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
1월 4일,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이 붙은 해당 년도 강의를 시작한다. 권력의 문제로 시작하지만 갑자기 푸코에게도 청강생들에도 새로운 «통치성»(gouvernementalié) 의 문제로 이행한다.

1월 9일, 19세기 초의 사법사상의 위기에 대한 공개 세미나와, 프랑수아 에발드가 조직하는 “안전사회의 계보학”에 대한 개별 세미나가 시작된다. 규칙에 따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은 공개되어야 하지만 푸코는 종종 몇몇 전문가들을 위한 세미나라는 틀 내에서 작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통치성과 자유주의 정치이성의 문제를 다루었던 2년간, 푸코의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연구원 그룹은 그의 연구실에서 모였다. 폴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Comment on écrit l’histoire, Paris: Seuil, 1978, pp. 345~385)에 실린 논문 “푸코는 역사학을 혁신한다”(Foucault révolutionne l’histoire)에서 전개된 벤느의 유명론적 명제가 분석된 것도 이 세미나에서였다. 푸코와 폴 벤느 간에 그리스 로마 시대에 대한 푸코의 새로운 관심을 둘러싸고 정기적인 의견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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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벤느, 1975년부터 1998년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 담당교수를 지냈다.

조르주 캉길렘의 『정상과 병리』 영역본에 서문을 단다. 이 책이 말하는 지적 윤리 개념과 개념철학이 푸코를 매료시킨다.

기독교의 육욕chair 개념을 다룬 『성의 역사』 2권을 작업한다. 당시에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발달하는 서구 기독교에서의 고백과 양심지도의 실천을 통한 육욕의 계보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초고는 완전히 폐기되게 된다. 국제적인 언론들에서 가장 좋은 경제·정치 분석기사들을 재간행하는 신문의 창간을 생각하고 이 기획을 위한 자금조달을 시도한다.

2월, 피에르 불레즈, 질 들뢰즈, 롤랑 바르트와 I.R.C.A.M.(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에서 음악적 시간에 대한 세미나를 한다.

2월 1일, 이날의 강의를 통치성의 역사에 대한 첫 강의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강의는 이탈리아에서 『아우토-아우토』지에 “통치성”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다.

3월 2일, 사회당의 주간지 『폴리티크-엡도』(Politique-Hebdo)는 3월 12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되는 총선에서의 투표의지에 대해 푸코에게 질문한다. 푸코는 선거에서의 선택에 대해 공적으로 발언할 필요는 없다고 답한다. 푸코에게 있어 그것은 권위적인 입장에 서는 것이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81년의 대통령 선거 때에도 같은 말을 했다. 선거로부터의 이러한 거리 두기는, 후에 푸코와 사회당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지식인의 침묵”에 대한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 된다. 같은 시기에 모리스 클라벨은 『르 코트디앙 드 파리』(Le Quotidien de Paris)에서 “68년 5월의 삶의 변화는 지나간 세기의 창백한 이데올로기로는 회복되지 않는다”라고 쓴다. 좌파는 총선에서 패배한다.

앙드레 글뤽스망, 카타리나 폰 뷜로우와 함께 새로운 전략을 찾는 대항주의 좌파의 “튀닉스”(Tunix)라 불리는 회합을 위해 베를린으로 간다. 렝Laing5과 쿠퍼Cooper의 옆자리를 배정받은 푸코는 반정신의학이 아닌 지식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노버에서는 대학에서 직무정지 당한 정치학자 페터 브뤼크너Peter Brückner를 옹호하는 집회에 참가한다

4월 2일~29일, 프랑스 대사관 문화 참사관 티에리 드 보세Thierry de Beaucé의 기획으로 일본에 두 번째로 체류한다. «성과 권력»에 대해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강연한다.

13일, 교토에서 기독교 신비사상과의 비교에 있어서의 선(禪)의 불교신비사상에 대해 토론한다. 푸코는 기독교 사목(司牧)권력에 대해 발표한다. 그는 수개월 전부터 이번 체류를 준비하면서 드미에빌르Demiéville, 헤리겔Herrigel, 와츠Watts,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등을 읽는다. 후쿠오카에서는 정신병원과 감옥을 방문하고 재판관과 정신과의사를 만난다. 17일에는 규슈 대학에서 일본과 프랑스의 정신병원과 감옥의 실천을 통해 분석되는 권력에 대해 토론한다. 첫 예수회 수도사가 도착했던 히라도를 여행한다.

20일, 도쿄대학에서 와타나베 모리아키와 『성의 역사』에 대한 세미나를 한다.

23일, 후지산 기슭 우에노하라의 선사에서 뮌헨 올림픽 유도 대표선수였던 승려의 지도로 좌선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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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요시모토 류메이(吉本隆明)와 맑스주의에 대해 토론한다. 요시모토와는 그 후에 맑스와 헤겔에 대한 서신을 교환한다.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일본 사회당 당수 아스카타 이치오(飛鳥田一雄)와 요코하마, 그르노블, 볼로냐의 시정 실험에 대해 토론한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와 회담한다.

26일, N.H.K. 텔레비전에서 프랑스 현대사상에 대해 인터뷰한다.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서양적인 이성의 역사와 한계입니다.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본이 서양적 이성과 대립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티에리 뵐첼Thierry Voeltzel의 『20년 후』(Vingt Ans et après)가 그라세(Grasset)에서 출판된다. “스무살 청년과 좀더 나이 든 친구가” 쾌락과 사회참여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이 좀더 나이 든 친구가 푸코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5월, 『아우토-아우토』지의 편집장 로바티Rovatti의 표현에 따르자면 «푸코 효과»(effeto Foucult)가 이탈리아 극좌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때에 『코리에레 델라 세라』지의 주주인 출판사 사주 리졸리Rozzoli가 푸코에게 시사문제에 대한 관점을 정기적으로 집필할 것을 요청한다. 푸코는 이 요청을 거절하지만 대신에 사상의 움직임에 대한 지식인 리포터 그룹 편성안을 시사한다.

