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키 바트만, 잊혀지지 말아야 할 이름!
― 19세기 인종주의가 발명한 신화, 『사르키 바트만』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 고향에!
그 너른 들판이 기억나시는지요.
커다란 너도밤나무 밑을 흐르던 빛나는 푸른 잔디를 기억하시는지요?
공기는 선선하고, 이제는 더 이상 태양도 불타오르지 않습니다.
나, 언덕 기슭에 당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나이다.
부추꽃과 민트꽃 만발한 이불을 덮으소서.
프로티아꽃들은 노랗고 하얀 모습으로 서 있고,
냇가 시냇물은 조약돌 너머로 졸졸 노래부르며 흐르나이다.
나 당신을 해방시키러 여기 왔나이다.
괴물이 되어 버린 인간의
집요한 눈들로부터,
제국주의의 마수로
어둠 속을 살아내는 괴물,
당신의 육체를 산산이 조각내고
당신의 영혼을 사탄의 영혼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궁극의 신이라 선언한 괴물로부터!

─다이애나 퍼러스,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 중에서

그녀를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가 작업하던 책 『중국 근대의 풍경』이 아니었다면 영영 그녀의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지요. 사실 『중국 근대의 풍경』은 그녀를 주제로 한 책은 아니었으나, 단 몇 줄 속에서 그녀는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 지역에서 유행처럼 번져 가던 만국박람회에서 인종 전시를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박람회에서 작은 뇌와 거대한 생식기를 지닌 한 여성의 몸이 증류액에 담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고 하네요. 같은 여성으로서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고, 도대체 이 여성은 어디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그것도 몸의 일부분이 도려내진 채로 오게 되었을까? 궁금했지만, 금방 잊었습니다. 그녀에 관한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녀의 이름은 사르키 바트만(1789~2002),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이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축을 잘 다루기로 유명하던 코이산 집단의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며 평화롭게 살던 사르키 바트만의 친구들과 친지들, 그리고 코이산 사람들은 당시 그녀도 모르게 그녀가 살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네덜란드인들에게 농지를 빼앗기며 막노동에 기대며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한순간 한 네덜란드인에게 토지가 넘어가면서 코이산 사람들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순식간에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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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레드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1841~1870), <모란을 든 아프리카 여인>

농지를 박탈당하고, 가축들마저 빼앗긴 코이산 사람들은 생활을 위해 가축을 훔치고 먹을 것을 빼앗으러 다니는 그야말로 강도(솔직히 강도라 부를 수도 없지만)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르키가 열일곱 살인가, 열여덟 살이 되던 어느 날, 가축떼를 몰고 가던 사르키의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사르키는 이제 완전한 고아가 되어 그 험한 땅에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케이프타운 출신의 자유민 신분을 얻은 흑인인 피터 세자르라는 남자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피터 세자르는 그녀를 보고 자신의 자식들을 돌보는 유모로 삼기로 합니다. 피터 세자르가 그녀를 납치한 것인지, 그녀를 구원한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그녀에게 새로운 혹은 절망적인 삶을 안겨 줬다는 점에선 나름 의미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피터 세자르가 케이프의 도시 빈민이긴 했으나, 사르키는 그를 통해 케이프 시에 유입된 많은 유럽 문물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군인들이 많던 그곳에서 사랑하는 영국 군악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가 흑인이었는지 백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이었던 피터 세자르는 그녀와 영국 군악대원의 결혼을 무척이나 축복해 줬습니다. 그녀도 행복해했다고 합니다.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던 아버지도 잃었던 사르키는 가족을 무척이나 원했습니다. 어린 시절, 험한 삶을 살아오며 누구보다 평안한 삶을 그리워했고, 사랑하는 아이를 낳아 안정된 가정을 꾸려 가는 게 가장 큰 꿈이었던, 너무나 평범했던 그녀. 바라던 대로 군악대원과 아이를 낳았으나, 아이는 곧 죽습니다. 그 당시 영아사망은 흔한 일이어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이의 사망으로 군악대원은 아이를 떠나고, 그 시기에 맞춰 세자르도 더 이상 사르키까지 돌볼 상황이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녀는 어느 누구도 앞날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다시 외톨이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생활고에 시달릴 때쯤, 세자르를 도와주던 영국인 의사 던롭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의사 던롭이 생각했던 건은 다름 아닌, 인종 전시. 지금은 인종 전시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인종 전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 과학자라고 지칭하던 이들은 진귀한 사물들을 찾아 아프리카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우리에게도 유명한 칼 린네 같은 식물학자들 역시도 희귀작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무리 비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던롭과 세자르 형제 역시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한 여성의 약점인 엉덩이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군의관으로서 사람들을 치료해 주던 던롭은 세자르 형제에게 아프리카에선 별 특이점이 없던 그녀의 몸을 유럽에서 전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하죠. 이른바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알려진, 인간의 ‘먼 친척’의 전형을 보여 줌으로써 아프리카인들이 얼마나 동물적인지, 흑인은 얼마나 열등한지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기린 가죽을 입히고, 사람들 앞에서 전시하겠다고 매우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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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들의 유럽 출입을 막는 호텐토트 법으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으로 가기 수월하지 않았지만, 던롭과 세자르 형제의 합작이 만들어 낸 밀항을 통해 사르키는 이후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영국 땅을 밟게 됩니다. 아마 그녀는 별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게 되면 고향으로 다시 보내 주겠다는 던롭의 이야기도 믿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돈을 벌면 다시 가족을 꾸릴 수 있고,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꿈 때문에, 자신의 런던의 프릭 쇼(Freak show)에 서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런던에 도착한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피커딜리 극장에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쇼에 서게 됩니다. 온갖 기이한 사물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그녀는 반나체로 쇼를 해야 했습니다. 그 쇼는 곧 런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상한 몸매를 한 흑인 호텐토트족 여인을 볼 기회는 얼마 안 가 최고의 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말이면 마차에 태워져 런던 시내를 돌며 홍보까지 해야 했죠. 그녀가 부르는 노래, 그녀가 연주하는 악기,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이국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소비되었습니다. 물론 성적으로.

