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소수자이다

4월 20일 오늘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입니다. 흔히들 ‘장애인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이지요. ‘장애인의 날’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는 명칭에서 오는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장애인의 날’이라는 명칭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차별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장애인의 날’의 전신이 ‘재활의 날’이었다고 하네요. 장애 문제를 (‘정상화’에 다름 아닌) ‘재활’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우리 사회의 관점이 바로 여기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날 치러지는 각종 행사들만 보아도 그렇지요. 당일 하루 ‘보여주기’ 식으로 치러지는 행사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전시성 행사들에 장애인당사자들의 고충과 목소리가 제대로 담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 2시부터, 서울 보신각 앞에서는 장애인차별철폐투쟁 결의대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물론 오늘 특별하게 있는 행사가 아니라, 매년 있어 왔던 행사이지요. 이날 하루, 이례적인 ‘대접, 시혜’를 받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근본적으로 철폐될 수 있도록, 많은 장애인당사자 분들과 활동가 분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 크고 작은 목소리들을 낼 예정입니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부커진R』1호에 실렸던 고병권 선생님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님의 대담 내용을 몇 부분 발췌해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장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 장애인들이 이 투쟁에 삶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 우리가 장애인들과 연대해야 하는 이유 등 우리에게 생각해 볼 지점들을 던져 주는 뜨거운 말들 속에서, “우리는 모두 소수자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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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박경석

장애인의 인권

고병권 인권 문제를 말씀하셨으니 말인데, 선생님은 장애인 투쟁에서 자주 근거가 되는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권은 어찌 보면 권리 이전의 권리, 단지 인간이기만 하면 가지고 있다고 가정된 권리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이기만 한 사람’,  즉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떤 법적․제도적 기반도 갖지 못한 사람, 그래서 인권이라는 말이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는 인권이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자기 권리를 사회에서 관철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그저 인간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의 호소는 기껏해야 인권위의 ‘권고’를 끌어내는 수준에 머물며, 결국 실질적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인권위를 찾고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해 보입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투쟁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에 기대는 것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박경석 저는 그것을 괜찮다거나 좋다기보다는, 그게 바로 우리의 한계, 장애인운동에 대한 한계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일단 인권위 가면 편안하지 않습니까? 농담입니다(웃음). 장애인들의 투쟁에는 관심들이 없죠. 관심이 없어 언제 어떻게 죽어 나가는지도 모르고. 어떤 시설에서 성폭력이 났다거나 몇 억씩 떼먹었다고 해도 잠깐 시선을 주는 정도죠. 그런데 인권위로 가는 문제들, 인권위 권고를 끌어낸 것들은 언론이 제법 잘 받아주죠. 그런 측면에서 인권위 활용은 유용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계가 있어요. 어떤 문제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 가령 한미FTA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 것에 대해선 진지한 토론을 하지 않습니까. 저는 장애 문제에 대해서 「100분 토론」이나 이런 데서 한번이라도 본질적으로 제대로 토론된 것들을 보지 못했어요. 그냥 4월 20일 장애인 날 되면, 장애인들 모아놓고 연예인들 쭉 해가지고 체험 한 번 하고, “어떻습니까” 인터뷰 듣고, “힘드네요”, 그러면 “정말 힘듭니다, 열심히 도와줍시다”, 이 정도의 아름다운 토론을 많이 하죠. 이 정도의 관심은 있지만 본질적인 부분이나 과제에 대해서는 주류 언론에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 인권위에 들어갔던 것, 그리고 인권을 활용하는 것이고요. 인권위원장이 다음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만 우린 다음에 또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웃음). 인권위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그러면서, 또 왜 그러냐고 말도 하고요. 투쟁과정 속에서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지요. 그런데 인권에 호소하는 것과 인권위의 권고가 그것들을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 자꾸 추상적 인권으로 몰아가는 것, 계급성도 없는 보편적 인권은 아마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 있는 자신들의 정치 안에 문제들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장애는 극복되어야 할 무엇인가?

고병권 일반적으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게 장애 문제의 해결이라고 봅니다만, 장애란 정말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결핍이나 결함입니까? 한 5년 전쯤인가, ‘전국에바다대학생 연대회의’라는 단체에서 나눠준 유인물에 이 질문이 있었습니다. “장애는 극복되어야 할 무엇인가?” 정말 공감이 가는 질문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의 투쟁에 결합하고 장애인을 돕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장애를 딛고 선 승리’라든가, ‘장애를 함께 극복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만, 장애를 빠져나와야 할 어떤 것,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정의하면, 장애인은 자기 존재를 도저히 긍정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장애인을 어떤 존재라고 보십니까?