5월 20일, 『프랑스 혁명역사연감』(Annales historiqu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에 게재된 자크 레오나르Jacques Léonard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논문을 보고 모리스 아귈롱Maurice Agulhon이 회장을 지내고 있는 프랑스 혁명역사학회가 푸코와 역사학자 간의 토론을 주최한다. 토론의 기록은 역사학자 모리스 아귈롱과 푸코의 후기를 더해 『불가능한 감옥』(L’Impossible Prison)으로 출판된다.

5월 27일, 프랑스 철학협회에서 강연한다. 이 강연은 『프랑스 철학협회보』(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에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1990년에 간행된다. 푸코를 초대한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에게 “이 강연의 제목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유일하게 어울리는 것이 «계몽이란 무엇인가?»(Was ist Aufklärung?)입니다”라고 말한다. 역사에 대한 칸트의 『소논집』(Opuscules), 특히 피오베타(Aubier, 1947) 판본은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읽게 되며, 죽기 직전까지도 함께하게 된다.

『에르퀼린 바르뱅, 일명 알렉시나 베』(Herculine Barbin, dite Alexina B)가 갈리마르의 «삶의 열전» 총서로 출판된다. 알렉시나 베의 양성구유 사례의 기록이다. 정신의학보고의 묘사를 실마리 삼아 올레롱 섬l’île d’Oléron에서부터 라 로셸르La Rochelle에 이르기까지 진짜 성을 결정하는 데에 관여하는 이 법의학의 실화의 장소와 기록을 푸코는 찾아냈다. 푸코는 비슷한 몇몇 사례를 출발점으로 하여 『성의 역사』 1권을 만들자고 생각한다. 이 전년에 알게 된 젊은 작가 에르베 기베르Hervé Guibert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한다. 당시에는 이자벨 아자니가 주인공 역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6월 17일,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파리 지국장 카발라리Cavallari가 푸코와 함께 사상적 르포기사 프로그램을 구상한다. 푸코는 수전 손택Suzan Sontag의 베트남, 알랭 핑켈크로트Alain Finkielkraut의 미국, 아르파드 아쥬토니Arpad Ajtony의 헝가리, 조르주 상프륑Jorge Semprun의 스페인, 등의 르포기사를 제안한다.

7~8월, 집 앞에서 차에 치여 수일간 보지라르 병원에 입원한다. 의식을 잃었지만 두부타박의 후유증으로 1년 가까이 두통에 시달린다. 그는 1980년, 사르트르의 장례식 때에 클로드 모리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이후로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차의 충격이 있고 보닛에 치였을 때,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죽는구나. 좋아. 저는 납득했습니다.”(클로드 모리악, 『움직이지 않는 시간』, 제11권).

8월, 아바단Abadan에서의 사건이 이란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부르는 가운데 리졸리는 사상적 탐방기사의 계획을 승인한다. 푸코는 이 시리즈에서 앞장서기로 한다. 그는 이란 연구를 시작한다.

9월 16일, 샤(shah)의 군대가 시위대에게 발포한, 자레 광장 학살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예정보다 빨리 테헤란에 도착한다. 푸코는 티에리 뵐첼과 함께, 그리고 카림 상쟈비Karim Sandjabi와 친한 이란인 관계자와 함께 이 여행을 준비한다. 푸코는 『리베라시옹』의 언론인 클레르 브리에르Claire Brière와 피에르 블랑셰Pierre Blanchet와 함께 분쟁이 가장 격렬한 지역으로 간다.

9월 20일, 종교적 수도 콤Qom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시아파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 아야톨라6 샤리아트 마다리Chariat Madari와 만난다. 샤리아트 마다리의 분석이, 푸코의 상황 이해에 영향을 끼친다. 인권옹호위원회 회장 메흐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7이 이 회담의 통역을 맡는다. 푸코는 거의 모든 정치세력의 대표들과 만난다. 이 시기 이라크에 망명해 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Khomeyni는 아직 서구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9월 24일, 파리로 돌아와 『코리에레 델라 세라』를 위한 첫 기사를 수편 집필한다. 일반적인 견해에 반하여 이슬람 봉기에 의해 붕괴된 샤의 군대에 정치적 결정력이 이미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파리에서는 호메이니가, 프랑스로 망명하기 직전인 이때에 바니 사드르Bani Sadr를 만나게 된다. 푸코는 호메이니와 전혀 만나지 않았다.

10월 16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코리에레 델라 세라』를 위한 르포기사 중 하나가 번역되어 실린다. 푸코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주체화에 대해 진행하던 고찰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정치적 영성»(spiritualité politique)이라는 표현이 좌파 쪽에서는, 젊은이를 제외한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이 결과로 수많은 공적이고 또 사적인 서신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르 몽드』에 게재된 1978년 9월 클로드 루아Claude Roy의 서신을 참조할 것)

11월, «보트피플»을 위한 호소문을 베르나르 쿠슈네르Bernard Kouchner(의사), 자크 브루아이옐Jacques Broyelle, 클로디 브루아이옐Claudie Broyelle, 알랭 제스마르Alain Geismar가 발표한다. 이 호소는 사르트르, 아롱, 몽탕, 시뇨레, 보부아르, 푸코, 로카르, 클라벨, 바르트, 이오네스코의 지지표명을 받는다. «보트피플» 지원활동은 지식인 좌파 사이에 새로운 분열을 가져온다.

푸코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을 체계적으로 다시 읽는다.

11월 9일, 푸코는 이란을 두번째로 방문한다. 푸코는 가능한 한 처음 방문했을 때 만났던 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의 입장 변화를 관찰하려 한다. 푸코가 말했던 관심사는, 오늘날 맑스주의 권역 바깥에서, 집단적 실존에 필수 불가결한 목표가 어떻게 성립되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석유정유소에서의 파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아바단을 여행한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기구의 밀사가 푸코에게, 호메이니와 동맹을 맺은 이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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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h) 반대 시위에 참여한 아이들의 모습.

11월 15일, 파리로 돌아와 이란 사건에 대한 마지막 기사를 쓴다.

