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세속적 욕망, 그 기원과 실체를 밝힌다!
- 현직 신학교수의 근본주의적․복음주의적 개신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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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사이 시리즈 04
백소영 지음
인문‧종교|신국판 변형(140×210mm)|228쪽|9,800원
2013년 3월 10일 발행|ISBN : 978-89-7682-402-8 03230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연구단 기획 ‘사이 시리즈’의 네번째 권으로서 ‘경건과 욕망 사이’를 탐구하는 이 책은 권력과 부를 향한 한국의 근본주의적‧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왜곡된 ‘욕망’이 ‘경건’의 이름으로 어떻게 정당화되어 왔는지를 밝히는 한편, 개신교의 여성관이 현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기독교의 역사와 교리를 알기 쉽게 풀어 쓰고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현상과 사건들을 아우름으로써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세계 최다의 신자 수를 자랑하는 교회를 보유한 나라,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의 별명에 특정 교회 이름의 머리글자가 들어가는 나라, 찬란히 빛나는 붉은 십자가가 도시의 야경을 수놓는 나라……. 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러운, 누군가에게는 못마땅한 한국 개신교의 풍경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화된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목사 개개인의 비리와 전횡,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과잉 전도,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실력행사, 타 종교에 대한 불관용, 끊임없는 이단 시비 등 잊을 만하면 눈에 밟히는 사건사고들로 인해 설 자리를 잃었다. ‘개독교’라는 비판(혹은 비난)과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는 반박(혹은 변명)이 긋는 평행선 속에서 대화는 불가능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오히려 ‘그들만의 세계’로 점점 고립되어 가는 모양새다.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여 한국 개신교의 욕망을 해부한 대중 교양서이다.
작년 출간된 ‘주체와 타자 사이’,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 ‘매체와 감각 사이’에 이어 이화인문과학원 탈경계인문학연구단 ‘사이 시리즈’의 네번째 권으로 출간되는 이 책이 주목하는 사이는 ‘경건과 욕망 사이’이다. 종교적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경건’과 세속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욕망’. 얼핏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 단어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적‧근본주의적 개신교 안에서 그야말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이들은 신정일치에의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정치에 관여하려 하며, 신앙과 부(富)를 결합시킨 덕분에 재물에의 욕심을 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이 책은 권력과 부를 향한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왜곡된 ‘욕망’이 ‘경건’의 이름으로 어떻게 정당화되어 왔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기독교의 역사와 교리를 알기 쉽게 풀어 쓰고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현상과 사건들을 아우름으로써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 자신이 독실한 개신교도로서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여성 신학자 백소영이 이러한 작업에 나섰다. 『드라마틱: 예수님과 함께 보는 드라마』,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 등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반성과 통찰을 요청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와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 ‘사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러한 ‘사이’에서의 발화를 통해 독자들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종교적 경건과 세속적 욕망, 그 자의적인 연결고리

‘종북좌파’ 척결을, 무상급식 반대를, 한미FTA 찬성을 외치는 집회장에서, 특정 후보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 버릴 것”이라고 말하는 설교문에서, 기독교정당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꿈에서…….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야심 혹은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신앙이란 본디 “초월과 참여라는 두 갈등적 가치를 양손에 잡고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행”하는 법이라지만(111쪽), 한국 주류 개신교의 경우 정치적 압력의 강도에 따라 다소 노골적이고 민망한 왕복운동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일제 문화통치나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종교 본연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라며 탈정치화를 고수하다가, 친개신교적 색채를 드러내는 정권(이승만, 이명박 정권)하에서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상황(참여정부)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 정치화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한국 대형 교회의 설교들은 ‘은총’의 수사로 가득 차 있다. 한국화된 종교들이 대체로 기복신앙과 결합함을 감안하더라도, “예수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라는 ‘삼박자 축복론’이 초대형 교회의 주요 설교 내용이 되고 ATM 헌금기까지 등장한 현실이 썩 바람직해 뵈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서구식 근대화’를 향한 열망으로 도입되었고 6‧25 직후의 기아 해결과 국가 재건에도 크게 공헌한 미국발 개신교의 물질적 은총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유신 정권의 메시지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어울린다. 이러한 경향은 고도성장기에 중산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더욱 공고화되었고,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전면화된 최근에는 팍팍한 삶의 조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더더욱 매력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이 시대를 살아가는 ‘경쟁력’ 혹은 ‘스펙’이 된 것이다.
권력과 부를 향한 이러한 개신교적 욕망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은 중세 교회의 타락을 극복하기 위한 16세기의 종교개혁, 이로부터 태동한 개신교와 그 한 뿌리로서의 영국 청교도, 진정한 ‘하느님의 도성’을 건설하고자 식민지 아메리카로 건너간 일단의 청교도 무리, 바로 이 미국식 개신교를 수입한 이래 독자적 발전 양상을 보이는 한국 개신교에 이르는 기독교사를 되짚어 본다. 그 역사를 통해 독자들은 금욕이라는 가치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국가(정치)와 교회는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는지, 노동 윤리는 개신교 교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 가난에 대한 종교적‧도덕적 비난은 어떻게 강화되어 왔는지,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친화성이 어떻게 서구 근대 문명을 이끌어 왔는지 등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이 드러내 주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경건한 기독교도’들이 직시해야 할 것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보이는 정치적 행보는 세속적 욕망에 경건을 동원하여 신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경건의 실천과 경제적 욕망 사이의 친밀성은 역사적 우연에 의해 결합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경건과 욕망 사이에 맺어진 자의적이면서도 강고한 연결고리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려는 개신교인이 우선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아직과 이미 사이, 개신교도들이 살아야 할 ‘사이’

