이데올로기 분야, 특히 영화 분야로 이동시키려고 한다. 푸코는 『카이에 뒤 시네마』(Les Cahiers du cinéma)를 통해 이러한 논쟁에 개입한다. 신독일영화(슈뢰터Schroeter, 질버버그Sylberberg, 파스빈더Fassbinder)에 열중한다. 그는 베르너 슈뢰터Werner Schroeter가 『나, 피에르 리비에르』를 영화화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위스의 영화감독 다니엘 슈미트Daniel Schmidt와도 정기적으로 교우하며 파스빈더 와 만난다.

7월 29일, 장 마리 도메나크, 미셸 푸코, 클로드 모리악이 서명한 “수감자 권리 수호 연맹”을 위한 성명은, 정부에 “감옥제도에 대해 공공연하게 논의할 것”을 요구한다. 요컨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감옥의 문제는 대중 앞에서, 1970년부터 1971년에 걸친 겨울 동안 정치범들의 파업으로 제기되었다. 4년 전부터 당국은 이러한 반란들이 외부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자들’을 체포 혹은 심문해 왔다. 4년 동안 당국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했고, 툴에서와 같이, 진실을 말하려는 용기를 가진 의사, 부속사제들을 추방하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과거의 무기력했던 책임자들이나, 지금 개혁을 약속하는 자들이나, 오늘날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르 몽드』, 9186호, 7월 28~29일).

8월 26일, 방되브르에서 푸코는 그의 “신체형에 대한 책”의 집필을 끝낸다. “나의 부적응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고 반복해서 나타나. 다른 걸 연구하고 싶어. 정치경제학, 전략, 정치를 말이야”(서신).
영화감독 르네 알리오René Allio가 『나, 피에르 리비에르』의 영화화를 제안한다.

10월, 사법의 세계에 인간과학이 진입한 것에 대해 법률가들과 토론한다.
베유 법la loi Veil(1975년 1월 17일)3 일정한 조건하에서 의도적인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한다.

10월~11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도시화와 공공위생”, 그리고 “19세기의 정신의학적 실천 내에서의 정신분석의 계보학”에 대한 두 개의 세미나를 조직한다. 국립대학의 사회의학강의라는 틀 내에서 여섯 개의 강의를 하고, 그 중 하나는 19세기 정신의학에 관한 것이다. 그 강연들 중 몇 개만이 출간되어 있다. “역사적 담론, 그 코드화된 담론을 다룰 수밖에 없어. 모든 관점에서 사태는 전년도보다 더 엄중하고 경기후퇴 때문에 많이들 걱정하지. 사회의학 쪽 사람들은 [북동부의] 2,600만 명이 사는 모습을 보지 않는 한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어.”(서신) 푸코는 헤시피Recife를 방문한다.

1975
1월 6일, 출판을 염두에 두고 정신의학 영역에서의 법의학감정에 대해 해당 년도의 콜레주 드 프랑스 세미나를 시작한다. 세미나 참가자들을 몇몇 연구자로 한정하려고 시도한다. 세미나에서는 위험성dangerosité의 문제를 다룬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샤르코Charcot의 기록자료를 연구한다.

1월 8일 수요일, 늘 그랬듯이 강의 시작 시간은 17시 45분, 심리학에 의한 이상성의 병합에 대해 «비정상인들»이라고 이름 붙인 강의를 시작한다.

2월, 중국에서 돌아온 화가 제라르 프로망제Gérard Fromanger의 전시회 서문을 쓴다. 이것을 계기로 19세기 말 회화와 사진의 관계에 대해, 마네를 축으로 하여 기획한 이미지의 분석을 연장하는 중요한 연구를 한다.