11월 19일, 이탈리아 주간지 『에스프레소』가 부지불식 간에, 『아우토-아우토』지를 위한 기사의 일부를, 푸코와 이탈리아 공산당의 철학자 마시모 카치아리Massimo Cacciari, 그리고 그 외에 «수용소를 지지하는 자들» 간의 논쟁인 것처럼 게재한다. 이에 이탈리아 공산당 관계의 반론이 이어지고 푸코는 『우니타』(Unità)지에 보내는 편지로 그것에 종지부를 찍는다.

12월, 『우니타』의 언론인, 두치오 트롬바도리는 푸코에게 이탈리아의 맑스주의 지식인과의 토론을 제안하고, 10쪽 정도의 질문지를 보내온다. 이 질문지에 대한 답은 일련의 연속적 인터뷰를 통해 푸코의 지적 전기가 된다.

미국 철학협회가 워싱턴에서 푸코의 사유에 대한 모임을 기획한다. 주요 참석자는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 라이너 슐맨Reiner Schurmann, 휴 실버맨Hugh Silvermann, 피터 카우즈Peter Caws 등이었다.

1979
1월 7일, 푸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보편개념들을 역사의 분쇄기에 넣는 것이 아니라, 보편개념을 거부하는 어떤 사유의 실로 역사를 꿰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역사인가?”

고백의 역사는 푸코를 교부, 카시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등, 기독교 초기 대저작의 연구로 인도하기에 이른다. 점차로 『성의 역사』 2권, 『육욕의 고백』을 위한 새로운 제재(題材) 가 생겨난다. 기독교 초기 텍스트의 연구는 그의 계보학적 연구를 고대 말기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로 향하게 한다.

10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시작한다. 실제로는 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다루게 된다. «사상사에서의 방법론»이라고 이름 붙은 월요일의 세미나는 근대사회에서의 위험 관리 기술을 다루게 된다.

31일, 강의에서 “국가는 본질을 갖지 않습니다. 국가는 보편개념이 아닙니다. 국가는 그 자체로는 권력의 자율적 원천이 아니며, 국가는 끊임없는 국가화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닙니다”라고 표명한다.

2월 1일, 1978년 10월 이후 프랑스의 노플-르-샤토Neauphle-le-Château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호메이니가 이란으로 승리의 귀환을 한다. 바니 사드르는 푸코에게 함께 이란으로 다시 가자고 제안하지만 푸코는 거절한다.

3월 6일, 『르 마탱』(Le Matin)지에서는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이란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푸코를 비판한다.

3월 14일~15일, 『현대』(398호, 1979년 9월)가 주최한 이스라엘-팔레스틴 심포지엄에 자신의 집을 장소로 제공한다. 테러에 대한 위험 때문에, 사르트르는 은밀한 장소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3월 17일, 사병조직이 이란 신체제에 대한 반대파를 처형하기 시작한다.

3월 23일~24일, 디종Dijon 대학에서 “핵에너지와 에너지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이틀간의 연구회의에 참가한다. 토론에는 참가하지 않는다. 원자력 발전소 견학을 거부한다.

3월 24일, 클레르 브리에르와 피에르 블랑셰의 『이란: 신의 이름으로 혁명』(쇠이유)가 출판된다. 책은 푸코와의 대화로 끝난다. 그 안에서 푸코는 “이란 인민의 집단적 의지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 의지는 우리의 혁명도식을 통해서는 분절화되어 있지 않다”고 진술한다. 이 책은 여러 반응들을 불러일으키는데, 반발은 푸코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실제로 비판을 받은 주장의 대부분은 후기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의 본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푸코는 이것을 매우 신경쓰여 한다.

3월 26일, 페터 브뤼크너의 『국가의 적』 프랑스역본에 서문을 단다.

로날드 렝Ronald Laing에게, 가이아나에서 일어난 존스Jones 목사 종파8의 집단자살사건에 대한 사상적 르포기사를 제안한다. 이 종파는 소련에서의 활동을 생각하고 있었다.

4월 1일, 푸코는 프랑스에서의 최초의 동성애자 신문 『게 피에』Gai Pied의 창간호에 자살에 호의적인 기사를 게재하고 이 기사 때문에 『르 몽드』 및 여타 신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푸코는 이 잡지의 말장난스러운 제목9을 만든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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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피에』창간호

4월 14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메흐디 바자르간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싣는다. 이 서한에서 푸코는 이란체제의 폭정을 고발하고, 당시의 수상이자 자신도 테러리즘에 반대한다고 알려져 있던 메흐디 바자르간에게 방향 전환을 촉구한다.

4월 22일, 베즐레 에서 모리스 클라벨 사망.

6월 비동 섬Poulo Bidong의 먼 바다에서 “빛의 섬”l’île-de-Lumière이라는 이름의 배를 병원으로 바꾼 베르나르 쿠슈네르, 그리고 앙드레 글뤽스망과 함께 유럽, 특히 프랑스로 오는 보트피플 수용 증대를 위해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사르트르와 아롱도 기자회견에 동석한다.

8월 17일, 일본의 주간지 『주간 포스트』의 “세계의 V.I.P” 인터뷰에서, “난민 문제는 21세기 대이동의 전조다”라고 표명한다.

10월 10~16일, 스탠퍼드 대학의 태너 기념강의(Tanners Lectures)의 교수로서 “전체적임과 동시에 개별적으로” (Omnes et singulatim) 라는 제목으로 통치성에 대한 작업을 종합적으로 요약한다.

“사물의 질서에 대하여, 미셸 푸코와 하이데거에 대한 해석”이라는 저작을 계획 중이었던 허버트 드레이퓌스Hubert Dreyfus와 폴 라비노Paul Rabinow와 공동작업을 상의한다.

10월 19일, 새크라멘토 대학에서 강의한다.

1980
1월, 1978년 5월 4일, 푸코의 친한 친구 라울 퀴리엘Raoul Curiel의 형이자 공산당 활동가인 앙리 퀴리엘Henri Curiel이 살해된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모든 기사를 쓴 G. 쉬페르Suffert를 고발하는 서명에 찬동한다.

