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발견한 새로운 대중!!
- 세 장의 그림에서 읽는 세 번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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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역사: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시리즈명 : 프리즘총서 009
스테판 욘손(Stefan Jonsson) 지음 | 양진비 옮김
인문・예술・역사|신국판(152×224mm)|304쪽|17,000원
2013년 2월 15일 발행|ISBN : 978-89-7682-769-2  03340

그린비출판사 <프리즘총서> 9번째 책.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89년의 동유럽 혁명까지 대중들의 인민주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탐구하고, 대중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분석한다. 여기에 크게 세 명의 예술가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대중을 묘사한 회화・문학・설치미술품은 당대의 사회가 기억하는 대중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친절한 분석틀이 된다.
이 책은 '대중은 어떤 존재인가? 이들이 어떻게 사회를 대표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 제임스 엔소르, 알프레도 자르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완성한 '혁명의 시각화'를 눈여겨보며 파리코뮌, 바리케이드, 68운동 등 각 시대에서 솟아오른 대중들의 움직임과 그들에 맞서는 사회를 설명한다. 위고와 플로베르의 작품에서부터 르봉의 대중심리학, 벤야민과 푸코를 거쳐 아감벤과 랑시에르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대중의 개념을 고민하고 사회를 그려 내려 했던 많은 연구자와 예술가들의 발상을 망라하여 보여 주고 있다.


올 겨울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레미제라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제목은 ‘비참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역사학자 루이 슈발리에에 따르면 그 비참함이란 “범죄, 빈곤, 실업, 노숙, 배고픔, 자살, 유아살해, 매춘, 알코올중독, 문맹, 거리의 아이들, 구걸, 그리고 파리 시민 대다수가 겪는,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물질적・정신적 결핍의 징후”였다. 이들, 최소한의 생존권과 자유를 박탈당한 채 궁핍하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비참한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사회의 가장 낮은 수준으로 존재하며 ‘위험한 계급’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대중의 역사』는 이렇게 생존과 권리를 위해 거리로 나왔던 대중의 그림자를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세 개의 숫자를 포함한 부제만큼이나 독특한 구성, 해당 시대의 미술 작품으로 대중과 혁명의 미학적・정치적 의미를 읽어 내는 독창적인 분석 방법 모두 독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프랑스 대혁명의 1789년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저자 스테판 욘손(Stefan Jonsson)이 꼽은 것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1889년, 일어나지 않은 상상의 혁명을 그린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1888년작)에서는 탈중심적이고 이질적이지만 경계를 넘어 하나의 공동체로 혁명을 즐기는 대중의 모습이 벨기에 화가 제임스 엔소르의 손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 혁명의 흐름 속에서 68운동의 박제화를 떠올린 알프레도 자르의 설치미술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은 투쟁의 목격자가 되어 대중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며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 책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수성과 저자의 독특한 분석을 통해 유럽 사회가 혁명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경험하는 동안 미술 작품이 시도한 대중의 재현을 조명한다. 여기에 귀스타브 르봉의 대중심리학, 아감벤과 푸코, 랑시에르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이론과 발상을 폭넓게 아우름으로써 대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민주주의 안에서 사회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 그것은 어떻게 대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대중은 모두가 호출하지만 아무도 호출하지 않는 존재이다. 보이되 보이지 않는, 들리되 들리지 않는 존재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 바스티유 광장을 둘러싼 거대한 바리케이드에 시선을 빼앗긴 관객에게 영화는 계속 질문을 반복한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름과 얼굴이 없던 ‘대중’(the people)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아주 특별한 시도이다.

오해받은 대중, 그들은 진정 광기와 전염병의 집단이었을까?

대중은 언제나 규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를 추동하는 주체라는 긍정적 이미지와 익명성 뒤에 숨어 다수의 힘에 기대어 행동한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오늘날 우리 앞에 기입된 대중은 이 모든 것들의 혼합이다. 저자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이론적 논의들을 통해 대중에 대한 인식 변화의 궤적을 그려 냈다.