얼마 안 가, 사르키를 데리고 돈을 벌던 던롭은 노예무역을 반대해 온 이들의 항의를 듣게 됩니다. 사르키 문제는 영국 의회에서도 다루어질 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었죠. 그러자 노예폐지론자들은 사르키를 노예로 규정하며 던롭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고 공격합니다. 물론 노예다/노예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사르키가 영국에 거주하는 내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싸움에 사르키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각자만의 입장대로 사르키를 정의했습니다. 사르키가 노예이냐/노예가 아니냐 하는 재판이 일어났을 때, 사르키는 영국에 남겠다고 말합니다. 어차피 케이프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저 다른 집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할 테니까요. 영국에서 그녀는 돈도 벌 수 있었기에, 좀더 풍족한 형편을 만들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법원에서 사르키를 끝까지 관리 감독해야 한다는 의무(이후 반드시 사르키를 케이프로 안전하게 돌려 보내야 한다)를 지닌 던롭은 사망합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법적 보증인도 사라지게 되죠. 또 한 번의 상실입니다. 던롭이 죽고, 더 이상의 프릭 쇼도 하지 않고 익명으로 지내던 그녀는 1814년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입니까? 자유, 평등, 박애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너무나 당연했던 나라입니다. 사르키는 아마 이곳에서 돈을 벌려고 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편치 않았듯, 파리에서의 생활도 편하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쇼를 진행해야 했고, 그녀의 수입은 던롭이 사망함으로써 조금 더 많이 받는 편이긴 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만큼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돌아가면 다시 세자르네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 신세가 되어 버리니까요. 어느 날, 세자르는 사르키 전시권을 팔아 버리고 케이프로 떠납니다. 그나마 알고 있던 세자르가 사라지자 사르키는 철저하게 혼자가 됩니다. 게다가 세자르와 달리 그녀의 신체를 전시할 전시권을 사들인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시 흥행업자들. 이제 배려나 동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끔찍할 정도의 학대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끊임없이 쇼를 하게 만드는 건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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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 바트만을 소재로 한 영화 「Venus noire」(2010)의 스틸컷

호텐토트의 비너스인 사르키를 어떻게 하면 쥐어 짜낼까 하고 고민하던 흥행업자는 이제 사르키를 파리 왕립식물원에 그녀를 전시하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는 쇼의 대상이 아니라 과학이 탐구해야 할 대상이 되었으니까요. 당시 프랑스 왕립학술원을 비롯한 프랑스의 과학자 공동체들은 그녀를 박물관에서 전시해야 한다고 결정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의 ‘먼 친척’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열등한지 밝혀내기 위해서 말이죠. 덕분에 그녀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중도 받지 못한 채,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져 전시됩니다. 기이한 몸으로 소문난 그녀는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전시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끊임없는 관음증적인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녀는 결국 파리에서 1815년에 사망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잔혹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 위인전에 고상한 척 놓여 있는 퀴비에는 그녀의 생식기와 뇌를 잘라 증류액 속에 담습니다. 그걸 갖고 퀴비에는 아프리카 여성의 본연의 성(性)이라던가, 해부학적 분류체계를 성립해 나갑니다. 프릭 쇼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과학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의 시선의 포로가 되었고, 죽어서는 생식기와 뇌만 남아 극소수의 전문가만 볼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퀴비에는 위대한 과학자로 칭송받으며 프랑스의 페르라세즈 공동묘지에 묻히지만, 사르키 바트만은 사망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사라져 갔습니다.