성찰의 방향을 «진실 말하기»로 바꾼 «생명존재들의 통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세미나 쪽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푸코는 이듬해 세미나에서 19세기 말의 허무주의를 다루겠다고 생각한다.

1월 24일, 폴란드의 universités volantes를 옹호하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게재된 성명에 서명한다.

2월, 『르 몽드』에 익명을 희망하며 인터뷰한다. 푸코는 이 인터뷰에 «복면 철학자»로 등장한다. 사르트르는 병상에 누웠고 푸코는 점점 더 대(大) 지식인의 역할을 요구받게 된다. 푸코는 이를 기피한다. 표면에 나오지 않으려는 이러한 의지는 지식인의 침묵에 관한 앞으로의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 된다.

3월 26일, 롤랑 바르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4월 19일, 장-폴 사르트르의 장례식. 푸코는 브루세Broussais의 병원에서부터 몽파르나스의 묘지로 이어지는 거대한 장례행렬에 참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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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묘비

5월, 변호사 크리스티앙 르봉Christian Revon과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ès와 함께 «자유변호»(defense libre)라 불리는 운동을 위해 강령을 준비한다. 그 중 제2조는 “내가 자기를 변호할 자격이 있는 것은 법률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가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나를 변호하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나의 권리를 가지며 법률은 나를 수호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변호의 역동성이야말로 법률과 권리에, 우리에게 필요 불가결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리는 그것을 발동시키는 변호 속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변호만이, 유효하게 법률에 함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제3조는 “ ‘자기변호하다’(se défendre)라는 표현에서, 재귀대명사 ‘se’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삶·실존·주체성·개인의 현실 그 자체를 법의 실천 속에 기입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자기변호하다’라는 것은 자기방어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기방어는 스스로 정의가 된다는 것, 즉 어떤 권력의 심급으로 자기동일화하여 자신의 판단에 그 활동들을 연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변호한다는 것은 그와는 반대로 권력의 여러 심급의 게임을 거부하고 그 심급들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법률을 행사하는 것이다 . ”(『자유변호를 위하여』, 1980년 5월 23~26일의 라 상트-봄므La Sainte-Baume에서의 자유변호 대회 준비를 위한 『악트』(Act)지 제24~25호 부록) 크리스티앙 르봉에 따르면 푸코가 이 텍스트를 썼다고 한다.

7월, 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을 위해 방되브르-드-푸아투 근처의 브뤼Verrue에 옛 수도회 건물을 구입한다.

8월, 바이로이트에서 셰로와 불레즈의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적인 마지막 공연을 감상한다.영어로는 최초로 푸코에 대한 긴 연구서인 알랭 셰리단Alan Sheridan의 『진실에의 의지』(The Will to Truth, London: Tavistock)가 출판된다.

9월, 『권력/지식』(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Brighton: The Harvester Press)이 출판되고 영국의 잡지 『이데올로기와 의식』(Ideology and Consciousness)의 책임자 중 한 명인 콜린 고든Colin Gordon의 편집과 해설이 첨부된다.

10월 20일~21일, 버클리의 화이슨 기념강의 위원회에 의한 «진실과 주체성»에 대한 두 강의를 위해 초대된다. 푸코가 기독교 고백제도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기 위해 휠러 홀Wheeler Hall에는 800명 정도가 밀려들었고 미처 들어오지 못한 700명은 밖에서 항의집회를 연다.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버클리 캠퍼스에 경찰이 들어온다.(『데일리 캘리포니아』지, 1980년 11월 1일자) «고대 말기와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의 성윤리»에 대한 세미나를 지도한다. 강연 대부분을 직접 영어로 쓴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린(1981년 3월 15일자, p.14.) 도널드 부샤르, 콜린 고든, 알랭 셰리단이 푸코에 관해 쓴 저작에 대한 서평에서 레오 베르사니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1,000명이 넘는 버클리의 청중들이 세네카에서부터 최초의 교부들에 이르는 자기 해석 상에서의 전략 변화에 대한 푸코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활기찬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대의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면밀한 독서 속에서 젊은 청중들은, 극도로 박식한 희생양이 자기 자신 위에 아마도 기형화된 우리 자아에 대한 폭군적 지식을 짊어지고, 새로운 쾌락의 경제를 위해 그러한 자아에서 아마도 성을 제거하는 그러한 작업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11월, 뉴욕에 체류한다. 제임스 기념강의의 틀 내에서 뉴욕 대학의 인문학 연구소에서 리처드 세네트Richard Sennett와 함께 영어로 세미나를 지도한다. 이 세미나는 『성과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그 일부가 출판되어 있다.

11월 16일, 엘렌느 알튀세르의 죽음을 알게 된다. 푸코는 마지막까지 알튀세르가 있는 정신병원과 그의 집으로 문안간다.

17일, 24일, 다트머스Dartmouth 컬리지에서 «주체성과 진실»(Subjectivity and Truth), «기독교와 고백»(Christianity and Confession)에 대해 강의한다.

한나 아렌트의 제자, 마이클 데니Michael Denneny와 몇몇 토론을 한다. 푸코는 미국의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생겨나고 있는 어떤 변화를 목격한다. 우정이라는 주제가 성적 해방이라는 주제보다도 우위에 서고 있었다. 강연 마지막에 청중들에게,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서의 게이 살해 이후의 시위에 함께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마크 브라시아스의 초대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The Birth of Bio-politics)에 대해 강연한다.

12월, 이번 년도에는 자신의 저작의 직접적 제재(題材)에 관한 두 시간짜리 강연을 하기로 하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세미나를 폐지하기로 결정한다.

1981
1월 7일, «주체성과 진실»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자기통치의 여러 양태로서의 자기 테크놀로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사유체계의 역사 강의의 일환으로 프랑수아 에발드를 부책임자로 법의 사회학의 월례 세미나가 열린다. 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어 했던 푸코는 이듬해 1982~1983년도에 행해진 법철학 세미나에 참가한다.

3~4월,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을 뽑자는 뒤늦은 탄원서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지식인은 선거에 대한 의식을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언제나와 같은 원칙을 재확인한다.

