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를 통해 듣는 우리 현실 속 타자의 목소리!

철학은 추상적인 원리를 궁구할 뿐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을 다룰 수는 없는 걸까? 현실이 정체되고 가치들이 퇴색되어 갈 때, 철학에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몽상일 뿐일까? 예컨대 최근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싸고, 인권의 미명하에 교육자의 권한을 제한한 처사라는 반발이 있었다는데, 이처럼 현실이 교착되며 사회적 갈등을 빚을 때 철학을 통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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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해체와 윤리: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은 철학과 사회의 접점을 모색하는 연구 작업을 꾸준히 이어온 저자 문성원 교수의 신작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를 필두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알랭 바디우(Alain Badiu), 마이클 월저(Michael Walzer) 등 서구 현대철학의 거장들을 논의하며, 해설이나 이론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속에 이들 철학을 접목시켜 봄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구하고 있다. 예컨대 들뢰즈의 사상은 정체된 현실을 유동화시켜 잠재성의 장을 여는 ‘해체’의 철학으로서, 레비나스의 사상은 자기중심성·주체중심성·이성중심성 바깥의 타자를 중심에 놓는 ‘윤리’의 철학으로서 역할을 부여받는다. 기성질서의 해체를 통한 변화 가능성의 확보와 그 변화의 과정에서 요청될 윤리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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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
앞의 학생인권조례 사안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종종 전혀 다른 사안의 사회적 갈등에서도 같은 전개를 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경합하는 가치가 있고 전문가의 입을 빌려 특정 가치가 옹호되며(represent; 대표=재현) 힘겨루기에서 이긴 가치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현대철학이 제기하는 ‘동일성’과 ‘재현’의 문제를 현실에서 찾는다면 이런 것이지 않을까(19쪽 이하 참조). 아마 들뢰즈라면 동일성에 우선하는 ‘차이’를, 플라톤적 이데아의 재현에서 일탈하는 ‘표현’을 통해 이런 현실을 비판할 것이다. 또 나와 타자의 관계에 관한 통념에 도전한 레비나스 철학이라면 두 권리의 충돌 이전, 권리에 앞서는 책임(responsablité)을 먼저 따져보라고 말할 것이다(54~58쪽 참조). 그런 다음 그 책임성이 연원하는, 나에 대해 비대칭적인 위치에 놓인 타자의 요청에 귀 기울이라고 말할 것이다(68쪽 참조). 나의 책임은 항상 권리에 우선한다.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réponse)하는 책임을 짐으로써 주체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사안에서 타자는 누구일까? ‘성적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이 쟁점이라면 레비나스적 타자의 윤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있지 않을까?

『해체와 윤리』는 이런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응답을 다각도에서 고찰해 나간다. 그리고 이때의 현실은 무엇보다 ‘지금-여기-우리’의 현실이다. 분단체제의 문제를 두고서 백낙청과 들뢰즈(·가타리), 레비나스를 함께 읽어 보거나(1부 5장), 바디우를 거쳐 촛불시위와 68혁명을 비교해 보는 것(3부 3장),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의 한계를 검토하며 탈북자의 인권 문제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4부 4장)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독특성에 눈감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한 철학의 역할(4부 5장 참조)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무한경쟁이 운위되는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대가 없는 책임, 희생과 결부된 책임을 논한다는 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인 일로 비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자본주의 교환경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 강퍅한 현실을 넘어서려는 대안 모색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임을 권한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권한을 규정하는 것이자 권한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권한이란 대개 상품교환경제를 뒷받침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전제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책임과 희생을 같이 논하는 일도 그저 공허한 사변에 그치지는 않는다. 호혜성을 넘어서는 비대칭성에 주목함으로써 교환과 거래를 절대화하는 자본주의 현실의 바깥을 지향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노력은 얼핏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각질을 뚫고 보다 근본적인 가능성의 터전을 확인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지배적 현실과 대극에 서 있는 극단적인 논의가 오히려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삶의 조건과 의미를 드러내 주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문성원, 『해체와 윤리』,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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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철학의 정원’ 시리즈 여덟 번째 책. 이념의 가치가 실추되고 사회 변화의 역동성이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에 철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에마뉘엘 레비나스,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등 현대철학자들의 사유를 경유해 우리 사회 속 타자, 윤리, 욕망, 진리, 정의 등의 이슈를 검토하는 책.

문성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기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산업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00년부터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추: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철학』(백의, 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철학』(동녘, 2000)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자유』(이후, 2002), 그리고 『국가와 혁명』(돌베개, 1995), 『철학대사전』(동녘, 1997),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역사』(한울림, 2000) 등의 공역서가 있다.
해체와 윤리 - 10점
문성원 지음/그린비

2012/03/09 09:00 2012/03/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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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2012/03/09 13:31

    사진 찍으신 분의 개인적 취향이 고스란히..ㅎㅎ;
    책도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 그린비 2012/03/09 14:19

      하하하! 제 취향을 은근슬쩍 노출(!)해봤습니다.
      책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거에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