2월 25일,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에서 기독교가 육체를 ‘육욕’(chair)으로서 지칭하는 것에 대해 다룬다.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이 갈리마르의 «역사학» 총서에서 출판된다. 이 이후 푸코의 정치적 입장은 그의 저작이 수용되는 데에 큰 비중을 갖는다. 역사학자 자크 르벨Jacques Revel은 『마가쟁 리테레르 』(150호)에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들은 그의 정치활동, 감옥정보그룹에서의 그의 행동을 알고 있었고 전투적인 책을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이 책의 전투성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역사적 우회가 아마도 여기서는 비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 역사학자들의 일정한 침묵이 이어진다. 맑스주의적 분석에 의해 국가에 부여되어 있던 중심적 위치를 중시하는 좌파는 미시권력 개념에 대해 유보적인 반응을 보인다. 좌파는 저항을 위한 자리도, 자유를 위한 자리도 없는 허무주의적 관점이라고 푸코를 비난한다. 좌파는, 사회통제의 불가역성, 그리고 사회복귀 개념과 인간과학의 기여의 부질없음 등, 『광기의 역사』에서의 계몽주의 개혁운동에 대한 비판보다도 훨씬 급진적인 비판이 『감시와 처벌』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하며 이를 문제시했다. 이 저작은 곧 전 세계에 퍼지게 된다.

3월 5일, 강의에서 기독교에 의한 개인들의 통치를 다룬다.

4월, 푸코는 이아니스 야나카키스Iannis Yannakakis와 종종 만나게 된다. 그리스 및 체코의 공산당에 속한 적이 있는 인물로, 푸코에게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반체제지식인의 여러 조류를 소개한다.

7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프랑스 대학의 대사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라캉, 바르트, 리오타르, 푸코에 대한 탐방기사를 게재한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 이래로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낡은 강당이 단상까지 사람들로 새카맣게 찬다. 푸코가 그 단상에 들어설 때면 물에 뛰어들 듯 빠른 걸음으로 강단에 들어올 때 그는 자기 자리에 당도하기까지 몇 사람의 몸을 제쳐야만 했다. 그러고는 원고지를 올려놓기 위해 녹음기를 밀어놓고 윗옷을 벗고 탁상램프를 켠 후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속 100킬로미터처럼 신속했다. 힘 있고 효과적인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증폭된다. 스터코 장식의 수반 위로 떠올라 있는 빛에 가까스로 밝혀진 이 교실에서는 확성기만이 현대에의 유일한 양보이다. 좌석수 300명의 강의실에 500명의 사람들이 가장 좁은 틈까지도 메운 채로 들어차 있다.” 푸코는 이 특집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저는 우리들 시대의 관심사에 나 자신을 묶어 두는 것을 의무로 여겨 왔습니다. 올해는 수세기에 걸쳐 비정상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내년에는 군인들의 정치적 사유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언제나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주제를 논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신과의사건 심리학자건 의사건 교육자건 간에, 혹은 그 이외에도 그들이 나중에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이 좋을 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지』, 54호, p.54)

4~5월, 버클리 대학 프랑스 문학과의 레오 베르사니Leo Bersani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캘리포니아를 여행한다. 미간행된 두 개의 강의, «담론과 억압»과 «프로이트 이전의 유아성애»가 보존되어 있다. 어바인Irvine 대학과 클레르몽Claremont 대학에 초청 받는다. 『텔로스』(Telos)지에 번역된 들뢰즈와의 대담4이 매우 많은 학생들을 불러 모은다. 데스밸리Death Valley에 있는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에서 LSD를 한 것을 계기로 캘리포니아의 사람들이 마약을 축으로 발전시킨 쾌락주의적 문화를 발견한다. “마약. 그것은 권력, 노동, 소비, 국지화로 이루어진 신체와의 단절.”(서신)(禪, Zen), 채식주의, 페미니즘, 동성애 등의 작은 공동체들에 열광한다. 막스 베버가 일찍이 미국의 종파를 분석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흥미를 가지고 그 소공동체가 만들어 내는 실존의 양식에 접근한다.

프랑스에 귀국한 후 자신의 궤적을 명백히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언론인 로제-폴 드루아Roger-Pol Droit와 인터뷰집을 기획하지만 푸코는 실망하고 곧 기획을 중단한다. 푸코는 인터뷰보다는 오히려 대화에 가까운 시도를 바라고 있었다.