5월 4일~25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상파울루 대학의 페르디난도 헨리크 카르도소Perdinando Henrique Cardoso를 «제3세계에서의 새로운 사회 출현»에 대한 강의를 위해 초대한다.

5월 10일, 대통령 선거의 밤, 라비노의 가족들과 함께 바스티유 광장의 군중에 합류한다. 의견들을 정리하는 언론인들에 대한 모든 표명을 거부한다. 철학 수업에서 그의 텍스트를 읽고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이야기하는 여고생에게 웃으면서 “그것은 자본주의의 비참이었조, 이제 사회주의 아래에서 그런 건 다 끝났습니다 !”라고 약속한다. 루뱅 가톨릭 대학의 프랑키(Franqui) 수업에서 «나쁘게 행동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 사법에서의 고백의 기능»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번의 강연을 한다. «사회방어»의 탄생에 대한 세미나를 지도한다. 이 기회에 비디오를 통한 긴 자전적 인터뷰가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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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프랑스 대선 투표에서 당시 대통령인 지스카르 데스탱과 좌파의 단일후보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결했다. 미테랑은 51.82%의 득표로 승리했다. 미테랑의 집권은 프랑스 제5공화국 최초의 정권교체이자, 좌파의 집권이었다고 한다.

5월 31일, 푸코는 『리베라시옹』에서 사회당 승리에 있어 극좌의 역할을 강조한다. 의료나 정신병원, 감옥 등의 조직과 같은 몇몇 기획에서 사회당과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6월, 제네바에서 베르나르 쿠슈네르와 이브 몽탕과 함께 « 보트피플을 옹호하고 해적행위에 반대하는 국제위원회 »의 창설에 참가한다. 푸코는 «피통치자들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국제정치에 개입할 권리를 지지한다.

6월 23일, 공산당이 장관으로 내각에 들어간다(푸코는 이에 반대한다).

9월 30일, 프랑스의 사형제도가 폐지된다.

10~11월, 마크 포스터가 로스엔젤레스의 데이비드슨 컨퍼런스 센터의 심포지움 «지식, 권력, 역사 : 미셀 푸코의 작업에 대한 학제적 접근»(10월 26일~11월 16일)에 푸코를 초대한다.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호메이니를 프랑스 내에 숨겨 주는 것에 푸코가 관여했다고 생각해서 입국비자 발급에 어려움을 겪는다. 심포지엄에서는 특히 레오 로벤탈Leo Lowenthal이나 마틴 제이Martin Jay 등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신봉자들과 만난다.(윌리엄 해크먼William Hackman, 「푸코 컨퍼런스」“The Foucault Conference”, 『텔로스』Telos, 51호, 1982.)

『타임 매거진』은 이 기회에 «프랑스의 권력의 철학자»에 대한 탐방기사를 싣는다(46호, 1981년 11월 16일). 이 호에서 푸코는 “제가 흥미 있어 하는 것은 권력보다는 오히려 주체성의 역사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버클리에 체류한다. 상설 세미나로서, 푸코 하버마스 세미나의 개설을 제안 받는다. 하버마스는 세미나에서의 자기 부분을 «모더니티»라고 이름짓고 싶어 한다. 그의 포스트모던 비판은 독일 및 미국에서의 푸코 수용 방향에 기여한다.

12월 14일,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 클로드 셰송Claude Cheysson이 야루젤스키Jaruzelski 대령이 포고한 군사사태령은 폴란드의 내정문제이며 프랑스는 분명하게 개입하지 않는다고 표명한 것에 대해, 피에르 부르디외와 미셸 푸코는 항의하자고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프랑스 정부는 모스크바나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의 군사독재체제 수립이 폴란드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내정문제라고 믿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주장은 비도덕적이고 거짓으로 가득 찬 것이다. …… 프랑스 공산당과 협조하는 것이, 군홧발에 노동자운동이 압살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인가? 1936년 사회당 정부는 스페인에서의 군사 쿠데타에 직면했었다. 1956년에도 사회당 정부는 헝가리의 탄압에 직면했었다. 그리고 1981년, 사회당 정부는 바르샤바 쿠데타에 직면하고 있다. …… 우리는 사회당 정부에게, 그들이 Realpolitik에 대한 국제적 도덕의 의무를 우선시할 것을 약속했었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 이 항의문은 «한 획을 그었다»(『르 몽드』, 1938년 7월 27일). 그리고 수백 명의 지식인들의 찬동을 얻는다.

12월 23일, «프랑스 노동연합»(CFDT)은 그 지식인들에게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10 정신에 입각한 공동의 호소를 제안한다. 『르 몽드』 사장 자크 포베Jacques Fauvet는 «81년 5월을 수용하지 않았던 이 ‘좌파 지식인’»을 격렬하게 비난한다. 사회당 서기장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은 라디오에서 성명의 발기인들을 공격한다. 문화부 장관 자크 랑Jack Lang은 «공산당 각료의 완벽한 충성을 지식인들의 전형적으로 구조주의적인 무책임»과 비교한다(『리베라시옹』, 1981년 12월 23일자).

프랑스노동연합(CFDT)은 폴란드인 지원 위원회를 설치한다. 푸코는 솔리다르노시치 행동조정위원회의 망명한 멤버 두 명 및 일본노동조합총평11 파리 지국의 일본 대표와 함께 수개월에 걸쳐 회계와 지원자금 사용을 담당한다. “나는 그의 귀중한 시간을 무리하게 낭비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테면 우리의 감사위원회 멤버였다. 나는 숫자로 가득찬 그의 회계보고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스베린 블룸슈차인Seweryn Blumsztajin, 프랑스의 솔리다르노시치 위원회 책임자).

영화감독 베르너 슈뢰터Werner Schroeter와 알게 된다. 푸코는 그에게 “나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변화시키는 사람과, 자신의 삶에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1982
1월 6일, «주체의 해석학»에 대한 강연을 시작한다.