다비드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묘사된 대중은 다수가 모여 공동의 목표를 위해 결속과 의지를 엄숙하게 약속한 긍정적인 공동체의 산물이었지만, 당시 프랑스 사회가 바라본 대중은 체제에 도전하는 일종의 ‘깡패 무리’와도 같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 거리로 나온 이들을 목격한 사회의 상층부는 대중을 ‘무한한 수의 사람들’로 표현했다. 당시 인구는 생물학적・통계적 관리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취합된 데이터를 종합한 이상적인 ‘평균인’이 인민의 지향점이 되었다. 이에 대중은 곧 개인의 특성은 무시한 채 수와 양으로만 다루어지는 통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민으로서 사회의 테두리에 들어왔지만 정작 자신의 표정은 가질 수 없었던 대중은 결국 다시 거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만날 수 있는 19세기 초반의 대중들은 이렇게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다. 음습하고 더럽고 비참한 자들은 바리케이드 혁명의 주체가 되는 결정적인 진보의 한걸음이기도 했지만, 정치가들의 눈에 대중은 반체제적이고 범죄적인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이었다. 대중은 평화로운 질서를 훼방 놓는 적대적인 세력이나 파괴의 힘 그 자체로 치부되었고, 1880년대 이후 대중의 결집은 모방과 집단행동에 기초한 정신적인 병리로 폄훼되었다. 그후 르봉이 ‘대중의 광기’를 위협적이고 억압해야 하는 것이라 역설하자 대중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정신적인 전염’은 이후로 오랫동안 대중에 대한 인식을 지배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대중의 역사』는 엔소르의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가 표현한 대중의 의미가 당대의 시선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에 주목한다. 엔소르는 화폭에 새로운 세상을 몰고 온 메시아를 추앙하는 대중의 카니발을 묘사했는데, 조그맣게 그려진 메시아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림 전면부를 가득 메운 가지각색의 대중의 무리이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가면을 쓰고 있는 무리들은 대중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았던 당시의 관점을 따르지만, 이들이 묘하게 서로의 경계를 파고들고 있는 모습은 혁명의 카니발에 참여하는 모든 대중이 적극적인 하나의 공동체라는 점을 시사한다.

수와 양으로서 다뤄지는 덩어리이자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비참한 사람들, 대중은 끝내 근대의 민주주의에서 집단적인 정신병을 전염시키는 자로 남았다. 이렇게 대중은 언제나 사회의 경계 바깥에 있어야 하고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통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기능했던, 특정한 권리를 가진 집단에서 배제된 존재들이었다. 대중은 정치적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었기보다는 처음부터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갖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비합리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들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재현의 틀을 깨고 경계를 허물라!

『대중의 역사』는 혁명의 시기에 솟아오른 다수의 대중을 하나의 집단으로 포착한다. 대중이 공동체로 해석되는 순간 그들을 구분하고 배제했던 경계는 무너지고 이를 지켜보던 ‘바깥’의 목격자들도 공동체의 경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비드와 엔소르, 자르 모두 경계의 바깥에 존재했던 대중의 존재를 포착했고, 자신만의 미학적인 재현을 이용하여 대중을 구분・배제하는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시도했다.

모든 시각예술은 결국 무엇이 혹은 누가 시각적으로 ‘재현’(represent)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곧 누가 ‘대표’(represent)될 만한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대중을 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과 대중을 대표한다고 하는 민주주의의 문제는 그래서 동떨어진 것일 수 없다. 재현의 틀을 설정함에 있어 정치적 의도가 개입될 수 있기에, 이것은 미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정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프레도 자르는 설치미술 「그들은 너무도 사랑했다, 혁명을」을 통해 68운동이라는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뿐 아니라 그 시대가 그러한 모습을 취하도록 이끌었던 구성의 힘을 떠올리기를 원했다. 그는 68운동의 사진의 순서를 의미 없이 뒤섞은 후 박스에 붙여 기록물들이 조각나고 무작위로 붙여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관람객은 이 미술 작품(혹은 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아 무한한 수의 해석과 조합들을 상상해 낼 수 있다. 만약 이 관람객이 많은 보도자료와 사진들로 68운동의 중심부에 다가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목격이 아닌 재현의 산물을 보는 것이다. 의도를 두지 않은 68운동의 미학적 재현을 지켜보는 관람객은 혁명의 여름으로 돌아가 그 장면을 목격하는, 그 경계에 함께 선 대중이 된다.

그림과 같은 재현의 표상에서 대표되어 온 것은 누구였는가? 계급 피라미드의 윗부분에 위치했던 왕과 정치가는 뒤에 남겨진 인민을 배경으로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미학적 재현으로 인해 인민은 목격될 수는 있을지언정 관람객과 눈을 마주칠 기회를 잃는다. 그러나 틀의 바깥에 남겨져 배제되었을, 배경으로도 초대되지 못한 대중의 존재는 인식조차 되지 못한다. 캔버스의 경계에도 포함되지 못한 그들의 대다수는 시각적 재현의 가치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가치를 갖지 못한, 그러므로 대의 민주주의의 프레임으로 ‘대표’될 가능성이 없는 다수의 대중이 아직 존재한다. 이 난민과 같은 대중들이 정치의 경계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우리는 몇 번의 혁명을 더 목격해야 할 것이다. 지금, 경계를 허물어 없애려는 대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이들의 목소리는 세계의 도처에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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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09:00 2013/02/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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