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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볼 수 있거늘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것이 보이거든 뒤돌아보지 말고 흔쾌히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 그러나 보이지 않거든 멈춰 서서 가장 훌륭한 조언자들에게 물어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그리스로마 에세이』, 숲, 166쪽

오늘은 쉬어 가는 페이지로(뭘 했다고 쉬어?;)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좀 창피하기도 하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디자인을 천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아주 더 많이 어렸을 적에는 ‘화가’라는 입에 발린 낯간지러운 장래희망을 얘기하곤 했었는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언제부턴가 화가라는 꿈은 디자이너라는 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피아노 학원을 땡땡이치고 미술학원에서 수강료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등 미술과 관련된 활동을 재미있어 했는데,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몇 년간 일했고 그 덕분에 제 주변에는 아직 북디자인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 저처럼 출판사 디자인팀에서 일하는 친구 등이 있습니다.

북디자이너 친구들과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매번 거의 비슷합니다. 사장님이나 상사에 관한 이야기, 거래하는 출판사들의 만행, 맡은 일에 대한 하소연 내지는 회사에서 벌어졌던 어처구니없는 일화들…….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힘들어 죽겠다“는 것이죠. 어느 친구는 “노동법에 따라” 공휴일을 포함(ㅠㅠ)하여 1년에 15일의 휴가를 사용하는 것으로 회사의 규정이 바뀌어 올해 여름휴가가 4일뿐이라고 한탄하면서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있고(야근에 관한 규정 다 어디 갔어, 이거!), 어느 친구는 ‘내 일’을 하고 싶어서 프리랜서 길을 택했지만 스스로가 디자이너인지 영업자인지 헷갈린다며 더욱더 남의 일만 하고 있는 처지를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항상 “진짜?”, “대박!”, “헐~” 같은 감탄사를 담당하곤 하는데,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딱히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역시 서로에게 감탄사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도 같고요. 참 애매합니다잉.

저 역시 디자이너로 몇 년을 지내면서도 디자인이라는 직업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내가 디자인을 통해서 실천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나는 왜 굳이 북디자인을 하는지 등등에 대한 고민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일만 하기에도 버거운 삶을 살았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원래 다 그런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날그날의 기분은 맡은 일이 얼마나 쉽고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인가에 따라 좌우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빨리 일을 끝내고도 다른 일이 또 주어질까봐 눈치 보며 마음을 졸이곤 했습니다.)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에도 부족한 일상에서 생각과 고민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는 동안 책장에 나란히 꽂힌 책들은 그저 디자인 작업 결과물들의 나열일 뿐 더 이상 한 권 한 권 저마다의 넓이와 깊이로 응축되어 다양한 세계를 펼쳐내보이는 애정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쌓여가는 책들은 애물단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그렇다면 과연 저는 무엇을 위해 북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디자인이라는 직업은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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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자신의 독자를 찾아 나서고 삶에 불을 붙이며, 기쁘게 하고, 놀라게 하여, 새 작품을 만들어내고, 계획과 행동을 가진 영혼이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203쪽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인식하고 말로 풀어내는 데에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문제는 의외로 간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읽히기 위해 만들어지는 책이라는 대상을 읽기 위한 것으로 느끼지 않았던 탓이죠. 눈만 돌리면 주위에는 책들이 널렸고 '내가 명색이 북디자이너인데~' 하는 생각으로 책이라면 이미 통달한 듯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읽는 것과 디자인하는 것을 별개의 행위로,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디자인하는 것을 읽는 것보다 우월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디자인을 해야만 누군가가 읽을 수 있고, 게다가 내가 디자인해 놓은 대로 읽을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를 더 위대한 사람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책표지는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얼마나 명확하게 담아내느냐의 문제보다는 얼마나 더 눈에 띄는, 그러니까 디자이너인 내가 얼마나 돋보이는 디자인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였고, 그러니 당연히 책의 내용에는 큰 관심이 없고, 저자의 주장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고, 이 책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따위도 관심이 없는 정체 모를 요상한 북디자이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지금까지 책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북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에도, 북디자이너로 생활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죠. 틈나면 읽을 책 한 권씩을 가방에 챙겨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린비에 입사하면서부터니까, 채 2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알게 된 읽음의 즐거움은 저를 많이 변화시킨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서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체감하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 얼마나 커다란 존재인가를 예감하기도 합니다. 보태어 디자인을 대하는 생각과 태도도 조금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린비에서 출간되고 있는 책들의 대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나 개념,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 이야기되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거나 패배감(;)을 맛보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다만 꼭 다짐하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책을 읽는 것과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항상 느끼며, 읽을 때처럼 즐겁게 디자인하고 디자인할 때처럼 진지하게 읽는, 독자이자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제가 디자인을, 바로 북디자인을 하고 싶은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 디자인팀 서주성

2012/05/04 09:00 2012/05/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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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na 2012/05/04 13:12

    여기 들어간 그림들,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좋네요 ㅎㅎ

  2. 2012/05/17 18:00

    재미있어요~ ㅎㅎ 의기소침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도 모르면서 아는척 하는 걸꺼에요. ㅋㅋㅋ

    • 그린비 2012/05/17 19:50

      하하하;; 응원의 기(氣)를 저도 함께 보내겠습니다!! ^^

  3. 소현 2012/12/05 23:28

    안녕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북디자인 관련하여 질문을 해도될까요?. 저는 인문학을 전공하고 졸업예비생이 된 지금에서야 북다자인쪽에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미술을 전공한것도 디자인을 전공한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것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일단 출판편집자자격증을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하려 하는데 이것부터 준비해도 좋을지, 아님 뭐부터 시작하는게 좋을지 조언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