4~5월, 프라하에서의 자크 데리다 체포에 항의한다. 데리다의 석방을 계기로 두 철학자는 화해한다. 푸코는 정기적으로 소련의 전문가 알렉산드르 아들러Alexandre Adler와 만난다. 그가 강력하게 번역을 추천했던, 동성애 역사에 관한 케네스 도버Kenneth Dover와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의 저작 출판을 선전하기 위해 여러 곳의 인터뷰에 응한다.

18일, 그르노블 대학 철학과에서 친구인 앙드레-장 페스튀지에르André-Jean Festugière가 새로이 번역한, 아르데미도로스의 『꿈의 열쇠』에 대해 강연한다. 이 강연은 『자기에의 배려』의 제1장이 된다.

제라르 롤레Gérard Raulet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하버마스의 배판에 답한다.

5~6월, 존 설John Searle, 움베르트 에코, 토머스 세복Thomas Sebeok 등과 함께 토론토 대학에서의 “The Third International Summer Institute for Semiotic and Structural Studies”(5월 31일~6월 26일)에 참가하여 “자기자신에게 진실 말하기”에 대한 세미나를 주재한다. 그는 정신적 변형이라는 각도에서 고백의 규칙을 검토한다. 세네카의 『영혼의 평정에 대하여』(De tranquillitate animi), 카시아누스의 『회수도승 제도집』(De instituitis cœnobiorum),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es)을 분석한다. “고대 문화에서의 자기배려”에 대해 강연한다. 이 이후 푸코는 정기적으로 스토아 학파에 대한 작업을 한다. 캐나다의 잡지 Body Politic을 위한 인터뷰에서, 어떤 점에서 “자신의 성의 정치학이 해방의 운동과는 다른지”를 설명한다.

6월, 콜레주 드 프랑스를 사임하고 버클리에서 제안받은 상설 세미나와 저작권료로 생활을 꾸려 나갈 것을 생각한다.

7월, 만성 비염에 시달린다.

8월 9일, 파리 로제 거리의 유대인 레스토랑 골든베르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푸코는 이 이후 테러리즘에 저항하는 표시로 가능한 한 이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28일,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은 국제 테러조직의 대규모 검거를 발표한다. 이는 엘리제궁의 테러리스트 대비조직이 뱅센에서 세 명의 아일랜드인을 체포한 것을 말하는데, 푸코는 이 체포의 부당한 상황을 신문에서 지적한다. 사건의 진상은 1985년에 완전히 폭로되는데, 이것이 이 새로운 정부의 첫번째 실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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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궁(Palais de l'Elysees)은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이다.

9월 14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시몬 드 보부아르, 피에르 비달-나케Pierre Vidal-Naquet 등과 함께 푸코를 엘리제궁으로 초대한다. 푸코가 미테랑에게 레바논에 대해 질문하자 대통령은 “아, 이런 제길”이라고 답한다. 그날 저녁 푸코는 제마옐Gemayel12 대통령 당선자가 암살당한 것을 알게 된다.

9월 22일, 시몬 시뇨레, 그리고 인도주의 단체인 “세계의사회” (Médicins du monde)13의 의사들인 베르나르 쿠슈네르, 자크 르바, 장 피에르 모베르와 함께 약과 허가된 물자의 마지막 트럭 호송을 위해 폴란드로 간다. 라이트밴을 타고 3,000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그들은 번갈아 가며 운전한다. 다섯 명은 아우슈비츠를 방문한다. 그들은 바웬사Walesa와의 회견을 허락받지 못했다. 귀국 후에 시몬 시뇨레와 푸코는 텔레비전에서 증언한다.

10월, 『가족의 무질서: 바스티유 기록문서의 봉인장』(갈리마르/쇠이유, “아카이브” 총서), 역사학자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와 푸코가 공동편집하고 글쓴이를 개별화하지 않은 공동집필 형식의 책이 출판된다.

10~11월, 벌링턴Burlington의 버몬트 대학 종교학과에서 «자기 테크놀로지»(The Technology of the self)에 대한 세미나(10월 15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지도한다. 이 세미나의 내용이 푸코의 검토 없이 출판되려고 한다. 푸코는 이 세미나를 위해 모아 놓은 자료를 자기 기술에 대한 저작으로 출판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는 세이유에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라는 제목의 책을 제안한다.

1983
1월,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라는 제목으로 파레시아라는 고대 문화에서의 진실 말하기의 개념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이 문제에 푸코는 실제로 2년을 할애한다.

2월, 쇠이유에서 “작업”(Des travaux) 총서가 푸코, 폴 벤느, 프랑수아 발을 책임자로 하여 발족한다. 일반인을 타깃으로 한 출판의 미디어화된 유통 경로에서 벗어난, 대학에서의 연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푸코의 오래된 기획이었다. 그는 이 총서의 일환으로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를 출판하려고 생각한다. 『자기통치와 타자의 통치』는 윤리와 정치학의 분절화를 둘러싸고, «알키비아데스 혹은 자기와 정치적 삶의 개념», «에픽테토스, 경청, 글쓰기», «자기와 타자의 실천» 등, 여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월, 푸코가 『쾌락의 활용』이라고 이름 붙인 『성의 역사』 제2권의 두꺼운 초고는 당시 4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1부 : 쾌락의 활용, 이 1부는 다시 거대한 두 장으로 나뉜다. ①개념과 원리, ②하나의 예, 꿈의 열쇠,  2부 : 절제의 실천들,  3부 : 자기수양, 4부 : 엄격성의 요청들, 이 부분은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진다. ①신체, ②배우자, ③소년들.

3월 7일~22일, 폴 벤느는 하버마스를 콜레주 드 프랑스 연속강연을 위해 초대한다. 하버마스와 푸코는 몇 번이나 만난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지적 이력을 이야기하고 긴 시간 동안 니체에 대해 토론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에 대해 문의한다.

마이클 클라크Michael ClarkMichel Foucault, an Annoted Bibliography(New York&London: Garland Publishing, 1983), 3,000개 가까운 표제어가 포함된, 푸코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인 서지가 출판된다.

로젠츠바이크Rosenzveig를 읽고 실망했다고 한다. 베르나르 쿠슈네르에게, 글쓰기와 도서관에서의 작업을 관둘 예정이라고 털어놓는다. 쿠슈네르는 «세계의사회»와 함께 출발할 것을 권하면서 다음 번 «베트남으로 가는 배»의 책임자가 될 것을 제안한다.