이후 1822년에서 1850년대의 어느 날, 프랑스의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사르키 바트만의 골격 뼈대, 생식기, 뇌를 파리자연사박물관에서 일반 전시합니다. 이 전시는 100년 넘게 있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 뇌와 생식기 모델은 파리자연사박물관에서 사라지고, 1976년에는 유골과 밀랍 모형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우리에게도 유명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우연히 자연사박물관 구석에서 뇌와 생식기 모델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과학의 대상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고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계속 사르키 바트만의 유해를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는 것보다 사르키 바트만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하면서요. 제국주의의 폭력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 여자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증류수에 담겨 남들에게 전시된 채로 살아가는 게 안전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를 케이프로 돌려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어 왔지만, 2000년도까지 그녀의 유해는 파리에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지금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수많은 지식인들, 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리던 고향 케이프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가 만든 폭력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제국주의가 여성을 어떤 식으로 학대하고 억압하는지 보여 주는 실례로서 보여집니다. 하지만 사르키 바트만을 인종과 성의 문맥으로만 읽는다는 건, 바로 피해자인 흑인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갖고 있던 여성이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을 괴롭히던 남성들에게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여성이었으니까요. 저 역시도 단 몇 줄 속에서 만난 그녀의 삶을 다른 책을 통해 알게 되자 복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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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키 바트만은 왜 당시 사람들에게 늘 구경당하거나 탐구되어야 하는 '대상'이고 '타자'로 존재했던 것일까?

사르키 바트만은 이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새로운 운동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소수자문제에서도, 복잡한 외교 문제에서도 사르키 바트만은 아프리카 억압의 상징으로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국주의의 폭력, 인종, 성 문제만으로 그녀를 보게 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피해자 그 이상으로 그녀를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녀를 신성화한다고 하여 한 여성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는 어떤 이의 이야기는 일견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피해자화한다고 하여 그녀의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음 한켠에서는 여전히 그녀는 피해자란 인상이 강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여성이 살았었다는 걸 꼭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과학이 모든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고 믿던 시대, 인종 전시라는, 말만 들어도 끔찍한 전시회가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시대에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이, 꿈이라곤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던 여성이, 이제 원하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것. 오래전 끝난 작업이지만 책 몇 줄 속에서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어떻게 삶이 마무리되었는지 궁금했던 여성이 이제 고향에서 편히 쉬고 있다는 걸 꼭 알려 드리고, 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노예로 끌려간 사르키 바트만의 후예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는 그중의 몇 명도 제대로 구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젠가 수많은 사르키 바트만들이 그녀들의 고향에서 편히 쉬길 바라며, 오늘은 2002년 사르키 바트만의 유해를 맞아들이던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용서는 한다. 그러나 잊어버리지는 않겠다”

- 편집부 강혜진

※ 지식 e채널에 사르키 바트만에 관한 영상이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


사르키 바트만 - 10점
레이철 홈스 지음, 이석호 옮김/문학동네

2012/03/23 09:00 2012/03/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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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민맘 2012/03/23 09:51

    친구들과 함께 읽고자 퍼갑니다. 근데 뷰온이나 믹스업 말고 트위터, 페북으로 보낼 수 있도록 애써주셨으면 좋겠어요.

    • 그린비 2012/03/23 14:25

      다음뷰나 믹스업과 트위터, 페북 내보내기는 사용 목적이나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서요~ 트위터나 페북 내보내기 기능은 제작된 플러그인이 있길래, 적용해보았습니다. 많이많이 사용해주시길! ^^

  2. Lipp 2012/03/23 18:45

    '블랙 비너스'라는 영화를 통해서 알게된 이야기인데 참 충격적이었죠.
    러닝타임이 꽤 긴 영화라서 대부분 잘 다룬거 같더라구요.
    많이 늦긴 했지만 사르키 바트만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다행이구요.

    • 그린비 2012/03/25 23:36

      오, 영화를 보셨군요.
      사르키 바트만의 일생을 어떻게 그렸는지 저도 이 글을 읽으며 찾다 보니 궁금해졌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ㅠ_ㅠ 크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