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관조 속에서 찾은 ‘자유로운 유희’의 미학!
 - 일체의 관심에서 벗어나, 미(美) 앞에서 오로지 자유로워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칸트 미학: 주요 개념들과 문제들』

시리즈명 : 철학의 정원 013
크리스티안 헬무트 벤첼(Christian Helmut Wenzel)지음|박배형 옮김
미학·철학|신국판(152×224mm)|344쪽|25,000원
2012년 9월 17일 발행|ISBN : 978-89-7682-385-4 93160

고전 미학의 정점이자 독일 낭만주의부터 포스트모던 미학까지 후대 미학 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온 칸트 미학, 특히 그 중핵을 이루는 저작 『판단력 비판』을 오늘의 독자들도 수월히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에 밀착해 해설한 책이다. 『판단력 비판』은 칸트의 고유한 개념들로 논의를 전개하며, 다른 3대 ‘비판’서(『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와의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 전반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무척 이해하기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 『칸트 미학: 『판단력 비판』의 주요 개념들과 문제들』은 이런 칸트 미학의 정교함과 그에 부수되는 난해함을 인정하면서, 그 용어들을 섬세한 언어로 풀이하고 여러 예시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많지 않은 분량에 칸트 미학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해석에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는 동시에 ‘추’나 ‘천재’ 같은 주제에서 칸트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부록인 “용어 해설”은 미학만이 아니라 칸트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며, 각 절(節)에 덧붙여진 “추천할 만한 읽을거리” 목록은 전문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미학’(Aesthetica)이라는 용어는 바움가르텐(A. G. Baumgarten, 1714~1762)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미학이 처음으로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그 기반을 다진 것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였다.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에 이어지는 3대 ‘비판’서의 마지막 권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미(美)를 진리, 도덕과 동위에 놓음으로써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크리스티안 헬무트 벤첼(Christian Helmut Wenzel)의 『칸트 미학: 『판단력 비판』의 주요 개념들과 문제들』(An Introduction to Kant's Aesthetics: Core Concepts and Problems)은 그런 칸트의 미학을 원 텍스트인 『판단력 비판』에 입각해 상세히 해설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영미권 칸트 연구의 권위자 헨리 E. 앨리슨(Henri E. Allison)도 말하듯, 『판단력 비판』은 “전설적일 정도로 난해”하고 “초보자에게는 거의 접근하기조차 두려운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칸트 미학의 핵심을 담은 『판단력 비판』은 그저 미학이라는 한 분야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두 ‘비판’서의 문제 틀을 계승하고, 또 개념들을 공유함으로써 ‘비판’ 철학의 완결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 때문에 칸트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유의 용어법 및 앞선 ‘비판’서들과의 관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해진다. 저자 벤첼이 특히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도 이것이다. “이 책[『칸트 미학』]은 …… 제1『비판』에 대한 선행 지식 없이도 읽을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이 요구되는 몇몇의 절들에서는 내가 직접 그것을 제공하고자 했다”(17쪽)는 그의 말처럼, 칸트 미학의 “주요 개념들과 문제들”이 칸트 철학 전체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충실한 안내가 제공된다. 특히 「부록」의 “용어 해설”은 칸트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데 내비게이션으로서도 유용할 것이다. 또한 이런 주제들이 으레 갖기 마련인 복잡한 이론적 논쟁의 역사는 최소화되어 독자들이 길게 에두르거나 헤매지 않고 칸트 미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원하는 독자라면 각 절(節)의 끝에 덧붙여진 “추천할 만한 읽을거리”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단순한 서지정보의 제공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서지와의 관계, 저자의 논평도 충실하다).

칸트 미학은 이후 실러, 괴테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독일 관념론과 독일 낭만주의의 흐름도 칸트 미학과의 긴밀한 연관성 하에 전개되었다. 나아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 역시 칸트 미학을 깊이 연구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굳이 칸트를 참조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면면을 더 나열하지 않아도 그가 현재진행형의 철학자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칸트 미학에 대한 입문서나 연구서가 태부족한 국내 도서 시장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리고 최근 칸트가 직접 저술한 ‘비판’ 철학의 입문서 『형이상학 서설』(통칭 『프롤레고메나』)가 번역 출간되는 등 칸트 읽기의 제반 환경이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 책 『칸트 미학』의 출간은 국내 칸트 미학 이해의 물꼬 트기로 이어질 것이 기대된다.