4월, 그랑 팔레에서의 마네 전시회를 방문하고 로제 스테판과 전람회 직원 프랑수아즈 카솅에게, 마네에 대한 두꺼운 초고를 보존해 놓았다고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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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월, 버클리의 연구지도교수(Regent lecturer)를 한다. 자기기술과 자기 글쓰기에 대해 강연한다. 폴 라비노, 허버트 드레이퓌스, 찰스 테일러, 마틴 제이, 리처드 로티,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지막 대표자 레오 레벤탈과 함께 자신의 작업의 현재에 대한 여러 토론을 녹음한다. 그 토론은 부분적으로 드레이퍼스와 라비노의 『미셸 푸코, 철학적 궤적』(갈리마르, 1984)에 수록되어 있다.

5월, 『르 데바』지에 조합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 대한, 푸코와 에드몽 메르의 대담이 게재된다(no. 334). 푸코는 프랑스 노동민주동맹(C.F.D.T.) 내부자료를 읽고, 시몬 노라Simon Nora,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 여러 경제학자들과 이야기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질문을 준비한다. 이는 『프랑스 노동조합연합을 묻다』(갈리마르, 1984)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는 일련의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푸코는 사회보장체계 및 보건정책에 대해서, 조합운동가와의 공동의 고찰을 계속한다. 그는 “차라리 죽음-사라짐에 의미와 아름다움을 부여하려고 해봅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7월, 정부의 신임 대변인인 막스 갈로Max Gallo가 정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염려를 푸코에게 드러낸다. 갈로는 푸코와 대통령의 회견을 희망한다. 푸코는 “그건 사회당의 역할이겠죠”라고 답한다.

7월 26일, 막스 갈로는 폴란드 사건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지식인들을, 사회당 쪽으로 다시 불러 모으려고 『르 몽드』에 «지식인, 정치, 그리고 모더니티»라는 제목의 논고를 게재한다.

27일, 『르 몽드』는 «좌파지식인의 침묵»에 관한 조사를 시작한다. 푸코는 애초부터 이 조사에 답하지 않겠다고 『르 몽드』에 통고한다. 폴란드의 군사정권 수립 이후로 프랑스 노동조합연합과 진행하던 활동도 있고 하여, 자신이 침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8월 중순까지 이 화제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특히 푸코의 거리 두기(『헤럴드 트리뷴』지에 따르면 핵심사례), 그의 침묵, 그의 미국 체류가 강조되고 1981년에 미국 대사관 문화당담고문 자리를 거절했던 것까지 폭로되었다(푸코 자신은 그 제안을, 호의라기보다는 반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푸코는 1984년까지 공적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타르니에»(Académie Tarnier)가 탄생한다. 베르나르 쿠슈네르, 앙드레 글뤽스망, 이브 몽탕과 그 외의 친구들 그룹은 푸코와 타르니에 병원 강당에서 집회를 갖고, 새로운 방식으로 국제정치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시도를 시작한다.

푸코는 사회당 정치에 대한 백서를 제안한다. 그는 “사회당에는 통치라는 문제계가 있는가? 아니면 그들은 국가의 문제계만을 갖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 가을에 푸코는 버클리의 학생들에게 1930년부터의 통치성의 역사를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조레스Jaurès, 블룸Blum, 미테랑Mitterrand의 저작들을 읽는다.

8월, 『쾌락의 활용』의 구성이 두 권으로 분할된다. 서문도 다시 쓴다.

9월, 『쾌락의 활용』 집필을 끝냈다고 생각하고 그라나다에서부터 코르도바까지,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한다.

10월~11월, 다시 버클리에 초대된다. 여섯 번의 강연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으로 시작되는 고대의 민주제도 위기를 통해 파레시아의 역사를 소묘한다. 볼더Boulder와 산타크루즈Santa Cruz에서 두 번 강연한다. 매우 지치고 야위어서 귀국한다.

프로이트주의 잡지 『안느』(L’Âne)에서 『감시와 처벌』에 대해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로베르 바댕테가 쓴, 게오르그 루셰Georg Rusche와 오토 키슈하이머Otto Kischheimer에서 영감을 받은 해석이 실린다. 푸코는 이에 항의한다. 이때 시작된 둘의 관계는 이윽고 푸코가 프랑수아 에발드를 책임자로 하여 함께 작업하는 연구자의 거점이 되기를 바랐던 법철학 연구 센터 구상으로 점차 구체화되어 간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의 휴강을 생각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킬까 봐 염려한다. 마르탱 치글러Martin Ziegler와 함께,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죽어 가는 자들의 고독』(Die Einsamkeit des Sterbendes)의 번역을 계획한다.

12월 29일, 푸코를 진료한 의사 장 폴 에스코드Jean-Paul Escaude가 허파에 대한 정밀검사를 권한다.

1984
1월, 항생제 치료로 기력을 회복한다. 푸코는 모리스 팽게에게 “저는 에이즈에 걸린 줄 알았는데, 강력한 치료 덕분에 기운을 차렸습니다”라고 서신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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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월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푸코의 모습.

2월, 다시 피곤해졌지만, 파레시아에 대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연을 재개한다. 3월 말까지 『성의 역사』 2권의 교정을 본다.

3월, 1930년대의 통치성 변화에 대해서 푸코가 함께 연구를 진행하려 했던 버클리 학생 모임에서, 키스 갠덜Keith Gandall, 데이비드 혼David Horn, 스티븐 코트킨Stephen Kotkin이 작성한 계획서를 송부한다. 그들은 어떻게 서양사회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사회생활의 프로그램, 새로운 경제계획, 새로운 정치조직을 재구축했는지를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 이성의 출현에 관한 다섯 가지 연구를 제창한다. 요컨대 미국에서의 복지국가(Welfare State)와 진보주의,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과 여가조직, 프랑스에서의 복지국가(État-providence)와 식민지에서의 도시실험,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바우하우스 건설과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타르니에Tarnier 병원에서 푸코는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의사들은 그의 유일한 질문이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요?”였다고 생각했다. 푸코 쪽에서 진단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1978년,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에 관해 푸코는 “환자가 자기자신의 죽음과의 은밀한 관계의 주인으로 남기 위해 받아들이는, 앎과 침묵의 놀이”에 대해 말했었다.

