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화폐를 알고 싶었나?

화폐가 하나의 독자적인 앎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다른 어떤 것들로부터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 [……] 화폐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인식되고, 그것의 영향력이 뚜렷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경험될 때, 비로소 화폐론이 생겨날 수 있다.

─고병권, 『화폐, 마법의 사중주』, 224쪽

명쾌한 문장들에 감탄하며 밑줄을 주욱 주욱 그으면서 읽다가 '앎의 대상으로 삼다'는 말에 한동안 시선이 꽂혔다.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표현이었다. 무언가를 그냥 안다/모른다 가 아니라 그 이전에, '앎의 대상'으로 '삼는' 다른 차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폐의 본질은 이성이라기보다는 신앙이다. … 우리 모두의 믿음이 저 무가치한 어떤 것을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71쪽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경제 과목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어쩐지 경제학을 꼭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제학을 이중전공 신청했고, 학점은 바닥을 전전하면서도 마지막 학기까지 상경대 근처를 맴돌았다. 왜 그랬냐고 하면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알고 싶었던 것 같다. 경제가 뭔지, 경제가 뭐기에 사람들이 다들 경제, 경제 하고 경제만 살려 준다고 하면 대통령도 시켜 주고 그러는지, 그냥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그냥’은 아니었나 보다. 무언가가 앎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내가 아는 어떤 친구는 그녀의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들의 기원이 가족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앎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전에 무엇을 인식하고 어떤 경험을 했기에 경제를 알고 싶었을까?

사실 나에게 경제란 잘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 크고 거대하거나 아니면 너무 소소하고 보잘 것 없거나 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많이 얘기되던 신자유주의 경제나 글로벌 금융 위기 같은 건 잘 알지 못하니 함부로 말하기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한 달 벌어 한 달 쓰는 나의 경제생활은 너무 빤하지만 그게 또 부끄러워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죄어 와서, 공부를 하고 지금보다 잘 알게 되면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경제를 앎의 대상으로 삼았고,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같은 강의를 들었지만 왠지 답답함은 더 커져만 갔다. 물론 내가 세세한 이론들의 풀이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모든 이론들이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몇 가지 가정들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상한 가정들로 가득한 이론 경제는 내가 궁금한 내 현실의 경제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경제학에서 너무도 당연하게 가정하는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_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은 화폐 꽃다발!
그래, 소비. 소비는 나에게 항상 고민거리였다. 소비는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것인데,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돈이 없을 때도 고민이었고 때로는 심지어 돈이 많아서도 고민이었다. 나는 돈을 헤프게 쓰는 편도 아니고 물건 욕심이 많은 편도 아니어서 종종 지출보다 수입이 많아 돈이 쌓이곤 했는데, 오히려 그럴 때 나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별로 많은 물건이 필요 없는데, 그럼 이 돈은 어디에 쓰지? 저금해 두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테니 그냥 통장에 넣어 둘까? 그럼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래서 나는 그냥 이유 없이 엄마에게 돈을 드려 버리기도 했다. 엄마는 항상 돈이 없다고 하셨고, 나는 돈이 남는데,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냥 드려도 내게 손해가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족, 공동체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나는 통장에 잔고가 늘어날수록 뿌듯한 그 마음을 알아 버린 것이다. 그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통장에 넣어 두기만 해도 든든한 그 마음. 숫자는 크면 클수록 좋다. 그리고 그건 몽땅 내 돈.