9월, 푸코가 높이 평가했던 「칼뱅파 신교도들」(Les Camisards, 1972년)의 르네 알리오 감독이 노르망디 농민을 캐스팅하여 실제 범죄가 일어났던 현지에서 『나, 피에르 리비에르』의 촬영을 개시한다. 연극 쪽에서는 이미 연극으로서의 『나, 피에르 리비에르』가 여러 극장들에서 상연되고 있었다. 푸코와 클로드 모리악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다.

푸코 : “우리는 놀라운 소년[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클로드 에베르Claude Hébert를 일컬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홀로 지내면서 …… 일기를 쓰고 있지요.”
클로드 모리악 : “그리고 당신은 부추기려는 것이죠…….”
푸코 :  “아뇨, 어머니는 이미 죽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 531).

푸코는 이 영화의 상업화되지 않은 긴 버전에서 판사 역을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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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르 리비에르」의 배우 클로드 에베르.

9월 19일, 카타리나 폰 뷜로우가 푸코에게, 프랑코 체제와 싸우고 있는 11명의 스페인인들에게 임박한 닥친 교수형 판결에 반대하는 행동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한다. 장 다니엘, 레지 드브레, 클로드 모리악, 코스타 가브라스, 장 라쿠튀르, 도미니크회 로두즈 신부, 이브 몽탕과 함께 마드리드에서의 행동을 준비한다. 푸코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클로드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 546)를 작성한다. “11명의 남녀가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법정에서 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법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수형자에게 변호할 권리를 부여하는 사법에 대한 권리도, 기소 이유가 얼마나 중대하건 간에 그들에게 법의 보장을 부여하는 사법의 권리도, 병든 사람을 보호하는 사법의 권리도, 수감자에 대한 고문을 금하는 사법의 권리도, 그들은 가질 수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그러한 사법을 위해 늘 싸워 온 것이다.” 일찍이 스페인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말로Malraux를 비롯하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Pierre Mandès France, 루이 아라공, 장-폴 사르트르, 프랑수아 자콥François Jacob의 서명이 더해졌다. 레지 드브레의 요청으로 스페인 공산당의 지도자, 산티아고 카리요Santiago Carillo가 이 성명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한다.

9월 22일, 마드리드의 토레Torre 호텔의 기자회견에서 이브 몽탕이 이 성명서를 읽는다. 사복형사들이 언론인들을 경기관총으로 위협하면서 내쫓아 버리고 프랑스 대표단 7명을 미니버스에 태워 스페인 국경 밖으로 추방한다. 전 세계 보도진들이 루아시Roissy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프랑스 및 외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수많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활동가들의 처형을 막지는 못했다.

9월 27일, 파리의 스페인 대사관 앞에서 야간시위가 일어난다. 한 스페인 학생이 맑스에 대한 강연을 요구하자 푸코는 격분하여 답한다. “더 이상 내 앞에서 맑스 얘기 꺼내지 마요! 그 양반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 그게 직업인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그걸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한테, 그걸로 공무원 노릇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라고요. 나는 맑스랑은 완전히 끝났으니까.”(프랑수아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3권, p.581)

9월 29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568호, p.48)에 “알 수 있는 모든 스페인 주소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메시지를 복사해서 부치도록”이라는, 마드리드에서 국외로 추방당한 7명의 호소가 실린다. 같은 호 사설란에서 장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7명의 친구들이 마드리드의 작은 특공대를 조직했을 때……, 그 시점에는 프랑코 정권에 대해 개입하자는 네덜란드의 제의에 프랑스가 반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 우리의 7명의 친구들이 마드리드로 출발했다는 속보는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 그리고 엘리제궁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은 틀림없이 그것을 읽었을 것이다. 몇 분 사이에 프랑스의 태도는 바뀌었다. …… 7명의 지식인은 부지불식 간에, 유럽 9개 국을 스페인의 반대세력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

10~11월, 상파울루 대학을 다시 방문하여(10월 5일~11월 18일) 정신의학화와 반정신의학에 대해 강의한다. “프로이트와 맑스는 끝이 없구나. 옛 노동조합 간부와 지식인들이 정치적 작업을 하고 있어.”(서신).

