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피로, 타자의 가르침

1.
어릴 때 저를 사로잡은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점점 커져서, 어쩌면 내가 어른들도 모르는 엄청난 세상의 비밀에 가닿은 게 아닐까 조금은 두려워하며 두근대게 만들던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차차 그런 생각으로부터도 놓여나게 되었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대개의 사람들이 성장 과정 중에 품게 되는 무엇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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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만화가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가 쓰고 그린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의 한 장면.

이때 문제는,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 속 소년처럼, ‘내게 지각되지 않는 곳, 지각되지 않는 사물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라는 초보적인 인식론의 질문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는 건 한편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세운다는 말일 테고, 사회적 존재가 됨으로써 자기 지각 능력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물과 사건의 존재를 확증해 줄 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또 꼭 세계의 모든 사건과 사물의 ‘있음’을 알기 위해 하나하나의 사건·사물을 확인한 타인들을 만나야 할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이런 게 중·고등 교육과정 중에 있었죠? ^^;;). 관념론과 실재론, 그리고 그 대립을 종합하려는 경험적 실재론과 선험적 관념론 등등……. 우리가 어떻게 완결된 세계상(像)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세밀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어떻든 저 의심의 상당 부분은 해명된(/될) 것처럼 여겨졌고, 저는 그렇게 제 지각 범위 바깥에 대한 문제에서 놓여났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 언저리에 만난 어떤 글을 통해, 이 문제는 (심화된 버전으로) 다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좀 길지만 그 글을 인용하자면…….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화·수·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 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현)

위 글은 문학을 말하고 있지만 당연히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일 수 없겠습니다. 내가 내 바깥에 무지한 채로 일상을 반성 없이 보내는 동안, 삶은 반복 속에 갇혀 점점 ‘거짓된 삶’으로 떨어져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곧 내게 감동을 준 글을 읽을(접근할) 기회, 그 글을 읽음으로써 감동을 느낄, 그래서 그 글이 촉발하는 감동의 공유로써 이루어질 어떤 연대(solidarity)에 속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으로서 다가옵니다. 이왕 말이 난삽해진 김에 조금 더 덧붙인다면, 감동이란 결국 공감 속에서 증폭되는 것이므로, 이로써 제가 느낄 수 있는 감동의 크기 또한 제약받게 될 겁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먼저 이렇게 거칠게라도 제가 타자를 ‘삶의 문제’로서 이해하게 된 경위를 요약해 보고 싶었습니다.

2.
최근에 공감 피로증(empathy fatigue)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때의 공감은, 독일의 심리철학자 테오도어 립스(Theodor Lipps)에 의해 ‘타인이나 사물 등에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이입시켜 자신과 그 대상물의 융화를 꾀하는 정신작용’으로 정의된다고 합니다. 또한 립스는 공감이 ‘나와 대상의 동일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답니다. 주로 정신의나 상담사 같은 직군의 사람들이 겪는다는 이 피로증은, 또한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전해 듣는 제1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나타난다고 합니다.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다. 우리는 한 타자에 응답하면서 다른 타자를 희생시킨다. 유한한 우리로서는 모든 타자에게 모두 응답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짐은 매 순간 우리의 배반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를 배반하기 위해, 그들의 목에 칼을 겨누기 위해, 직접 모리아 산까지 오를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모리아 산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나는 어떤 타자들에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다른 타자들을 희생시킨다. 내가 내 눈앞의 가족과 친지를 돌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모르는 무수한 타자들에 대한 책임을, 혹은 병들고 혹은 굶주리는 그 타자들에 대한 책무를 희생하고 있다.

─문성원, 『해체와 윤리』, 「책임과 타자」, 72쪽

병증이 될 정도로 피로가 누적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때로 치료에 실패하는 환자가 있기야 하겠지요. 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던 환자가 자신의 조력으로 나아져 가는 것을 보며 느끼는 보람도 있을 텐데요.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 삶의 터전으로부터 쫓겨나는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게 되는 것도 분명 피로이긴 할 겁니다. 하지만 연대의 힘으로 사회적 모순을 하나하나 깨나가면서 느끼게 되는 희열이 이 피로를 떨쳐 주지는 못하는 걸까요? 『해체와 윤리』에 따르면, 공감으로부터 생겨난 피로는 공감의 보람으로써 완전히 보상될 수 없습니다. “모든 타자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인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름에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모리아 산에 오르고, 이때 “신에 대한 책임이 일단 아들에 대한 무책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자크 데리다는 이걸 ‘아브라함의 패러독스’라고 불렀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할 때조차 다른 알지 못하는 타자를 희생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 할수록 공감 피로증에 빠져들게 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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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현상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책세상, 2010, 117쪽

반전은 ‘공감’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앞서 본 립스의 공감 정의는 ‘동일성’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매번 다른 타자에게서 항상 같은 것만을 보려 할 때, 결국 주체(나)는 타자에게서 자기 자신의 반복, 자기 실패의 반복만을 보게 될 뿐이고, 종내에는 자기 파괴적 욕망에 집어삼켜질 위험마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공감은 자기를 엶으로써 자기 안에 새로움을 가져오는 행위가 아닌가요? 우리는 타자가 가져다 준 새로움 속에서 비로소 과거의 실패로부터 놓여나고 자기 용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물음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쉽게 잊고 있는 책임의 폭과 깊이를 보여 주며, 우리의 책임이 안이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없음을 드러내 준다. (…) 책임짐의 희생은 그 책임짐에서 제외된 타자들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주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이 물음들은 우리의 삶이 책임짐의 끝없음과 책임의 무한함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아마 이러한 무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즉 누적되는 타자의 희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희생하는 것,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무한과 하나가 되는 길뿐일는지 모른다.

─문성원, 『해체와 윤리』, 「책임과 타자」, 73쪽

몇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나 몇 개의 수치로 환원된 희생자들의 일을 접할 때, 내 눈이 닿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의 안 좋은 결과를 전해들을 때, 우리는 종종 이 모든 일이 버겁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자기 시야의 협소함에 좌절하고 자책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모난 칸 속에 갇힌 그림 속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 시야는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무한과 하나가 되”기도 하나의 가능한 윤리적 태도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한’을 말의 의미 그대로 ‘한정 없음’으로 이해한다면 ‘무한과 하나 되기’는 자신이 응답할 수 있는 범위를, 자신의 능력이 미칠 수 있는 한계를 미리 정해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 됩니다.

다소(?) 뜬 얘기를 한 것도 같습니다. 더 무슨 말을 덧붙여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이 책의 한 대목을 더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

우리의 생각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 속에서 낡아 가지 않고 새로워질 수 있다면 우리의 생각을 전해 듣는 타자를 통해서이다. 오늘의 부족한 이 글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또한 내 얘기를 전해 듣는 여러분을 통해서일 것이다.

─문성원, 『해체와 윤리』, 「반복의 시간과 용서의 시간」, 147쪽

- 편집부 김효진
해체와 윤리 - 10점
문성원 지음/그린비
2012/03/21 09:00 2012/03/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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