낭비가 일상화된 시대라서 절약이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아껴 쓰고 절약하는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덕목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 엄마는 반평생 알뜰하게 한 푼 두 푼 아끼며 살림해 오신 당신의 삶을 한스러워 하시며, 딸자식에게는 돈 좀 더 주더라도 좋은 거 입고 좋은 거 먹으면서 살라고 말하시겠는가. 한때 나는 내가 돈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통장에 저금도 열심히 하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게 거대한 착각이었다는 걸 안다. 나는 단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랐을 뿐, 결코 돈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돌고 돌아 내게 흘러들어온 돈들은 화폐의 교환 기능에는 충실하지 못했지만, 화폐의 축적 기능에는 무척이나 충실했던 것이다. 화폐를 무엇과 교환하고 싶다는 욕망이 특별히 없더라도, 그저 아무런 질적 차이나 특색이 없는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고만 싶은 욕망이라니. 그리고 오히려 교환보다는 이러한 축적이야말로 스스로 증식하는 ‘자본’의 형태에 더욱 가까운 것이 아닐까.

과거의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진정한 주체가 된다. 이제 개인과 개인의 연결은 공동체가 아니라 화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단지 화폐의 생산이 목적이며 화폐를 통해서만 사회적 관계맺음이 이루어진다.

─고병권, 『화폐, 마법의 사중주』, 「맑스의 분석」, 41쪽

내가 ‘칠토七土’여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이 많고 내 영역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보호 본능이 무척 강하다. 내 것을 잘 챙기고 잘 쌓아 두고, 잘 흘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내 것, ‘개인’주체로서의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서, 오히려 ‘공동체’나 ‘사회’에 대한 고민이 많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화폐’에 대한 나의 고민이 이러한 공동체의 파괴나 개인 주체의 탄생이라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전의 공동체들은 본능적으로 화폐와 교환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을 알고 거부해 왔는데, 화폐가 만들어지면서 공동체들이 해체되고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개인들이 모여 조직된 새로운 화폐 공동체를 우리는 사회라고 부른다… 라고 하니 마치 나의 존재 자체가 공동체와는 불화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찜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이처럼 역사적 사회적 배치 속에서 봐야만 나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제대로 알아야 다음 걸음을 어떻게 내딛어야 할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기쁘게 생각하기로 하자..!
       
이처럼 내 것을 고집하고 손해 보기 싫어하는 안정적인 성향이 강한 나인데, 요즘 나의 삶은 출렁출렁 요동치고 있다. 학생 신분으로 학교 다닐 때는 혼자서 듣고 싶은 수업 들으면 되고, 하숙방에서 혼자 살 때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세 달 전부터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을 하고 있고, 한 달 전부터는 동거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공동체라고 여기게 된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살게 되면 분명히 어느 정도 나의 사적 영역을 포기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서 일부러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다. 생활공간을 공유한다든가 물건을 같이 쓰는 것들. 그리고 우리에게 또 필요한 게 있었는데, 우리가 ‘텃돈’이라고 이름 붙인 공동자금이다. 분명히 화폐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인 개인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우리 안에 화폐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식구이지만, 가족도 아니고 공동체라고 하기도 애매하게 뭉쳐 있는데, 우리 안에 화폐는 어떻게 쓰이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램브란트, <벨사살 왕의 연회> _ 바빌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그의 연회에서 '더 이상 왕이 아닌 자'라는 예언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 속 '화폐'의 위치는 왕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화폐를 ‘앎의 대상’으로 삼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내가 삶에서 화폐에 대해 인식하고 경험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만 여겨져서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것들도 이렇게 앎의 대상으로 삼고 책을 읽어보니 새롭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화폐가 허구이고 신화라는 말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화폐는 허구다. 모두가 믿기로 약속한 허구. 그건 아마도 그렇게 믿어야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화폐가 구성된 사회적 배치 속에서 바라본 화폐는 그저 사물이 아니라 관계였다. 모든 차이를 제거해버리는 화폐에 대한 욕망은 독특한 욕망이었고 그것은 내 삶에서도 깊숙이 작용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의 ‘앎의 대상’은 계속해서 바뀌고 넓어질 테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냥 속으면서 편하게만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공부를 삶으로 삶을 공부로 풀어내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공부와 삶은 혼자 이루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함께 서로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세미나와 같은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리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 편집부 고아영
화폐, 마법의 사중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2012/05/11 09:00 2012/05/11 09: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75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