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바라보고 낯설게 배치하기

지금 막바지 작업을 한창 하고 있는 ‘사이 시리즈’의 표지 디자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먼저 ‘사이 시리즈’가 어떤 책인지부터 간단히 소개를 해보자면,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연구단에서 기획하여, ‘사이, 경계에서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존재와 사유를 그려 보고 발굴하는 책들’이라는 콘셉트로 경계 지워지지 않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각들, 말끔히 포착되지 않는 이질성의 사유들을 다루며, 앞으로 10여 권 넘게 이어질 시리즈입니다.

그 중 1~3권이 동시 출간으로 첫 스타트를 끊게 되어, 시리즈 전체를 아우를 아이덴티티와 각 권의 주제에 맞는 디자인이 함께 요구되는 작업이었습니다. 각 권의 타이틀은 다음과 같습니다.

1권 : 주체와 타자 사이 / 여성, 타자의 은유
2권 :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 /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3권 : 매체와 지각 사이 / 매체, 지각을 흔들다

‘탈경계인문학’이라는 기획 아래 다루는 분야들이 상당히 광범위해서 각기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들을 어떤 공통분모로 묶어낼 수 있을지가 하나의 중요한 과제였고, 또 하나는 주체, 타자, 여성, 텍스트, 이미지, 매체, 지각 등과 같은 각 권의 제목요소들을 드러낼 만한 이미지가 있어야 하는데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아 초반 아이디어 구상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는 데 좀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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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아이디어 스케치

디자인 프로세스는 본격적인 시안 작업에 들어가기 전, 편집자로부터 받은 디자인 의뢰서와 원고를 꼼꼼히 읽고 이해하여 책의 전체적인 인상을 머릿속에 제대로 옮겨 그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팩트(fact)부터 잠재되어 있지만 디자인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생각들까지, 디자인 초안을 그리는 데 필요한 무수한 텍스트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디자인의 뼈대가 될 만한 구체적인 ‘키워드’들을 추출하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창작하는 일이 그렇겠지만, 글자로만 존재하는 생각들을 이미지의 형상으로 펼쳐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두근대는 일이면서도 한편으론 꽤 어려운 작업임을 매번 느낍니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도 손으로 마우스질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아 참으로 막막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관적으로다가 한번 질러봐...”하는 생각으로 백면에 사선 하나를 딱~ 긋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원고 한번 읽어보고, 선 한번 쳐다보고, 다시 원고 한번 읽어보고, 선 한번 쳐다보고...를 반복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기도 했습니다.ㅎ_ㅎ

그러다 지..지푸라기라도 잡는 심... 아니,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서점에 나가 다른 책의 표지들(제가 작업하고 있는 책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 같은 책들)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바깥 시장을 구경하다보니,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와 혼연일체가 되느라 잔뜩 경직되어있던 신체에 조금씩 환기가 되면서, 지금 내 작업이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무얼 잘못 그리고 있는 것인지, 빠뜨린 부분은 없는지... 등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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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내 이름은 빨강』,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한국의 근대건축』이 책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온 저는... 핵심 키가 될 수 있는 문제를 부차적인 부분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A와 B 사이’라는 문구를 봤을 때, 처음에는 A와 B의 자리에 주제를 잘 드러낼 만한 임팩트 있는 이미지를 찾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들의 배치나 표현방식, 전체적인 구조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이냐에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 권마다 주제에 맞춰 이미지의 선택틀도 확확 바뀔 터인데, 이미지들이 담길 그릇에 대한 분명한 정의 없이 그때그때 주제에 맞는 좋은 이미지만을 찾는다면, 그것들은 각각 다른 결을 갖게 되어 결국 시리즈로서의 힘은 약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10여 권 넘게 이어질 시리즈라는 걸 고려했을 때, A와 B 자체를 드러내는 데 올인하는 것보다는 그것들 간의 ‘관계’, 그것들이 담겨질 ‘배치’와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를 비롯한 모든 개별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양새로 엮여 들어갔을 때, 어떤 형태로 놓였을 때 ‘사이 시리즈’만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각 권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를 상징적 혹은 은유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1컷의 대표 이미지를 사용하기로 하고, 그것이 ‘놓이는 형태’, 패턴이 되는 그래픽 요소나 타이포와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하야 아래의 1차 시안들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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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권의 메인이미지는 모노톤으로 톤을 맞춰 풀컷으로 사용하거나 패스이미지*를 사용하고, 선이나 면, 프레임 등의 그래픽 요소와 타이포의 배치에서 각 안들의 분명한 아이덴티티가 느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경계 지워진 것들의 ‘사이’를 읽고 밝히는 기획 시리즈의 일환으로 준비되었다. 주어진 과제로 여기서 읽어 내야 할 ‘사이’는 ‘주체와 타자 사이’이이다. ‘사이’라는 개념은 두 영역들의 경계가 단지 날카로운 선으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틈새와 여지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섬처럼 떠 있는 주제의 경계 선 밖의 타자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 역학, 소통 가능성과 불가능성, 표상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이 주제 안에 있다.

