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사이’의 존재로 자각한다는 것

예전의 저는 스스로를 ‘사이’로 규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쉬운 예로, 친구들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뭐랄까, 친구들 입장에선 얘는 딱히 내 편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저쪽 편도 아니고, 내 입장을 말하면 어쩐지 이해해 줄 것도 같고, 또 객관적으로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해 줄 것도 같고……. 뭐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저야 모르죠…) 인간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저란 인간 자체도 어느 분야에서나 무엇 하나 특출한 점 없이 무난한 타입이어서 중간에서 ‘링크’를 하는 일이 적당히 어울렸고요.

그런 제게 ‘사이’란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혹은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규정될 수 있는,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움’과 어느 한쪽으로 수렴시킬 수 없는 ‘균형감각’의 표상과도 같은 것이었죠!! 라고 호방하게 말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자유로움과 균형감각이라는 두 단어가 나란히 놓기에는 좀 어색하고도 어설픈 사이라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저건 그냥 ‘얄팍한 바람’이었을 뿐입니다. 어느 한쪽에 속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스스로를 ‘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에 대한 안타까운 반증이랄까요? (음, 아무래도 ‘사이’보다는 ‘어정쩡’이 낫겠어……)

이런 인간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이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인지, 저는 여차저차 ‘편집자’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만, 그런데 하나의 직군으로서 이만큼 ‘사이’로서의 존재에 충실한 직군이 어디 흔할까요? 편집자(출판사)란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직군입니다. 저자에게는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독자에게는 좋은 컨텐츠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과정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는 이 편집자라는 존재는 저자와 독자 없이는 그야말로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족속이니까요.

그렇기에 최근의 ‘핫’한 사회적 경향들 — 이를테면 통섭, 하이브리드, 컨버전스, 경계의 사유 등 — 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거니와, 한 사람의 편집자로서 ‘어쩐지 자기 자신을 말해 주는 것만 같은’ 이 느낌 때문에라도 흥미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 바로 ‘사이 시리즈’였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대상물을 특정 단어로 규정하고 선을 긋기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규정이 때로는 불가피한 것임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이런 식의 규정이 혹시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떠나지 않는 저로서는 이 ‘사이’가 어떻게 미끄러지며 유동하는지, 그 속에서 어떤 존재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어떤 사유가 싹트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기대되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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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 <앵그르의 바이올린>

시리즈의 각 권은 저자 선생님들이 자유롭게 결정하신 두 개의 키워드에 ‘사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형식의 부제만 확정되었을 뿐, 사이라는 주제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실지, 구성과 형식은 어떻게 할지 등은 전적으로 저자 선생님들께 맡긴, 느슨한 형태의 기획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리즈의 첫 권 『여성, 타자의 은유』는 ‘주체와 타자 사이’가 제시어인데요, 단순히 ‘주체와 타자, 양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두 단어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로서의 여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독특했고, 또 ‘여성 철학자’로서의 저자 자신에게 절실했던 문제의식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크게 와 닿았습니다. 예컨대 새로운 주체(초인)를 세우고자 했던 니체의 은유적인 여성 비하 발언들이 남성인 제 눈에는 그저 조금 불편한 것이었다면, 여성인 저자에게 이것은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는 고된 장애물이었을 것입니다. (아, 나는 진짜 ‘사이’도 아니었어, 어정쩡이었어……)

2권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에서 두 개의 대상이 어떻게 서로를 침범하고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나 아폴리네르의 상형시 등 텍스트와 이미지를 하나의 캔버스 안에서 결합시킨 독특한 실험들을 단발적으로는 보고 들은 바 있었지만, 이렇게 하나의 키워드 안에서 꿰어 읽는 재미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숨겨진 의미들을 읽어 내는 재미가 쏠쏠했지요. 한편으로는 내가 텍스트와 이미지를 결합한 예술 형식을 빌려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 다들 저게 뭔 헛짓거리냐고 욕하겠지, 결국 뭐든 기본은 탄탄해야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는 거구나, 안 될 거야, 아마…… 싶었습니다. (아, 나는 진짜 ‘사이’도 아니었어, 어정쩡이었어……)

3권 『매체, 지각을 흔들다』는 ‘매체와 지각 사이’를 주제로 매체가 지각을 어떻게 발달시켜 왔고, 지각이 어떻게 다음 매체의 발달을 이끌었는지를 탐사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확장하고 이끄는 이 과정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지각’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꼬부랑글자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던 인간이 암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세계의 재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단순한 재현을 넘어 매체에 의도를 담으려 하고, 심지어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들을 통해 인간은 그 능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렇게 ‘사이’에서 일어나는 확장의 양상들을 보고 있자니 아, 나도 좀 확장되었어야 하는데 그냥 멍이나 때리고 있었구나 싶었네요. (아, 또 나는 진짜 ‘사이’도 아니었어, 어정쩡이었어……)
 
단 세 권의 책 ‘사이’에서도 이처럼 ‘사이’의 결은 다양합니다. 규정 불가능한 ‘사이’라는 말 자체의 속성상 당연한 말이겠지요. 인간은 확실성과 명징함을 추구해 온 만큼이나 이질성과 모호함에 끌려 왔고, 사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다양한 결들이 만나고 흩어지면서 새로운 존재와 사유가 잉태하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위대한 사상과 예술은 신과 인간, 죽음과 삶, 자연과 사회, 이성과 본능의 ‘사이’에서 자라나지 않았던가요? 편집자로서의 저도 어정쩡이니 뭐니 하는 자학은 집어치우고, ‘자유로움’이니 ‘균형감각’이니 하는 식의 그럴싸한 단어들로 의미 부여를 하고 앉았을 것이 아니라, 사이가 품고 있는 풍요로움을 읽어 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독자의 욕구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사이적인 존재’로서 저를 비롯한 편집자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아닐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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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쿠쉬, <사랑의 열쇠>

저는 이 글에서 ‘편집자’라는 정체성으로 스스로의 ‘사이 됨’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나 사이 아니겠어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를 둘러싼 동료들과의 사이에서 자라나는 존재이자 수많은 대상들 사이에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하는 존재로서 말이죠.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의 ‘사이 됨’을 자각하는 것은 우리를 더 넓은 사고의 지평으로 이끌뿐더러, 우리가 결국 모두 이어져 있음을, 그렇기에 겸허해져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이’란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니까요.

(+) 내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이네요. 우리를 정치와 이어 주는 ‘사이’의 일꾼들을 뽑는 날이지요. 투표야 개인의 선택이고, 이왕이면 하시면 좋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와 정치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다시 질문해 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투표로서 그 ‘사이’의 풍요로움을 지워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말입니다.

-편집부 태하
여성, 타자의 은유 - 10점
김애령 지음/그린비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 10점
조윤경 지음/그린비
매체 지각을 흔들다 - 10점
천현순 지음/그린비

2012/04/10 09:00 2012/04/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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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위묘 2012/04/12 02:43

    "아, 나는 진짜 ‘사이’도 아니었어, 어정쩡이었어……"가 컨셉이시군요. (...)

    • 그린비 2012/04/12 10:59

      아하하! 라임같은...(응?) 포인트가 살아있달까요;;; (막 이럼;;)
      그나저나 홍위묘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죠? ^^

    • 홍위묘 2012/04/12 19:29

      네. 그럭저럭(응?) 잘 지냅니다ㅎㅎ; 요샌 자주 못 들어왔네요;

    • 그린비 2012/04/13 11:54

      오랜만에 댓글로 만나니 반가워서...^^
      자주 뵈어요. 쿄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