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만약 최선의 경우에 관한 허황된 기대가 모두 실현되어 방사능 유출이 멈추고, 노심이 제대로 냉각되어 장기 안정상태에 이르고, 그걸 수관으로든 콘크리트로 된 석관으로든 완전히 밀봉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사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기로 대지로 바다로 흩뿌려진 아이오딘 131의 방사능이 급속히 감쇠하고, 30년의 반감기를 갖는 세슘 137조차 흩어지거나 제염되거나 생활하기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고 해도, 견고하게 밀봉된 석관 속에는 대량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기분 나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플루토늄 239의 방사능이 절반으로 줄어들려면 2만 4천 년 걸린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일순 그 황당한 시간의 단위에 눈이 멀고 생각도 정지된 채로 굳어 버린다.

─다지마 마사키, 『사상으로서의 3·11』, 「시작도 끝도 없다」, 141쪽

다지마 마사키의 글 제목이 잘 표현하고 있듯이, 현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이다. 원전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재난 시대인 것이 아니라, 원전 자체가 이미 ‘사고’이기 때문이다.(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249쪽) 원전 ‘사고’를 발전 자체나, 발전 이후의 폐기물 처리와 구분해 줄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모두 수만 년 동안 지속될 과정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재난의 시대, 이를 히로세 준은 ‘문제제어 사회’(「원전에서 봉기로」)라고 부른다. ‘문제제어 사회’라는 표현은 비단 원전문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9.11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 또한 ‘원전’과 동시대적인 ‘문제제어’의 현상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해서 ‘테러와의 전쟁’은 해소되지 않는다. ‘테러리즘’이라는 문제를 해결불가능의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사회를 ‘제어’하고 삶과 노동을 끊임없는 재난의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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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friends after 3·11」의 스틸컷

테러에 대한 공포가 일상을 지배하듯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상화된 피폭은 일상생활, 노동, 사회관계, 통치, 투쟁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재규정한다. 원자력 사고를 계기로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 중 하나였던 일본이 그 내적 문제와 한계를 묵시론적인 형태로 드러냈고, ‘인류 진보의 정점’이었던 원전 또한 스스로 붕괴하여 자본주의가 만들어 왔던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원전이나 핵무기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난망한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자신의 글(「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지구상에서는 수도 없는 원자력 사고들이 발생했고 그 정점에 후쿠시마의 원전사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시대의 통치는 이러한 붕괴의 사실을 알면서도 지연시키는 장치를 인류에게 강제할 것이다.(고소 이와사부로, 232∼233쪽)

이런 강제에 맞서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제기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저항들은 마찬가지로 ‘문제제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히로세 준은 이를 ‘아랍의 봄’을 들어 설명한다.(「원전에서 봉기로」, 253쪽) 과거의 ‘혁명’이 ‘문제해결’, 즉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건국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으로 종결된다면, 오늘날의 ‘아랍의 봄’과 같은 봉기에는 ‘정권 장악’이나 ‘건국 프로젝트’와 같은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아니라, 봉기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반원전의 증표」에서 등장하는 일본의 마이너 운동들(다메렌, 목욕탕 이용자 협의회 등) 역시 끊임없이 봉기로서 봉기하는, 다시 말해 특정한 목적이 아니라 “노상 점거 자체를 지향하는”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데모가 기쁨의 선인 동시에 피로의 선이기도 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길을 메우고 활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비좁은 인도로 밀려나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답으로 향하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그것으로서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진행되는 데모이기 때문이며, 즉 그 종착점이 종지부가 아니라 휴지부이며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뱀’이라고 부르며 시작과 끝으로 획정된 선분 위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가 또 다른 획정된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과거의 ‘두더지’와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며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뱀은 또한 땅 속에서의 휴식도 알지 못한다. 쉬지 않고 땅 위를 기어간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다. 땅 위로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또한 뱀들의, 즉 우리 해방의 선, 기쁨의 선이다. 뱀이 된다(봉기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어디까지나 과잉된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

─히로세 준, 『사상으로서의 3·11』,  「원전에서 봉기로」, 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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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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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은 보고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도성장의 신화, 안전신화, 원자력신화……. 현대 일본의 모든 신화들이 무너져 내린 그라운드 제로, 후쿠시마. 그곳으로부터 바람과 조류를 타고 퍼져 나가는 피폭의 공포는 그것이 닿는 모든 지역의 삶과 노동, 통치와 저항의 성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제 일본과 세계의 인류는 3.11로 시작된 이 강력하고 지속적인 재난 속에서 삶을 영위할 방법을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재난의 한복판에서 쓰여진 『사상으로서의 3.11』은 바로 이 사유의 단초들을 엮은 책이다. 쓰루미 슌스케나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같은 원로 사상가로부터 고소 이와사부로나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가 담긴 『사상으로서의 3.11』은 3.11 이후 인류에게 어떤 삶의 가능성과 과제가 놓여져 있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해 주고 있다.

실제로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유럽과 브라질 등 많은 나라들이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은 여전히 이웃나라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일본이 비워 둔 원전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듯이, 원전 수주에 환호하고 원전을 더욱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태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면, 한국에서는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앙은 후쿠시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사상으로서의 3.11』에 실린 일본 지식인들의 사유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한 이것이 ‘3.11 대지진’ 1년을 맞아 『사상으로서의 3.11』 한국어판을 번역․출간하는 이유이다.

사상으로서의 3.11 - 10점
쓰루미 순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그린비
2012/03/06 09:00 2012/03/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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