박경석 장애인은 장애인이죠(웃음). 장애인이 장애인으로 불리기를 싫어했던 것은 일단 이데올로기적으로 낙인찍혀 있기 때문이지요. 장애인으로 스스로가 그렇게 불리기를 힘들어하는 것이고, 가족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스스로의 문제도 있고, 이 사회의 문제도 있고. 그런데 장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장애를 극복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겁니다. 그것이 주류의 생각이었죠. 장애인 너희들이 열심히 비장애인의 삶을 살아야 된다, 그 기준에 맞춰야 된다, 라는 식으로. 장애 문제를 그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고병권 재활 담론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재활 담론은 재활에 실질적 도움이 되기보다는 사회를 재활 쪽으로 몰아가면서 그것에 뒤쳐지거나 모자란 사람들을 분별해 내는 기능을 합니다. 재활이란 이른바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재활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비정상인’을 골라내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낙인찍는 일은, ‘정상인 되기’에 대한 사회적 강조 속에서 훨씬 강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박경석 예, 그렇죠. 제가 치료를 해서 빨리 걷게 하는 것이 재활의 궁극적인 목표죠. 장애인들이 복지관 같은 곳에 가면, 저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직업훈련을 받았는데, 재활의지를 다져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보통 ‘재,활,의,지’, 써놓고 외치고 하지요. ‘장애 입었기 때문에, 즉 기준에선 떨어졌으니까 떨어진 것을 더 열심히 해서 재활의지로 이 기준까지 채워야 된다’는 식이죠. 이런 게 재활 담론입니다. 과거엔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제가 졸업한 복지관에서 수없이 발생한 일인데, 장애여성이 수공예 기술을 배워 취업해서 6개월 이상씩 5~6만 원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장시간 노동을 착취당하다가, 돈 좀 올려달라고 이야기한다거나 너무 힘겨워 그만두게 되면 사장이나 복지관 상담선생님은 니가 장애인인데 니 꼬라지를 알아라, 이 세상 살아가기 힘든데 그런 것도 못 참고 나오면 의지가 박약하다, 뭐 이런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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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의 삶을 장애/비장애로 구분짓는가? 그 구분의 척도는 무엇으로부터 나왔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삶을 건 투쟁

고병권 어떨 때 장애인들의 시위는 아주 과격해 보입니다. 쇠사슬 같은 걸로 철로나 육교, 사다리에 자기 몸을 묶을 때 그런 느낌이 확 오죠.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경찰한테는 가장 안전한 시위방식입니다. 경찰은 거의 다치지 않고, 주로 병원에 실려 가고 기절하는 건 장애인분들입니다. 과거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를 생각해 보면 경찰도 많이 다칩니다. 물론 시위대는 경찰폭력으로 더 큰 부상을 입습니다만. 그런데 선생님의 투쟁을 보면 비폭력 투쟁처럼 보입니다만 또 그다지 평화스럽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글쎄요,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비폭력 과격투쟁’의 느낌을 받습니다.

박경석 아, 물론 화염병 들고 죽창 들어라 하면 우리는 할 수가 없죠(웃음). 저는 저희 싸움이 자신들이 표현할 수 있는 방식, 특히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표현하는 방식, 삶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 보는데 기어가는 게 ‘부끄럽다’부터 시작해서 이런 게 맞느냐까지 우리 안에 논쟁이 굉장히 많아요. 과격하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꾸릴 때에도 ‘쟁취’란 말을 쓰느냐 ‘확보’를 쓰느냐 때문에 몇 시간을 싸웠어요. 1980년대도 아니고 지금이 2000년대인데, ‘쟁취’라는 단어가 비장애인한테 너무 과격한 용어로 들릴 수 있다는 거죠. 대신 ‘확보’는 좀더 시민적이고 아름답게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니냐, 보편적으로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장애인 삶이 엿 같은데 무슨 욕먹어, 내가 지금 인생이 엿 같은데 다른 사람한테 잘 보여서 뭐 할 게 있는데, 이때까지 잘 보였으면 됐지. 사실 장애인 누구의 아름다운 삶, 이런 거 다들 말하죠. 장애인 문제를 말할 때는 눈물 뚝뚝 짜게들 만들려고 하죠. 그러나 그런 걸 ‘또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3시간 논쟁하다 가위바위보로 정해서 ‘쟁취’했죠(웃음).