─『여성, 타자의 은유』 중에서(근간)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앞서 조심해야 할 표상이 있다. 그것은 ‘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흔히 타자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주자, 난민, 소수자 등과 같이 주변화된 특정 집단을 연상한다. 많은 글들이 이와 같은 특정 집단을 다루면서 ‘타자’ 개념을 사용한다. 그들이 ‘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주체와 타자의 개념, 그리고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다루면서 타자를 특정 집단으로 ‘동질화/정체화’하여 고정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타자성은 본질이 아니라 위치이며,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맥락적 구성물이다. 따라서 한 개별자 안에도 주체와 타자의 위치, 권력에 의한 주체/타자의 자리매김이 교차한다.                              

─『여성, 타자의 은유』 중에서(근간)

마지막 문장은 디자이너가 주변 세계를 바라보고 작업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 바람직한 생각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디자이너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모든 것에도 고정된 속성이란 없으며, 모든 개별 요소들은 그것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 무엇과 어떤 관계로 엮여지느냐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 즉 새로운 정체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정기간행물 작업을 하면서 대표님께서 함께 작업하던 디자이너들에게 강조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디자인은 균형이다. 이웃하고 있는 관계들 간의 균형. 개별 요소 하나하나만을 놓고 얘기하는 건 소용이 없다. 전체와 부분, 앞과 뒤의 관계, 흐름, 구조를 읽고 그것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뭔가 파격적인 걸 하고 싶다면 컨셉부터 달라야 한다.”

여차저차하여, 최종안으로는 사이가 띄워진 프레임을 패턴으로 하는 4번 시안이 선택되었습니다. 각 권의 이미지는 이 프레임에서 완전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경계 지워지지 않는 공간에 걸쳐져 있는 형상입니다. (잘...모르시겠다구요? 크헉-_-;;)

1,2,3권에 다 적용을 해보면 요렇게 됩니다.(저도 내심 이 안을 밀고 있었던지라 여간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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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요즘 회사 내에서 하고 있는 세미나에서도 이런 연장선상의 내용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흠흠)

“실체적인 어떤 욕망이 있고 그것이 조건에 따라 다른 대상에 투여되는 게 아니라, 관계라는 조건에 따라 본성을 달리하는 욕망이 그때그때 만들어지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와 무관한 어떤 본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의 본성은 관계에 따라 달라지고, 그것의 존속은 관계의 존속과 함께한다.”                                                    

“배치와 무관한 본성은 없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도 무엇과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어떤 ‘이웃’을 갖는가에 따라 다른 ‘사물’이 된다.”                                   

─『모더니티의 지층들』 중에서

그렇습니다! 배치와 무관한 고정된 실체란 없다는 말, 위치에 따라 자리매김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부여될 뿐이라는 말이 그제서야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개별 요소들을 어떻게 기존의 모습, 익숙한 배치에서 벗어나 다르게 구성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른 관계를 생성하고 변형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무조건 다르게, 낯설게가 아닌, 담아야 할 것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이 앞으로 저의 작업 가운데 계속해서 솟구쳐 나와야 함을 느끼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 일상을,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모든 것은 어떤 다른 차원에 존재하여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재배치, 끊임없는 탈코드화에 의해서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지루하고 획일적이고 불안한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 스스로 ‘다른 일상’, ‘다른 삶’을 기획하고 창안하고자 하는 의지. 거기서부터 출발하기 위해 늘 애써야겠습니다.

- 디자인팀 지은미

* 패스이미지(path image)
포토샵에서 이미지를 편집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 특정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배경을 없애기 위해 '펜툴'을 이용해서 'path'로 이미지의 외각을 따서 부분만 도려낸 이미지를 말합니다. 흔히들 '누끼컷'이라고도 합니다. 배경 이미지를 따로 만들어서 여러 이미지를 합성하거나 배경 없이 이미지만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 사이 시리즈 세 권은 4월에 여러분과 만날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요! ^^

2012/03/29 09:00 2012/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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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グッチ コピー

    Tracked from グッチ コピー 2013/12/18 03:29  삭제

    陳守備Yuwenhuajiを叱責され、突然ヒューという音音、この音を聞いて、彼は非常に似た音場の出会いを石龙武!|しかし、この時間は、彼は明らかにそう遠くない部屋から建物の中に、加害者を感じた。ビッグハートは、彼の身長のちょうどフラッシュ、それは完全に街から消えた、憎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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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용도 2012/03/29 09:22

    그랬구나.. 그랬어.. "한숨만 푹푹 내쉬"기도 했구나..
    말도 안 하고 오도카니 앉아서... (말이 없으니 그 속을 어찌 알아...ㅋ)

    • 그린비 2012/03/29 10:48

      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고민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예쁘게 사이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 것 같아요. ^^

  2. 아롱 2012/03/29 10:03

    댓글을 아니 달 수가 없네요..
    표지 보자마자 너무 예뻐서 눈이 반짝!! *_* 했는데, 이렇게 멋진 표지가 나오기까지 디자이너님의 이런 고뇌의 분투기가 있었던 거로군요!

    • 그린비 2012/03/29 10:50

      짝짝짝!! 일단 박수로 응원을 보내 봅니다~ ㅎㅎ
      앞으로도 '사이 시리즈'가 많은 분들께 사랑받을 수 있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