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 작업 책상으로 다시가라, 그리고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처음부터 시작하라’

북디자이너는 독자보다 책 속의 내용을 먼저 보면서 나름의 책꼴에 대한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은 디자인을 하는 가운데 느끼는 첫 기쁨이 되지요. 하지만 가끔은 책 내용이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져 작업을 하는 데 재미도 없고 작업의 진행도 더디게 되어 힘들어집니다.『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라는 책이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 책의 표지 디자인 의뢰서를 받아보고, 편집자가 전달해 준 원고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경제 분야에 대한 문외한으로, 경제용어들이 많은 글이 쉬 읽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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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게 그로츠, <거리 풍경>

『공황·불황의 경제학』으로 일본에서 출간되었던 이 책은 1990년대의 일본 경제의 공황·불황의 이야기를 비롯해 세계경제공황에 대한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책입니다. 96학번이었던 저는, 대학을 입학하면서 총장님의 환영사에서 ‘2000년도에 졸업하는 여러분은 21세기의 첫 주자입니다’라는 희망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90년대의 일본의 불황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불황은 2000년에 졸업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취업난을 남겨주었습니다. 그 취업난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어느새 ‘공황·불황’이라는 말이 남의 일만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책 내용이 어느새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고난에 빠뜨리는 불행한 사건인 공황과 불황의 원인은 지진, 태풍,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와 달리 인간의 사회관계 속에 있고, 따라서 그 원인을 알고 그것이 터지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다면 공황과 불황을 피할 수 있다.

─하야시 나오미치 지음,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 유승민·양경욱 옮김, 42쪽

공황의 원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적 모순’이라고만 말하는 경우, 공황을 없애는 방법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형태의 폐기,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맞는 소유형태의 수립, 즉 한마디로 하면 자본주의 체제의 폐기에 그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기란 지극히 곤란하고 머나먼 미래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하야시 나오미치 지음,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 유승민·양경욱 옮김, 49쪽

북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자질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형감각과 텍스트의 해석능력 외에 작업의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 진정성은 디자이너가 책의 내용을 가슴으로 읽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익숙한 내용은 아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매력을 보고, 동감하며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북 디자이너에게 독서는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진정성을 담기 위해 좋아하는 마음과 한 발짝 물러나서 일정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는 냉정한 독서이어만 하지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읽어 내려가니, 슬슬 작업에 들어가야겠지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편집자가 제안을 해 왔는데, 이 책을 번역하신 선생님께서 표지에 삽화를 이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삽화가로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와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라는 삽화가였습니다. 그 중에서 편집자가 추천해 준 게오르게 그로츠가 19세기의 부패한 사회를 신랄하게 그린 작품들이 이 책에 대한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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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게 그로츠의 소묘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 1893.7.26 ~ 1959.7.6

독일 출신의 미국 화가로 베를린에서 출생. 그곳에서 사망했다. 드레스덴, 베를린에서 배웠고, 제1차 대전 말기에 다다이즘에 참여했다. 1925년경에는 한때 〈신객관주의(Neue Sachlichkeit)〉에 기운다. 1932년에 도미 이후 뉴욕에 정주해 1938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표현주의를 정치관에 이용, 대도시의 이면에서 취재하여 뛰어난 소묘력으로 사회의 부정, 인간의 추악을 통렬한 풍자로 묘사했다. 1959년 베를린에 돌아왔다. 대표작은『사회를 받치는 사람들 Les Piliers de la société』(1926, 베를린, 국립박물관), 소묘집 『에체 호모 Ecce homo』(1923) 등이 있다.

삽화가가 정해지자, ‘아, 이건 다 된 작업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작업에 들어갔을 때는 크게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게오르게 그로츠가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여러 형태의 색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스케치들을 다시 책에 어울리게 다시 그리는 작업과 이미지가 강해서 타이포의 놓임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채색인데, 처음엔 선에만 채색을 했다가 다음에는 한 면 한 면 모든 면을 채워갔는데, 만화 같은 컬러의 느낌이 이 책이 주는 무게감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색과의 사투를 벌이는 중, 읽고 있는 책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그림이 소개되는 대목에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통 채색에 대한 고민으로 <게르니카>의 컬러분위기가 그대로 이 책의 채색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게르니카>의 색(무채색)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채색으로만 표현된 이미지는 어둡고 책 표지에서 주는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고민 끝에 무채색에 블루계열을 섞어서 어두움을 밝으면서 힘이 있게, 하지만 무게감은 잃지 않을 정도로 채색을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미지 안에서 테이블은 배경과 반대로 레드를 섞어 채색했습니다.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경제의 개념)으로 시선이 집중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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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의 최종 대지

‘스무 번 작업 책상으로 다시가라, 그리고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고 처음부터 시작하라.’

─앙리 마티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마티스는 이렇게 불리기까지 얼마나 많이 시작했을까요? 지금 걸음마를 떼고 있는 나는, 또 얼마나 더 시작해야 하는 걸까요?

디자인, 특히 북 디자인은 매순간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작업에 대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평가해야만 하지요. 작업이 길어져서 지치게 되면 스스로 ‘이 정도면 되겠지!’하면서 마우스에서 손을 놓기도 합니다. 저자와 독자사이, 독자와 편집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욕망을 읽어내고 표현해 내야하는 북 디자인 작업은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의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봐야하고 판단해야하지요. 그래서 저자와 편집자의 욕망, 그리고 독자가 원하는 책, 이 삼박자가 어우러져서 디자인이라는 과정을 거친 한 권의 책이 나왔을 때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이 순환 고리를 거치는 모든 이들에게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 디자인팀 이민영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 - 10점
하야시 나오미치 지음, 유승민.양경욱 옮김/그린비

2012/03/02 09:00 2012/03/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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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ookid 2012/03/03 02:25

    영어권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 "표지만으로 책을 판단하지 말라 (Don't judge a book by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는데, 이건 어쩐지 표지만 보고도 여러 모로 기대가 되는 책이네요. ^^

    • 그린비 2012/03/03 14:18

      안녕하세요 bookid님.
      표지에는 북디자이너(그리고 편집자)의 열정과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있는듯 합니다.
      그래서 표지를 보면서 어떤 내용일까~ 요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

  2. naoshima 2012/03/03 07:53

    그린비 책은 늘 표지가 심플하고 강렬하면서도 책의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이 책도 내용과 아주 잘 맞네요. 미학적으로도 아주 강렬하고, 이런 그림을 골라내서 탁 가져다 놓으니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는 책 내용이 좀더 쉽게 다가오고요. 한 마디로 책이 참 이쁘네요! 고생하신 보람이 느껴지고, 수고하셨습니다.

    뱀발. 그런데 디자인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소개하신 글 자체가 참 좋네요! 차분한 서술, 엄격한 글쓰기,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를 늘 의식하고 배려하는 전개, 글을 쓴 사람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하네요.

    • 그린비 2012/03/03 14:23

      naoshima님 감사합니다. ^^
      이렇게 알아봐주셔서(!) 글쓴이도 더욱 기쁠 것 같습니다.
      글쓴이 민영님이 naoshima님의 댓글에 힘입어,
      인문플랫폼 그린비에서도 활발발하게 활동하시기를 바라면서...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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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차마담 2016/09/2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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