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철학에서 “여성, 타자의 은유”를 읽는가?

김애령(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때 10대의 내가 느꼈던 그 숨 막히는 불안은 지금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부장의 부르주아 질서가 지배하는) 가정이라는 안온한 “빛”의 세계와 (악동 프란츠 크로머가 끌어들인) 그 바깥 “어둠”의 세계 사이에 선 소년 싱클레어의 불안은 내 것이었다. 몸이 저리도록 다가오던 불안, 물음, 모색. 20년 쯤 후에 다시 읽는 『데미안』은 달랐다. 다시는 그 절실함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자기의 주인이 되는 자유에의 추구,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건설할 수 있는 성숙한 주체, 그것을 향한 성장. 『데미안』을 읽던 10대의 나는 내내 데미안을 동경하는 싱클레어였다. 내가 어떻게 베아트리체나 에바 부인과 동일시할 수 있었겠는가? 『데미안』 같은 “성장소설(Bildungsroman)”을 읽고 있는, 강한 자아를 소유한 자유로운 주체로 성장하고자 했던 내가 우연히도 성별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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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쿠쉬, <사랑의 탄생>

2.
“여성, 타자의 은유”는 나에게는 오래된 주제다. 독일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일어로 읽는 서양철학이 그랬고, 또 많은 철학들이 감추고 있던 성별이라는 “우연성”이 그랬다. 나는 결코 주류, 중심, 자기의 것을 하는 자기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당시 함께 철학책을 읽는 모임이 있었다. 그날은 아도르노와 호크르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첫 번째 에세이인 “계몽의 개념”을 읽기로 한 날이었다. 그 모임의 (남성인) 동료가 (그는 종종 나를 “김형”이라고 불렀다.) 이 텍스트에서 “발견”한 두 개의 단어를 내게 가져왔다. “wir, Männer...(우리, 남자들...)” 보이지 않았던 것,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나도 그 텍스트를 주제를 따라가고자 애쓰면서 꼼꼼히 읽었고,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게는 이 표현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남자들.” 그것은 내게 아주 복잡한 심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 비판이론의 대가, 부정 변증법의 이론가, 그들, 남자들. 이 에세이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대화에 기초한 것이므로 이 표현은 그저 “우리(남자)들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읽을 수 있다. 이 두 단어는 글 전체의 본의와 무관한 아주 작은 표현, 우연하고 사소하며 무의미한 얼룩일 수도 있다. 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두 단어는 그날 우리의 토론꺼리가 아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낡은 독일어 문고판 책을 다시 꺼내 이 단어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첫 자부터 마지막자까지 꼼꼼히 다시 읽을 시간이 지금 내게는 없으므로. 혹은, 이 두 단어는 어쩌면 “보르헤스적” 실재일까?) 아마도 한글 번역본에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wir, Männer...”, 그것이 원본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비유처럼 여겨진다. 많은 경우 철학자들에게서 “성별”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도록 숨어있고, 드러났다가도 다시 흩어질 것이다.

3.
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그들과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물음을 던지고, 그들과 함께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서구의) 남자들”이 철학을 한다. 애써, 그 “우리, 남자들”은 하나의 우연, 무의미한 상투어, 사소한 일상어의 흔적이라고 믿고자 한 것은 가상이었거나 바람이었을 것이다. “우리, 남자 철학자들”이 성별을 삭제함으로써 “남성”이라는 성별을 새길 때, “우리, (비서구의) 여성 독자들”은 그것에 대해 무감각하고 둔감해지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여자들에게 가려는가? 채찍을 잊지 말라.” 예를 들어, 니체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수시로 만난다. 이 아포리즘을 어떻게 의연하게 읽어낼까? 이 불편함은 극복해야하는 여성 특유의 “히스테리”인가? 자궁을 가진 나는, 여유 있게 읽고 의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은 아닌가?

『주체와 타자 사이: 여성, 타자의 은유』는 레비나스, 니체, 데리다와 같은 내가 사랑하는 철학을 성별이라는 관점에서 해체하면서 읽으려는 노력이었다. 이와 유사한 해체적 읽기는 계속해서 긴 리스트를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이나 사르트르,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 뿐 아니라, 그들을 비판하고 해체했던 “타자의 철학자”들에게도 여성이 여전히 타자의 은유였다. 이 읽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책이 만들어진 지금까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 독자인 나는 그렇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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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데이네카, <책을 들고 있는 여자>, 1934년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고 있는 여성을 모델로 한 아름다운 그림들이 담겨 있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나는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다르게 읽는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주류, 중심, 주체, 자기의 자기가 될 수 없는 위치에서,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여성, 타자의 은유 - 10점
김애령 지음/그린비

2012/04/17 09:00 2012/04/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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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7 11:01

    참 아름답고 정갈한 글이네요. 저자 분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 그린비 2012/04/17 13:32

      비님 안녕하세요. ^^
      글이 그 사람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지요!
      자주 뵙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