10월 29일, 언론인 헤르조그Herzog가 상파울로 경찰서 내에서 살해된다. 푸코는 대학에서 이 암살에 대한 문서를 읽고 학생들은 그것을 전단으로 만들어 배포한다. 파업이 일어난다. 푸코는 끊임없이 미행당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프랑스 외무부가 보호를 위해 미행하고 있음을 알려 온다. 뉴욕에 다시 가서 다시 한번 루즈벨트 호텔에 체류한다. “브라질 다음에 뉴욕이라니 견딜 수 없어.”(서신)

11월 19일, 컬럼비아 대학에서 «의학, 폭력 그리고 정신의학»에 대한 토론에 참가한다. “정신병동에 관해서는 부수적으로 이야기할 뿐이고 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이런 여담에 대해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새로운 고문의 테크놀로지 내에는, 이제는 고문의 의식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어떤 인물이 도입된 것입니다. 그 인물은 바로 의사입니다. 사실 모든 중요한 고문에는, 지금의 의사가 있고 그 역할은 첫째로 가장 효과적인 고문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 둘째로는 환자가 죽어 버릴 위험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 의료검진을 하는 것(10일 전 감옥에서 죽은 헤르조그는 충분히 감시당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환자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고문을 견딜 수 있도록 환자에게 기운을 차리게 하는 여러 가지 주사를 놓는 것입니다.”(실베르 로트링거Sylvère Lotringer와 존 라크만John Rachman이 작성한 텍스트)

콜레주 드 프랑스에, 롤랑 바르트를 위한 문학기호학 강좌의 창설을 제안한다.

12월, 잡지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에 파졸리니Pasolini의 영화 「살로」(Salo)(「소돔에서의 120일」)에 대한 인터뷰가 실린다. “제라르 뒤퐁Gérard Dupont이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이 인터뷰를 해 주면 자신은 500프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인터뷰를 해주었습니다. 그가 500프랑을 받을 수 있도록 아무 말이나 그냥 했습니다. …… 이것을 계기로 사드에 대한 저의 속마음을 마침내 이야기한 것입니다.”(클로드 모리악, 『어떤 분노』Une certain rage, Paris : Grasset, 1977를 볼 것)

12월 11일, 『감시와 처벌』의 서평으로 질 들뢰즈는 『지식의 고고학』과 이 책 사이에 있는 실천적 투쟁의 자리를 상기시킨다. «작가가 아닌 새로운 지도 제작자»(『크리티크』,  343호).

18일, 푸코는 군인 노조의 창립을 위한 집회에 참가한다.

1976
1월 7일, 해당 년도 첫번째 강연에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제목이 붙는다. 지나치게 많은 청중을 피하기 위해 강연 시작 시간을 아침 9시 30분으로 옮긴다. 푸코는 권력 메커니즘을 억압 메커니즘으로서 다루어 온 지난 5년간의 연구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고 선언한다. 권력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전쟁이라는 가설을 시험해 보겠다고 말한다.
파리에 도착한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 레오니트 플리우치Leonid Plioutch와 만난다. 수용소화된 소비에트 사회와 사회주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이 긴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언론인 K.S.카롤에 대해 푸코는 “이미 그렇게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라고 답한다.

1월 14일, 강연에서 푸코는 “지난 5년간의 강연을 규율에 할애해 왔습니다. 앞으로 5년간은 전쟁, 투쟁 등에 할애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생산함으로써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라고 논한다. 파스칼 파스키노Pasquale Pasquino와 알렉산드로 폰타나Alessandro Fontana는 이 두 회의 강연을 번역하고 그 번역은 이탈리아에서 논집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fisica del potere, 193호와 194호) 속에 수록된다. 당시 이것과 같은 제목으로 독일에서는 사법, 정신의학, 의학에 관한 이보다 이전에 쓰여진 텍스트가 간행되어 있었다(『권력의 미시물리학』Mikrophysik der Macht, Berlin : Merve Verlag).