왜 칸트의 ‘미학’을 읽어야 하는가? : 반(反)엘리트주의의 미학
우리가 아무리 뭉크와 그의 상징주의에 대해, 또는 바흐와 그의 푸가의 구조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앎이 예술 작품을 올바로 또는 정확히 감상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이 예술의 산물이 마치 한갓된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렇게 임의의 규칙들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있는 모종의 합목적성을 위한 여지가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자유가 없이는, 오로지 규칙만 있을 뿐 미를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05~206쪽)

공연장을 나서면서, 혹은 수려한 자연 경관을 마주하고서, 우리는 자연히 자신이 느낀 무언가를 다른 이도 느꼈을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 동행한 이와 감상을 공유하며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열띤 토론을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자신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했는지 의심스럽고, 심지어는 감상을 달리하는 사람에 의해 교양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기분이 상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이 느낌이 단지 내 주관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어떤 객관적 규칙·규범이 있어서 ‘제대로’ 된 감상법은 그것에 의거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다. 사실 이런 일상 속 매순간의 의문이야말로 ‘미학’이 성립하게 된 동기일 것이다.

지금은 대철학자로 누구나 그 이름을 알지만, 사실 칸트는 그리 드넓은 견문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평생 동부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 주변을 떠난 적 없는 칸트는 세계를 유람하며 음악과 미술에 대한 감식력을 키운 교양인의 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미학 이론도 예술에 대한 감식안을 내세우는 엘리트주의 미학과 궤를 달리한다. 그는 ‘미’를 위한 여지는 감상자가 작품에 대한 더 많은 정보나 규범에 대한 지식을 확보함으로써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가진 대상으로서 작품을 파악할 때, ‘무관심’한 미적 관조 속에서 작품을 바라볼 때 마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일견 아리송한 표현이지만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미적 대상에는 어떤 다른 목적에도 복속되지 않고 오로지 미적 향유에 적합한 측면이 있다는 주장으로, ‘무관심성’은 여하한 관심(개인적·도덕적 이해득실에 대한 고려)으로부터 자유롭게 ‘미에서의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이 두 개념은 ‘취미 판단의 네 계기’에 속하며 1~4장이 각각의 ‘계기’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칸트는 선행자인 바움가르텐의 미학(그리고 기존 미학 전통)과 대결하며 자신의 미학 체계를 세웠다. 특히 미에 대한 판단인 ‘취미 판단’을 미숙한 ‘인식 판단’처럼 취급한 데에 반기를 들었다. 취미 판단이 인식 판단으로부터 독립되지 않고서는 ‘미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고, ‘바판’의 칼끝을 두 판단의 사이에 겨눔으로써 “미감적 판단의 문제들, 즉 어떤 자연 대상이나 예술이 아름답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와 정당화”(12쪽)에 주안점을 두는 수용자 중심의 미학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 관조는 그 자체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지 지식을 얻는 수단은 아니며, 이러한 상태에서의 감상자와 대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자유로운 유희’라고 이름 붙였다.

칸트 미학의 쟁점과 미래

벤첼의 『칸트 미학』은 단지 칸트의 개념들을 추수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론이 생산된 맥락을 차근차근 일러 주며 논의를 전개한다.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도, 그렇다고 또 그저 주관적이고 개인적 취향에 의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미의 문제를 다루는 만큼, 칸트는 신중한 태도로 양 극단을 피해 가려 했다. 저자 벤첼 또한 마찬가지의 신중함으로 칸트 미학의 주요 지점들을 남김없이 다루는 가운데, 책의 말미에서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인상적인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인장(印章)을 남기기도 한다.

‣ 추(醜)도 어엿한 미학의 주제일까?
그중 하나는 추의 문제이다. 저자는 “칸트의 미학은 추를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절에서, 비록 『판단력 비판』이 직접 추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것을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부정적(negative) 취미 판단’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직결되며, 흔히 ‘불쾌’라고 하는 감정이 ‘부정적 쾌’로서 다시 인식될 수 있음을, ‘자유롭고 조화로운’ 유희가 아닌 ‘자유롭지만 조화롭지 않은’ 유희도 존재함을 뜻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저자는 다른 문헌에서 ‘추’와 ‘부정적’인 것에 대해 논평한 것을 종합해 제시하는 한편, 보들레르의 시나 보스(Hieronymus Bosch)의 그림을 예로 들며 “추가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설득해 보인다.

‣ 뉴턴은 천재가 아니라고?

