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능의 땅에서 뱀으로 살아가기

원전이 ‘제어된’ 원폭이라는 점에서 원전과 원폭이 구별된다고들 하지만(도쿄전력의 웹사이트에도 이런 설명이 올라와 있다) 수사修辭에 불과한 말이다. 원폭이 다른 고전적인 대량살상무기와 다른 점은 폭발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잠재적 에너지는 티끌만큼도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원폭이 폭발하면 가공할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 아무리 처참하다고 해도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원폭 투하로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이 마주하는 것은 종지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휴지부(…)이며, 그것은 언제까지고 미해결로 남겨지는 과잉된 문제의 지속이다. 그 ‘때’가 항상 이미 도래하고 있다는 의미와 동시에 항상 아직도 도래하지 않는 ‘시한폭탄’이라는 의미에서 원전과 원폭을 가를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피폭자들이 진술하듯이 그들에게 ‘피카’*는 ‘온’ 것이 아니고 ‘오는’ 것이며 ‘오는’ 일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번쩍하는 모습을 보고 ‘피카’(ピカ)라고 불렀다. — 옮긴이)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사상으로서의 3.11』, 250쪽

『사상으로서의 3.11』 작업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이 히로세 준(広瀬純) 「원전에서 봉기로」였다. 이 마흔 두 살의 젊은(?) 영화평론가는 들뢰즈의 논의에 기대어 오늘날의 사회를 ‘문제 제어’의 사회로 규정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제어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사회. ‘원자력 발전’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은유’이자 ‘환유’이다. 화력 발전이나 수력 발전이 연료를 태워버리거나 물을 낙하시키는 ‘문제의 해결’ 방식으로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원자력 발전’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원폭’의 힘(다시 말해, ‘문제’)을 끊임없이 ‘제어’해야만 하는 체계이다. 그리고 여기서 ‘끊임없이’라는 수식어는 말 그대로 끊임이 없는 일이다.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방사능 물질들은 수만, 수억 년이라는 반감기를 갖기 때문이다. 몇 천 년 남짓한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무한’이라고 해도 무방한 시간의 단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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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에게는 오로지 숫자로 환원된 데이터만이 방사능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데이터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작성되었다고 한들, 그 수치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자신이 어떠한 행동에 나서야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방사성 물질은 무형이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윤여일, 『사상으로서의 3·11』,「옮긴이 서문」, 26쪽

히로세 준은 이렇게 무한히 제어되어야 하는 것이 원전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후세인을,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해결‘하지’도 않는다. 한편으로는 위기를 조장하고 그 위기를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자신의 내부를 관리하고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 제어의 사회’는 이렇게 거창한 주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파고들어, 현대인들이 실제로 해결불가능한 문제에 맞닥뜨려 그 속에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여기서 질 들뢰즈가 내놓은 너무나도 유명한 논의,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을 다시금 상기해 봐도 좋을 것이다. 들뢰즈는 이런 이행을 여러 분야에서 살펴보았는데 그 중 한 가지로서 임금을 예로 들고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훈육사회의 ‘공장’에서는 경영자 측이 요구하는 ‘되도록 높은 생산성’과 노동자 측이 요구하는 ‘되도록 높은 임금’ 사이에 균형을 찾고, 그 균형점에서 임금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다. 반면 통제사회의 ‘기업’은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임금을 ‘항상적인 준안정 상태’로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임금의 주된 원가요소가 기본급에서 능력급으로 이행하는 것이다(훈육사회의 공장에서도 성과에 따른 특별수당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 요소에 불과하다). 우리의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면 ‘답으로서의 임금’으로부터 ‘문제로서의 임금’으로의 이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능력급을 주축으로 하는 임금노동 체제에서도 개개 종업원의 그 달 성과에 대한 답으로서 매달 임금이 지불된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항상적인 변동가능성으로 문제(인센티브)가 늘 미해결로 머무를 때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사상으로서의 3.11』, 252쪽

‘사랑이 꽃피는 나무’ 시절만 해도, 사람들은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이후의 삶은 ‘탄탄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듯싶다. 그것이 ‘환상’이기는 했어도 사람들은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환상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발하라고 강요한다.

이런 시대에는 ‘저항’조차도 끊임없는 피로 속에서 이루어진다. 과거의 ‘혁명’이 정권을 교체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종지부’와 새로운 시작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 오늘날 ‘문제제어 사회’에서 저항은 준안정상태에서 또 다른 준안정상태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이루어진다. 히로세 준은 이를 ‘봉기’라고 부른다. ‘원전’과 ‘봉기’, 후쿠시마 이후로 이것이 ‘삶’의 다른 이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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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기쁨으로의 과정이지만, 봉기는 그자체로 기쁨의 과정이다. 혁명에서 모든 피로는 문제가 해결되면 기쁨으로 보상받지만, 봉기에서는 문제를 살아가는 것에 의한 피로가 기쁨과 일체화된다." ─히로세 준, 『사상으로서의 3·11』, 254쪽

오늘의 데모가 기쁨의 선인 동시에 피로의 선이기도 하다는 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길을 메우고 활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비좁은 인도로 밀려나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답으로 향하는 데모,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향하는 데모가 아니라 문제를 그것으로서 살아가는 데모,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진행되는 데모이기 때문이며, 즉 그 종착점이 종지부가 아니라 휴지부이며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뱀’이라고 부르며 시작과 끝으로 획정된 선분 위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가 또 다른 획정된 선분 위로 얼굴을 내미는 과거의 ‘두더지’와 구별했다. 뱀은 선분을 알지 못하며 데모와 일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뱀은 또한 땅 속에서의 휴식도 알지 못한다. 쉬지 않고 땅 위를 기어간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다. 땅 위로는 끊임없이 방사선이 쏟아지고 있다. 피로와 피폭의 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또한 뱀들의, 즉 우리 해방의 선, 기쁨의 선이다. 뱀이 된다(봉기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어디까지나 과잉된 힘으로서의 이 ‘균열’을 살아가는 것이다.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사상으로서의 3.11』, 254~255쪽

- 편집부 박순기

히로세 준(広瀬純). 1971년 생. 영화평론가. 현재 프랑스에 체류하며 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프랑스의 영화비평지 VERTIGO 편집위원이며 스트로브-위예, 사카모토 준지 등에 대한 평론을 발표했다. 저서로 『씨네 캐피탈』, 『전투의 최소회로』 등이 있다.
사상으로서의 3.11 - 10점
쓰루미 순스케 외 지음, 윤여일 옮김/그린비

2012/03/07 09:00 2012/0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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