2월 4일, 많은 지식인과 사회당 지도자가 서명한, 이란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침묵을 고발하는 선언에 찬동한다.

3월 29일, 몬트리올 대학에서 개최된, 감옥을 대신할 해결법에 대한 토론주간에서 강연한다. “감옥의 대안이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최초의 조심스러움, 최초의 의심 혹은 원하신다면, 최초의 환한 웃음으로 답해야겠죠.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사람들로, 그 이유들로 처벌받고 싶지 않다면,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전혀 처벌받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결국 우리가 처벌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실제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면?”(출판되지 않은, 타이핑된 원고). 푸코는 군대제도에 대한 책을 쓸 의도를 표명한다. 뉴욕에 들르는데, 클로드 모리악의 증언에 따르면 거기서 미국과 유럽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5월, 버클리와 스탠퍼드에서 강연한다.

6월, 알렉산드로 폰타나와 파스키노를 상대로 1968년 이전과 그 이후의 자신의 작업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긴 인터뷰를 한다. 이 인터뷰는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fisica del potere, Einaudi, 1977)에 수록된다.

7월, 벤담의 『판옵티콘』의 재판을 찍기 위해 미셸 페로, 장 피에르 발과 작업한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 1976~1977년도 휴가를 신청한다.

8월, 방되브르에서 『앎의 의지』 집필을 끝낸다. “봉인장에 관한 서문의 초안을 잡으려고 해. 몇 년 전부터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던 같은데, 막상 문을 열려고 하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걸 느끼는 거야 .” “나는 미국에서는 오펜하이머에서부터 촘스키에 이르는, 그리고 현재의 소련에서의 과학적 지식과 제도로부터 발생되는 문제제기를 연구하려고 다시 생각하고 있어.”(서신). 초대받은 워싱턴의 윌슨 센터에 체류하는 것을 고려한다.

11월 1일, 바히아Bahia 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한다. 권력의 사법적 이해, 맑스와 프로이트,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국가에 의한 성적 영역의 포위에 대해 비평한다. “모두가 내게 짙은 갈색 눈의 존속살해범[피에르 리비에르]에 대해 이야기해. 세계를 일주하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너무 기뻐.”(서신)

로베르토 마차도Roberto Machado와 함께 벨렘Belem과 헤시피Recife에 다시 체류한다. “갑자기 남미의 빈곤이 도회지에서 볼 수 있는 빈곤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빈곤이 몇 천 킬로미터에 걸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2월, 『성의 역사』 제1권 『앎의 의지』가 출판된다. 이 저작은 푸코에게 있어 날짜를 잡아야 하는 선언으로 생각되었다. 『감시와 처벌』에서와 같이 푸코는, 해방의 운동에 익숙한 억압가설을 비판함으로써 독자의 기대를 거스른다. 저작은 모두 여섯 권으로 이루어진 『성의 역사』에 대한 서문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작자는 그 후속권을 쓸 의도가 없다고 단언한다. 푸코는 글쓰기의 체제를 바꾸는 것을 생각한다. 기록자료들로 둘러싸인 얼마간은 익명적인 리비에르의 말이 푸코를 매료시킨다. 이러한 형식으로 『보건위생연감』 속에서 발견한 알렉시나 베Alexina B.의 사례에 대해 모은 자료로부터 출발하여 양성구유(兩性具有) 혹은 성의 결정의 문제를 연구하고 싶어 한다.

다른 한편으로 푸코는 1975년에 『피에르 리비에르』의 촬영을 위해 르네 알리오에 대한 20만 프랑의 가불을 갈리마르에 의뢰했었다. 갈리마르의 변호사는 이미 출판계약이 끝난 푸코에게 5년간의 독점계약에 사인하게 했다. 푸코는 거기서 다음 저작을 작은 판본으로 출판하고(그것이 『앎의 의지』였다), 이후 5년간은 책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푸코의 성찰의 위기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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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1월 15일, 조르주 랑브리크Georges Lambrichs의 잡지 『카이에 뒤 슈맹』(Les Cahier du chemin)에 구빈원에서부터 바스티유 감옥에 이르는, 감금의 사료군의 인류학의 서문 『불명예스러운 사람들의 삶』(La Vie des hommes infâmes)을 싣는다. “가장 하찮은 자들이 권력과 주고받는 짧고 날카로운 말들.”  이 계획은, 갈리마르로부터의 에르퀼린 바르벵Herculine Barbin의 기억을 출간하면서, 인류학에서 총서로 발전한다.