또 한 가지, 천재의 문제도 흥미롭다. 칸트는 천재를 생득적인 자질이자 ‘자연미’를 ‘예술미’로 옮기는 능력, 동시에 취미 판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능력으로서 정의한다(사실 ‘천재’ 개념은 칸트 미학이 미를 단순한 즐거움의 영역이 아닌 ‘도덕성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독특한 관점으로 밀어 올리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칸트는 이 ‘천재’ 정의를 현실에 적용하면서 상당히 놀라운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멈추고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천재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사람마다 목록의 세부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자, 그 목록 안에는 십중팔구 뉴턴의 이름쯤은 들어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칸트는 한 저작에서 직접 뉴턴을 언급하며, 그의 업적은 경탄스럽지만 어디까지나 학습의 결과이지 천재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학 박사 학위 소지자이기도 한) 벤첼은 “수학에 미와 천재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절을 통해 이 칸트의 주장에 반론을 펼친다. 칸트는 수학이 이미 구비된 ‘규칙들’에 의거하는 학문이라 보고 천재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했지만, 벤첼은 칸트 이후 수학 연구의 발전과 자신의 전문적 지식을 활용해 수학에도 창조적인 자유의 영역이 존재함을 (다소간의 재치와 함께) 입증해 보인다.

이렇게 벤첼의 독창적 주장을 담은 부분까지 읽기를 마친 독자라면, 이제 이 책과 더불어 오늘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미학적 토론들을 좀 더 본격적으로 음미하거나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또는 추하다고) 부르도록 만드는지를 알아내고자 애쓰는 대신에 판단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보다 넓은 전망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제 대상과 주체 모두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상과 판단하는 주체 양자 사이의 관계를 취미 판단 자체 속에 또는 그런 판단의 근저에 놓인 어떤 행위 속에 반영되는 관계로서 연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두 극단, 즉 취미를 단지 느낌이나 개인적 견해로 해석하는 주관적인 극단과 미학을 규칙과 증명의 문제로 간주하는 객관적인 극단, 이 모두를 피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27쪽)

취미 판단에 대한 칸트의 분석이 제공하는 첫 번째 기준은 ‘무관심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즉 어떤 대상은 내가 그것을 여하한 관심도 개입시키지 않고 좋아할 때 아름답다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욕망이나 지향점 또는 목적, 아니면 그 어떤 사회적・도덕적・지적 고려사항들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칸트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개인적 그리고 비개인적 관심사들 모두를 배제하고자 한다). 그때에만 이러한 대상에 대한 나의 관조는 ‘순수’할 수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것은 이 말의 이중적인 의미 모두에서 순수해야 한다. 그것은 우선 앞서 말한 고려사항들이나 관심사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해야 하며, 또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와 선천적인 합목적성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판단이 대상에 대한 나의 어떤 관심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나의 취미 판단은 자유롭고 순수할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그렇게 관심에 기초한 판단은 (엄격히 말해서) 진정한 취미 판단이 아니다. (60쪽)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에 어떤 사람이 땅에 떨어져 있는 시계를 발견했다고 상상해 보자. 그는 이것을 주워서 열어보고, 잘 살펴본 후 경탄한다. 그는 이 물건의 각 부분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들어맞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를 관찰하지만 이 물건이 무엇이며 이것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 관념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하튼 (각 부분들 상호 간의) 합목적성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언젠가 그는 이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거나 들어서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경우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목적이 없는 객관적 합목적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취미 판단에서처럼 주체와 그의 감정이 개재되는 경우에, 우리는 칸트가 일종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또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인데, 이때 이런 합목적성은 ‘목적 없는 주관적 합목적성’이다. (133쪽)

미술관에 가는 것은 숲에서 산책하는 것과는 다르다. 뭉크의 그림이나 명나라 시대의 중국식 화병을 보는 일은 길가에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는 일과는 아주 다르며, 바흐의 푸가를 듣는 일은 새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것들이 예술 작품이며, 그것들을 창조해 낸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솜씨와 어떤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예술 작품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가는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지녔고, 그 결과를 보거나 듣는 우리는 이것을 의식한다. 그런데 이것이 칸트의 미에 대한 설명에서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칸트에 따를 때, 어떤 개념도 우리의 취미 판단을 규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봉착한다.  어떤 정도로 또는 어떤 방식으로 개념들은 아름다운 예술에 결부되어 있을 수 있는가? (204쪽)

자연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무수히 많은 대상들을 산출해 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쩐지 자연과 부합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자연이나 신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또는 축복인 듯이 보인다.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자연을 아름답다고 여김으로써 자연에게 호의를 베푼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간에, 칸트는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와 도덕성과 같은, 우리의 내적 본성의 이념들과 보다 높은 목적들이 ― 인간이 도덕적 법칙 하에서 더불어 살고 있는 ― 자연과 사회 속에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고 시사한다. 그리하여 이성은 자유와 자연 사이를 잇는 다리를 지시할 수도 있는, 자연 속의 그 어떤 표지나 흔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242~243쪽)

지은이/옮긴이 소개 펼치기



2012/09/07 09:00 2012/09/07 09: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1781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