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로서 존재하는 나!

심귀연(경상대학교 철학과)

책이 나오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은 책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분명 『신체와 자유』라는 제목에는 책을 접한 그들이 함께 공감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측해 보자면, 그것은 안도감 같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안도감’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말할 때, (사실상 자유란 나의 일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고차원적 영역의 것이며, 그것에는 대단한 뭔가가 있을 듯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자유는 오랫동안 고매한 이성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가 이성만이 아닌 신체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이 책, 『신체와 자유』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나는 철학이 (때로는 아주 소소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구체적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물음에서 시작하는데, 그 물음은 우리의 삶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철학이 우리 삶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철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사유 활동에만 관심을 가져 왔고,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데카르트는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있고,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다고 말하였다. 인간과 다른 존재자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성의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체와 관계된 모든 것들은 등한시되거나 외면을 받아 왔다. 이성과 신체를 이렇게 나누고 차별을 둔 까닭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체와 관련된 모든 일에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둘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추상화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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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기적의 국가>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식사시간이 되면 식사를 한다. ‘식사’라는 말로 모든 것은 설명된 듯해 보이지만, 이 속에는 어떤 구체성도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삶도 보이지 않는다. 식사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식사를 하기 위해 어떤 과정들을 거치는가? 우선 고민을 할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스파게티를 먹을까? 아니면 추어탕을 먹을까? 오늘은 누구하고 가지? 혼자 갈까? 늘상 11시 30분이면 밥을 먹으러 갔는데 오늘은 조금 더 일찍 가야하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나는 혼자 또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반가운 또 다른 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시간을 놓칠 수도 있고, 그 사람과 함께 식당으로 갈 수도 있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 반찬에서 달짝지근하고 얼큰한 맛을 느끼는 것, 밥을 먹으면서 느끼는 포만감, 그리고 즐거운 웃음……. 이 모든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감각적인 것이지 이성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의한 판단이라면 같은 식당의 같은 음식의 맛에 대한 판단은 같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어제와 같은 음식을 먹은 오늘, 나는 어제와 같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이처럼 상황에 따라 달리 판단되는 것을 못 참아 낸다. 이성주의자들은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것이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진실이 감각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감각되는 모든 것은 이성적 판단에 의해 분석되고 추상화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경험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점심’과 ‘식사’라는 개념뿐이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도 사라지고, 이론화되고 추상화된 세계와 삶만이 남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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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내가 메를로-퐁티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그가 살아 있는 인간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삶의 흔적들을 자신의 철학적 사유 속에 녹여 냈다. 나는 그가 근대가 가진 문제점들을 삶 속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근대가 마치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도록 한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은 세계를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근대는 인간의 구체적 삶을 사장시켰다. 즉 세계는 대상화되고, 인간은 소외당했다.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근대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흔히들 모든 철학자는 ‘시대의 아들(그리고 딸^^)’이라고 말한다. 그 시대를 아우르는 인식의 틀을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를 아우르는 생각들을 누가 만드는가? 그것은 인간이다. 한 시대적 이성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대, 자신의 세계를 열어 간다. 그런데 이 세계는 혼자서 여는 세계가 아니다. 수많은 타자들과 함께 얽혀져서 열어 간다. 이렇게 열리는 세계는 ‘신체-주체’로서의 인간과 자유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속에 우리의 구체적 삶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구체적 삶을 말하고 전(前)반성적 영역을 회복하고자 할 때, 철학자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철학이 큰 틀에서 반성적 활동에 있다고 할 때, 이 언술 속에서 마치 철학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는 철학자들이 구체적 삶을 버린 채 추상적 삶만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반성적인 영역에 있되, 반드시 전반성적인 영역, 즉 반성 이전의 구체적 삶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말하고자 했고, ‘신체’와 ‘자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개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신체와 자유』는 내게 있어 철학함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유’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면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부분들을 앞으로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해 볼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가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데, 하나는 사르트르의 자유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메를로-퐁티의 자유와 연관지어 검토하는 것이다.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사르트르의 자유가 메를로-퐁티와는 다른 자유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적 회화론이다. 앞서 말했듯 철학은 전반성적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전반성적 영역에서 반성적 영역에로의 이행은 필수불가결하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전반성적 영역, 구체적 영역을 배제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회화는 이 영역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작업을 회화를 통해서 계속 연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첫 작업으로 최근에 세잔의 회화론에서의 세계와 깊이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였다(「세계와 깊이: 메를로-퐁티와 세잔의 회화를 중심으로」, 『철학논총』 제 67집, 새한철학회, 2012).

지각은 우리의 가장 원초적 영역이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지각의 영역 중 시지각과 공간, 특히 ‘깊이’다. 고전적 사유에서 시지각은 사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시지각을 행위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지각 활동은 신체적 행위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하는 자인 우리는 공간을 가진다. 따라서 시지각의 연구는 공간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깊이는 공간이자 세계이다. 세잔의 회화(론)에서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세잔에 관한 연구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회화론’에 있어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에서 보이는 세계는 화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사물의 세계, 즉 우리 몸의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틈틈이 화가들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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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그 자체'로 이해하거나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미리 구성하고 조작해 놓은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 단단한 틀을 무너뜨려 보고자 한다."
─심귀연, 『신체와 자유』, 「머리말」, 9쪽

이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한데, 나는 메를로-퐁티가 회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반가웠다. 어렸을 적 꿈이 화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나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최근까지도 나는 가끔씩 다시 붓을 들고 싶다는 욕구와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는 강박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림 그리는 것과 글쓰기가 ‘같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그 둘은 ‘다르다’고 말했던 어떤 이의 반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나는 그림을 그리는 스스로를 마치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매우 불성실한 사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를 연구하면서 나는 당당히 그림을 그리겠다고 선언하고, 학위논문만 제출하고 나면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학위를 받고 난 후, 2011년 한 해 동안은 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그림을 그려 유화물감을 옷에 묻히고 살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서도 일부러 욕구를 억누르거나 하는 것 없이 그림 속에 묻혀 산다. 그림을 마음껏 보고, 그림에서 표현하고 있는 화가의 세계 속에 들어가 내 삶을 보고 있다. 그러니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적 회화론에 관한 연구가 회화에 대한 나의 욕구를 달래 준다기보다는 사실상 이미 그 욕구를 해소시켜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시작하고 있는 이 연구는 내게 새로운 생기를 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신체’와 ‘자유’는 학문적 연구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그 개념이 표현하는 바대로의 삶을 실로 내게 열어 주고 있다.
신체와 자유 - 10점
심귀연 지음/그린비
2012/03/28 09:00 2012/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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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귀연 2012/03/28 10:15

    강의 마치고 폰을 확인하니 메일이 와 있다고 해서 얼른 들어와 봤어요. 제목 '우리의 삶에서 시작하는 물음, 철학!' 이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철학입문'강의 시간에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이야기가 그거였거든요. "철학을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철학은 우리의 삶속에서 나오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ㅎㅎ " 이렇게 말을 해도, 여전히 철학을 삶과 별개의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듯 합니다.

    • 그린비 2012/03/28 10:27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을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하하!
      삶에서 물음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하지만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