1월 24일, 『엑스프레스』지는 『앎의 의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진보적 사상의 선도자가 성의 해방과 성에 대한 모든 금지의 해제를 위한 투쟁의 한복판에서, ‘성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선언한다. …… 이 충격을 삼키고 소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질 들뢰즈는 『앎의 의지』가, 거의 같은 무렵 일어나게 되는, 자신이 논쟁한(『미뉘』Minuit, 24호, 1977년 5월) 새로운 철학자들을 둘러싼 사건보다도 푸코와 자신을 멀리 떨어뜨린다는 느낌을 가졌다. 들뢰즈가 느끼기에 푸코는 자기가 그의 분석에 반대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고, 더욱이 푸코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사실 『앎의 의지』에 대한 반응은, 지식인계에서보다는 페미니즘이나 게이 진영에서 열광적이었다. 이것이 그러한 운동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푸코를 더욱더 주의 깊게 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크 심Mark Seem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안티 오이디푸스』 영역본에 서문을 단다.
『감시와 처벌』의 번역과 함께 미국에서는 푸코의 저작에 대한 큰 관심이 일어난다. 도날드 부샤르Donald Bouchard가 편집한 미셸 푸코의 Language, Counter 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Cornell University Press)가 출판되는데, 이는 1962년부터 1972년 사이에 발표된 담론, 언어 및 문학에 관한 텍스트 선집이다.

2월 8일, 빅토르 파인버그Victor Fainberg와 잡지 『샹주』(Change)가 발기한 호소, 즉 레닌그라드 특수정신병원에 수용된 블라디미르 보리소프Vladimir Borissov의 해방을 요구하는 호소에 데이비드 쿠퍼David Cooper와 함께 서명한다.

3월, 모스크바에서 『말과 사물』의 번역이 출판된다. 이 번역은 곧 모든 소비에트 진영제국에서 반쯤 반체제적인 유통을 하게 된다. 이 나라들에서의 푸코 저작 수용은 그루지야의 철학자 메라브 마마르다슈빌리Merab Mamardashvili의 사상을 통해 준비되어 있었다.

23일, 활동가 피에르 오베르네의 살해자가 “인민자치를 위한 무장핵심”(N.A.A.P : Noyaux armés pour l’autonomie populaire)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테러리즘에 대한 논의를 재점화시킨다.

4월, 좌파가 지방선거에서 승리한다. 스스로 원하지 않았던 승리를 걱정한 프랑스 공산당은 «정부공동강령»(Programme commun de gouvernement)의 현실화를 요구한다.

잡지 『프랑스 혁명사 연감』(annales historiqu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이 감옥에 대한 일련의 역사연구논문을 게재한다. 권두에는 역사학자 자크 레오나르Jacques Leonard의 『감시와 처벌』 비판이 실린다. 이것이 푸코와 역사학자들이 논의하는 기회가 된다. 푸코는 이 비판에 «먼지와 눈» 속에서 답하게 된다.

5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위해 앙드레 글뤽스망의 『사상의 거장들』(Maîtres penseurs)의 서평을 쓴다. 일찍이 극좌파들은 차례로 맑스주의와 결별했다. 그들의 발행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1976년 6월 10일의 『누벨 리테레르』지에서의 특집으로 그들을 한데 엮어서 «누보 필로조프» (신철학자들,  nouveux philosophes)이라 부르고 이 호칭은 유행이 된다.

5월 12일, 형법개정 심의회는 푸코에 대해 성(性)에 관한 형법조항에 관한 의견을 구한다.