장애인만의 문제?

고병권 제게 장애인들의 투쟁이 크게 와닿은 계기는 최옥란 열사의 죽음, 아니 그 분의 삶이었습니다. 다른 중증장애인분들도 비슷하실 것 같은데요,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 분이 학교를 실제로 다닌 것은 초등학교뿐이었고, 또 이혼녀였고, 기초수급권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분이었고, 이 사회에서 나쁜 조건은 다 가지신 분 같았어요. 중증장애인, 저학력자, 여성, 이혼녀, 빈민. 언뜻 보면 이렇게 운이 없을 수 있을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가혹할까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지만, 조금만 따져보면 이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의 소수성을 가지면 다른 소수성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크죠. 중증장애인이면 학교 가기가 힘드실 거고, 학교를 못 가면 직업을 구하기 힘드실 거고, 직업을 못 구하면 경제가 안 좋아지는 게 너무 당연하고. 그게 안 좋아지면 당연히 이혼소송에서 아이를 찾을 수 없고. 그 분은 재수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지배논리가 그에게 완전하게 관철된 것이죠. …… 제 개인 생각으로는 1970년대의 차별과 배제를 압축한 인물이 전태일 열사였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최옥란 열사의 삶과 죽음이 거기에 해당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혼자 싸워나가셨지만 사실 가난한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장애인들, 여성들, 이들의 모든 저항의 목소리가 그분의 목소리에 담겨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선생님께서 이동권 투쟁이나 활동권 투쟁 말고도 사회의 여러 소수자들의 투쟁에 결합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소수성은 다른 소수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런 운동의 결합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만. 중증장애인의 삶이 바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고요. 소수자들의 연대 내지 동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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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떤 삶의 기술을 갖고 있는가. 바로 '생각하기'이다.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삶', '지혜로운 삶'을 좋은 삶이라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없음' 내지 '생각할 수 없음'이다." ─고병권, 『추방과 탈주』, 145쪽

박경석 잘해야 되겠죠. 사회적 연대, 말은 뭐 거창합니다. 철도 문제도 그렇고 비정규직, KTX 투쟁도 그렇고 다른 투쟁들도 다 연관되어 있다는 건데, 저는 연관이라는 문제는 당위적인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장애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저는 장애운동의 시급함, 현실의 처절함 이런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체제나 가치가 강요하는 지점의 최전선에 장애인이 소수자로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쉽게 녹고 포섭될 수 있지요. 복지라는 게 일정 정도 경제성장이 되면 기만적인 선전물이 되지요. 미국이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다, 아까 말한 자유권적 측면에서 장애 문제가 해소되어 있다고들 하지만, 경제적 평등에선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극빈곤층 대다수를 장애인이 차지하고 있더라구요. 뭐 일부 똑똑한 장애인들이 장애극복 신화를 갖고, 그런 걸로 장애운동을 주도하지만 대다수는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지요.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이제 연대, 그것도 아래로부터의 연대전선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그동안 우리가 자족적으로 해왔던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더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말씀하신 것처럼 비정규직 문제, 소수자 문제, 장애여성 문제, 이런 문제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가령 비정규직 문제만 하더라도, 장애인 대다수가 그렇게 살거든요. 노동 영역 내에서 비정규직으로. 여성 문제도 있지만 여성 내 장애여성 문제도 있구요. 이것을 극복하는 방식은 아래로부터의 연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정리: 편집부 김미선

1. 고병권 선생님의 신간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가 다음 주 월요일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다양한 정치적 실험을 통하여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뉴욕 월스트리트 점거 소식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주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책입니다. 새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해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99%다’라는 말이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면,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장애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2. <알라딘인문학스터디> 14기, “우리들의 리얼한...사회탐구생활”이 열립니다.
5월 4일 정치탐구특강에서는 위의 대담자 중 한 분이신 고병권 선생님께서 ‘월가를 점거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실 예정이고요, 5월 11일 사회탐구특강에서는 발달장애인계간지 『함께웃는날』편집장을 맡고 계신 김도현 선생님(『장애학 함께 읽기』 저자,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역자)께서 ‘철로를 점거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실 예정입니다.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장애인과의 연대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계신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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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성의 정치학 - 10점
그린비 + '연구공간 수유+너머' 기획/그린비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2/04/20 14:30 2012/04/2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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