3월 10일, 『성의 역사』의 교정을 보는 한편, 클로드 모리악과 함께 원조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에 의해 주거지로부터 쫓겨난 말리인 및 세네갈인 노동자 대표들과 만난다. 그들을 위해 몇 통이나 편지를 쓴다.

4월, 카프카의 일기를 다시 읽고 『육욕의 고백』의 초고 집필을 재개한다. 파레시아에 대한 마지막 강연을 할 때 푸코는 자신의 분석에서 변경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자크 라그랑주는 “너무 늦었어”라는 푸념을 듣는다.

4월 6일, 자택에서 시인 브라이옹 기쟁Brion Gysin을 데리고 방문한 윌리암 버로스William Burroughs를 맞아 파티를 한다. 이것이 마지막 파티가 된다.

5월, 『성의 역사』 제2권 및 제3권의 출판을 기회 삼아 『마가쟁 리테레르』는 푸코 특집호를 간행한다. 푸코는 «지식인의 침묵»에 대해 발언한다.

5월 14일, 『쾌락의 활용』이 출판된다. 『형이상학과 도덕 리뷰』의 조르주 캉길렘 특집호에 논문을 보낸다. 오리지널 텍스트를 약속했지만 1978년에 『정상과 병리』의 영어판을 위해 써 놓은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 텍스트에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문체상의 결함이 있다면 주저 말고 수정해 주세요.”(출판사에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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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자택에서 질 들뢰즈와 친한 젊은 철학자 앙드레 스칼라André Scala의 인터뷰에 응한다. 푸코는 매우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있어 하이데거 독해가 갖는 중요성을 처음으로 이야기한다. 이 인터뷰를 스스로 수정할 수가 없어서 다니엘 드페르에게 최종 편집을 맡긴다.

6월 3일, 푸코는 발작을 일으키고 동생인 드니가 집에서 가까운 생 미셸 병원에 입원시킨다.

6월 9일,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샤르코가 일했던 오래된 건물이 내려다 보이는 신경과로 옮겨진다.

6월 10일, 집중치료실에 들어간다.

6월 20일, 잠시 기운을 차린 동안에, 그 사이 출판된 『성의 역사』 3권, 『자기에의 배려』 증정본을 받는다.

6월 25일 13시 15분, 미셸 푸코 사망.

6월 29일,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짧은 이별의 의식을 치른 뒤, 시신은 방되브르-뒤-푸아투로 옮겨져 가까운 친지와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된다.

뿌리 깊은 전설과는 반대로, 또 사인(死因)을 공표하지 않는 프랑스의 의학적 관행에도 반하여,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임상적으로 에이즈를 기술하는 공식성명이 카스테뉴Castaigne 교수와 소론Sauron 박사에 의해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미셸 푸코 씨는 1984년 6월 9일, 악성 패혈증을 일으키는 신경학적 징후에 관해 필요한 추가검사를 위해 입원했다. 검사는 뇌의 화농소(化膿巢)를 밝혀냈다. …… 병세의 급격한 악화가 유효한 치료의 모든 희망을 앗아 갔고 6월 25일 13시 15분에 사망에 이르렀다.”

미셀 푸코는 1982년 9월, 폴란드로 출발하기 전에 «만약의 경우에» 개봉하도록 유서를 써서 남겨 놓았다. 그 유서의 세 가지 지시 중 두번째에는 «불구보다는 죽음을», 그리고 «사후출판을 하지 말 것»이라고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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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있는 미쉘 푸코 스퀘어.

5 반정신 의학의 대표적 제창자.
6 회교 시아파의 고위성직자의 존칭.
7 나중에 수상이 되며 프랑스로 망명 후 암살된다.
8 인민 사원.
9 “Gai Pied”의 “gai”는 “동성애”라는 뜻 이전에 “즐거운, 명랑한, 밝은, 쾌활한” 등을 뜻하는 단어이고 “pied”는 “발” 또는 “발걸음”이라는 뜻 이외에도 구어에서 “쾌락”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명랑한 발걸음, 명랑한 쾌락, 동성애적 발걸음, 동성애적 쾌락 등 다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Gai Pied”와 완전히 발음이 같은 “guêpier”는 딱새, 말벌의 벌집, 말벌떼 등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 위기, 곤경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10 1980년 폴란드에서 벌어진 자유노조운동. “연대”라는 뜻으로 폴란드 민주화의 원동력.
11 1950년 일본에서 결성된 전국적 노동조합체,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준말.
12 바시르 제마옐. 1982년 8월 레바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레바논 이슬람교도들은 그가 종파간의 폭력사태에 깊이 관련된 점을 들어 그의 대통령 선출을 강력히 반대했고, 그는 취임 10일 전 폭탄으로 암살당했다.
13 “국경 없는 의사회”와의 불화로 인해 분화된 단체로, 79년 베르나르 쿠슈네르가 설립.

2012/02/28 09:00 2012/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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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dameq

    Tracked from dameq 2014/12/12 01:12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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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oshima 2012/02/28 10:46

    오트르망 전혜리님 완전 감사, 정말 수고했습니다(좋은 말).
    저도 나중에 좀 살펴보고 수정할 부분이나 등등이 있으면 알려드릴께요(무서운 말...).

    • 그린비 2012/02/28 10:53

      아하하! 무서운 말은 정말 무서운데요~ ^^;;
      감사합니다~!

  2. 홍위묘 2012/03/04 04:29

    "푸코의 활동들" 포스팅을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푸코의 삶의 편린들을 흘깃 훔쳐보고 또 여백을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오트르망의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

    • 그린비 2012/03/05 09:30

      오트르망의 두 분 덕분에 이렇게 좋은 자료를 보게 되어서, 또 소개하게 되어서 저도 기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