5월 19일, 푸코는 구틀라스Goutelas에서 재판관 조합 연수회에 참가한다. 이듬해(1978) 3월 총선에서 좌파가 정권을 잡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푸코는 로베르 바댕테Robert Badinter의 감수로 발행된 책 『자유, 복수의 자유』(Liberté, Libertés, Paris : Gallimard, 1976)에 표명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사회당이 판사 및 사법권에 사회통제 수단으로서 보다 큰 역할을 부여하려 하는 움직임을 비판한다.

6월 17~19일, 낭트의 사회당 대회에서 미셸 로카르Michel Rocard는 좌파의 두 정치문화를 구별한다. 하나는 자코적이고 국가적이며 공산당과의 동맹을 받아들이는 문화, 다른 하나는 탈중앙집권적이고 지역주의적이며 공산당과의 동맹을 거부하는 문화인데, 후자는 머잖아 «제2의 좌파»(deuxième gauche)라고 불리게 된다.

6월 21일, 소비에트의 반체제운동에 대한 반응이 프랑스에서 거세지고 있는 와중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jnev가 프랑스를 방문하고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환영을 받는다. 앙드레 글뤽스망과, 실명한 사르트르의 비서를 지내던 피에르 빅토르는 푸코에게 항의집회의 조직을 요청하고 그것이 레카미에Récamier 극장에서의 밤으로 이어지는데, 동유럽 반체제활동가들을 만나는 자리에 파리 시민들이 초청된다. 초대한 사람은 바르트, 부르세유, 피에르 데, 글뤽스망, 푸코, 자콥, 모리악, 사르트르와 슈발츠였다. 참가한 반체제 지식인은 레오니트 플리우치, 슈테른 박사,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 안드레이 시니아프스키, 안드레이 아말릭, 나탈리아 고르바니프카이아였다. 알렉산드르 갈리치Alexandre Galitch가 기타를 곁들여서 수용소에서 수용소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러시아어로 이야기한다.
솔제니친은 사르트르와 함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푸코는 아르메니아 영화감독 파라자노프Parajanov를 지원하는 거리시위와 플레이옐Pleyel 공회당 집회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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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dzhanov, 1924~1990)

7월 4일, 텔레비전 채널 TF1에서 모리스 클라벨Maurice Clavel에 대한 방송이 나간다. 베즐레Vézelay에 있는 클라벨의 집에는 필립 솔레르스와 푸코를 포함한 «신철학자»들이 재집결되어 있었다.

볼로냐에서의 격렬한 시위로 베를링거Berlinger가 «untorelli» 혹은 «흑사병 보균자»라고 형용한 이탈리아의 «자치파»(autonomes) 노동자의 탄압에 대해, 펠릭스 가타리와 28명의 프랑스 지식인이 호소하는 항의성명에 서명한다. 그러나 푸코는 그에 이어지는 항의행동에는, 테러리즘을 지지한다고 여겨지지 않기 위해 참가하지 않는다.

에우나우디Einaudi에서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fisica del potere)이 출판되고 브라질과 독일에서는 『권력의 장치』(Dispositive der Macht)라는 제목으로 번역된다. 이 정치 서적은 이탈리아에서는 «자치파», 독일에서는 «대안파»(alternatifs)라고 불리는 그룹 사이에서 폭넓게 유통되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푸코의 작업의 정치적 수용에 영향을 준다. 그 텍스트들은 호주에서는 『권력, 지식, 전략』(Power, Truth, Strategy, Sydney: Feral, 1979)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는 『권력, 지식』(Power/Knowledge, New York: Pantheon, 1980)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

8월, 방되브르에서 푸코는 교부(敎父)에 대해 쓴다. 불레즈의 초청으로 파트리스 셰로Patrice Chéreau가 연출하고 불레즈가 지휘하는 100주년 기념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Bayreuth에 간다.

