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말 없음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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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나의 어머니>

주체적 자아가 남성다운 힘을 획득하는 것은 거주 공간에서 친밀한 타인, 말없이 부드럽게 수용하고 이해하는 타인인 ‘여성’의 존재를 통해서이다. …… 거주 공간에서의 친밀한 타인을 형상화하는 ‘여성’ 은유는 “말 없는 이해, 환대와 영접, 부드러움, 연약함, 집을 지키는 자, 거주를 돌보는 자, 수용적인 존재, 즉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개념망을 펼친다.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91~92쪽

위 글은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에서 ‘여성’이 ‘타자’의 은유로 활용되는 맥락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 책은 레비나스, 니체 그리고 데리다의 ‘여성’ 은유를 비판적으로 읽으며 여성이 주체=남성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는데요, 저는 위의 인용문 부분이 눈에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레비나스의 해석이 정말이지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현실과 맞닿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이 여성을 위와 같이 인식하게 된 것은 오래지 않은 어떤 역사적 시점부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이지요. 물론, 레비나스의 여성과 남성의 은유는 실재하는 여성과 남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타자와 주체의 은유일 뿐이지만요.

여성을 친밀함, 연약함, 수용적 존재, 돌봄을 하는 자 등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일반화된 것은 근대에 와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위트홈’ 이데올로기가 만연하게 된 어느 시점부터인 것 같은데요, 한국에서는 이른바 ‘중산층’ 담론이 확산되던 90년대가 여성에 대한 위 이미지가 일반화되는 가장 절정기가 아니었나 해요. 90년대, 특히 87년의 대투쟁 이후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한 방식으로도 ‘스위트홈’ 이데올로기의 위의 여성 이미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고생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안식처를 아내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일터라는 먹고살기 위한 전장에서 안식처인 가정으로 등등. 특정 대기업의 경우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자신들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상대로 교육하며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길들이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사례 분석이 예전에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었는데, 무척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조주은, 『현대 가족 이야기』, 이가서, 2004).

각설하고, 앞서 위 이미지가 사실 남성들이 여성들을 보는 현실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고 했는데요. 어쩌면 저도 모르는 제 마음속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그러지 않다고 부인하고 싶지만, 모르잖아요. 자기 삶을 스스로 평가하는 건 쫌 섣부르고 ... 뭔가 그렇잖아요. 아무튼 제 자신을 떠나서도 조금만 가까이서 보면 이는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만 해도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늦게 안 들어오면 뭔가 되게 불안해하고 불쾌해하셨거든요. 어머니가 귀가하실 때까지 밥도 안 먹고 ‘꽁’하니 버티시다가 나중에 술을 드시고 화풀이를 뒤끝작렬로 하시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경제적 활동을 하기 힘들어질 때쯤에는 어머니의 바깥나들이나 경제활동을 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반겨줘야 하는 사람, 내 경제능력 아래에서 나를 떠받들어야 하는 그런 사람을 많은 경우, 아내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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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베리(Richard Bergh), <북유럽의 여름 저녁>
"타자성은 본질이 아니라 위치이며,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맥락적 구성물이다." (김애령, 『여성, 타자의 은유』, 9쪽)

위 인용문에서 사실 정말 눈이 확 가는 표현은 “말 없는 이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가 당신이 살아온 삶을 무협소설처럼 찬란하게 묘사하는 모습은 간혹 봤지만, 어머니가 당신의 역사를 들려주는 건 보지 못했다는 것을요. 나는 왜 어머니의 삶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까 하는 생각에 무척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타자로서 어머니/아내는 말 없는 이해를 주체인 남편/아들에게 주어야 하는 존재로 길들여지지요. 가끔 어머니가 속상해 하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할 때 피곤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던 기억도 제 마음을 괴롭히는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타자로서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체와 타자 사이’라는 시리즈물 내의 기획명으로 나온 이 책에서 이 권리 없음은 근본적으로 주체라고 규정된 남성들과의 관계, 그 ‘사이’에 근거한다고 설명하네요.

저는 가끔 예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어머니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걸 느낍니다. 그게 그 ‘사이’ 속에서 아버지가 느껴야 했던 것이 불안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여성, 타자의 은유 - 10점
김애령 지음/그린비

2012/04/18 09:00 2012/04/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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