9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 자주관리형 사회주의(socialisme autogestionnaire) 잡지 『페르』(Faire)가 조직한 좌파와 사회적 실천에 대한 «제2의 좌파» 포럼에 참가한다. 에드몽 메르Edmond Maire에 따르면, “«정부공동강령»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면 [사회당의] 적어도 지배적 문화의 멍에를 뒤흔드는 것”이 관건이었다.

9월 27일과 28일, 프랑스 공산당은 좌파연합과 절연한다. 이 절연은 위성국가들에 대한 영향을 겁내는 소련의 압력이 그 원인으로 해석된다.

9~10월,  이탈리아의 잡지 『아우토-아우토』(Aut-Aut)는 «들뢰즈와 푸코에게서의 정치비판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공산당의 철학자 마시모 카치아리Massimo Cacciari의 논문을 싣는다. 카치아리는 이탈리아의 극좌가 점점 더 원용하는 『감시와 처벌』, 그리고 들뢰즈의 『리좀』(rhizome)을 공격한다.

10월, 『텔 켈』의 운동이 프랑스 공산당, 더 나아가서는 마오주의자들과 가까워졌을 때에 분열되어 태어난 잡지 『샹주』와, 광기와 반체제운동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

10월 13일, 푸코의 두번째 일본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파리에서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와 함께 지식과 권력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

10월 24일, 26일, 클라크 정신의학협회에서 이루어진 «법과 정신의학»에 대한 토론토 심포지움에서 «19세기 법의학에서의 “위험한 개인” 개념의 변화»에 대해 발표한다. 이것은 1976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연을 요약한 것이다.

11월 16일, 안드레아스 바더Andreas Baader의 서독 적군파의 변호사인 클라우스 크로이산트Klaus Croissant이 프랑스에서 독일연방공화국으로 넘겨지게 되어, 테러리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다. 푸코는 이 신병인도의 조건에 대해 항의한다. 그는 상테Santé 형무소 앞에서 경찰에게 심하게 폭행당한다.

12월, 양심적 병역거부의 법제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군법재판에 관한 조사에 서문을 단다.
베를린에 체류한다. 서베를린에서부터 동베를린으로 들어간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저항운동과 회합을 갖는다. 감옥에 대한 토론을 한다. 푸코의 독역본이 발행된 철학 출판사 메르베Merve Verlag의 페터 겐테Peter Gente와 하이디 파리스Heidi Paris, 그리고 다니엘 드페르와 함께 연방경찰에 체포된다. 하이디 파리스가 당시 지명수배 중이던 서독 적군파의 투사 잉에 비에트Inge Viett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르크』 제70호 «머릿속의 위기»가 발행된다. 해당 호는 푸코 특집호로 예고되었었지만 푸코는 개인특집이라는 형식을 거부한다. 이 특집호에서 제기된 문제는, 푸코가 신철학자들에 의한, 현대의 전체주의를 계몽의 철학으로부터 이끌어 낸다는 사고방식을 보증하는지의 여부였다. 특집호는 좌파의 지배적 정치 이데올로기에서의 위기의 요소를 다루게 되었다. 『주거의 정치학: 1800~1850』(Politiques de l’habitat :1800~1850, Paris: Corda, 1977)이 출판된다. 이것은 1975년부터 1977년에 걸쳐서 푸코를 책임자로 하여 푸코의 강좌에 연계된 연구원들(장 마리 아이욤므Jean-Marid Alliaume, 블라딘 바레-크리겔Blandine Barret-Kriegel, 프랑수아 베귄François Béguin, 다니엘 랑시에르Danièle Rancière, 안느 탈라미Anne Thalamy)이 실현시킨 공동연구이다.

한 이란인 마오이스트 학생이 푸코에게, 이란의 종교도시에서 40일마다 일어날 사건에 주의하도록 알린다.

1 프랑스 시계 브랜드.
2 왕립 소금공장, 세계문화유산 77.
3 법안을 통과시킨 당시 보건장관 시몬 베유Simone Veil의 이름을 땀.
4 “지식인과 권력”, 『푸코의 맑스』, 갈무리에 실려 있다.

※ 4편은 내일 포스팅됩니다. 마지막 4편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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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7 09:00 2012/02/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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