남성보다 적어도 한 겹의 구속은 더 걸치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해체해야 할 고리가 또 있다. ‘스위트홈의 관리자’로서의 근대 청교도적 여성상과 정절과 희생을 강조하는 유교 가부장적 여성상의 교묘한 결합이 그것이다. 하지만 여성 개신교도들은 이러한 여성상을 체화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혼 여성을 가정에 머물 수 없게 하는 여러 현실적인 조건들(맞벌이의 필요성이라든가 자아성취의 측면 등)과도 맞닥뜨려야 한다. 그뿐인가?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 (앞서 살펴본) 개신교의 성공 지향성은 여성들로 하여금 단순한 전업주부가 아닌 육아와 입시의 ‘전문가 엄마’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몸과 정신은 현대의 어느 여성보다 분주하건만 자아존중감이나 성취감은 바닥을 친다”(180쪽). 그러면서도 ‘천상소명’이자 ‘지상명령’으로서의 엄마-아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벼리는 여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21세기 한국 개신교의 한 단면이다. 이 책의 4장 「‘경건한 알파맘’, 개신교의 여성 통제와 욕망」에는 여성 개신교도로서 느끼는 저자의 이러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잘 녹아 있다.
경건과 욕망이라는 상반된 가치들을 어떻게든 포괄하면서 그 ‘사이’를 잡아 보려는 개신교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권력과 부를 대하는 태도나 여성을 다루는 방식 모두에서 발견되는 것은 세속의 기득권과 결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서는 영적이고 순수하고 신앙만을 바라고 이성적 성찰은 접고서 오직 아멘으로 임하고, 세상에 나가면 직업인으로서 영민하고 이성적이고 계산적이고 효율성을 추구하고 합리적이려 하는”, 즉 “교회에 갈 때는 ‘뇌’를 빼고 가고 세상에 나아갈 때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빼고 가는” 이중생활이 조화롭고 또 평화롭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153쪽).
따라서 저자는 개신교도가 신앙의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사이’는 ‘경건과 욕망 사이’가 아니라 ‘아직과 이미 사이’라고 말한다. ‘아직’ 오지 않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욕망하고, 이를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실천하는 속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도래한다는 것이다(207쪽). ‘경건과 욕망 사이’의 어색한 동거를 끝내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보편성’을 갖는 개별 사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한, 또한 한국 개신교의 신뢰를 회복하는 가장 정직한 길일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세속으로부터 구별되려는 경건’과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욕망’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하게 된 것 말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개신교 젊은이’의 이상형은 개인기로 어쩌다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경건과 욕망, 전자가 후자의 신앙적 동력이 되어 한 신자 안에서 ‘경건한 능력자’를 완성시켰던 것이 근대화와 발맞춰 전개된 한국 개신교의 역사였다. 역사적 우연성으로 인해(혹은 ‘신의 섭리에 의해’) 근대화의 욕망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다양한 갈래 중에서도 특히 ‘청교도 정신’을 계승한 집단의 것이었다. 청교도들의 신앙고백과 생활 격률을 ‘기독교인의 이상’으로 삼은 결과가 오늘날 우리의 이웃 ‘교회오빠’를 만들어 냈다. (5쪽)

사실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개신교 지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 교회였다. 소위 ‘뉴잉글랜드’형이라 부를 수 있는 교회 말이다. 국교회와 영국 사회를 ‘깨끗하게’ 하고 싶었던 청교도들, 그 제도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영국을 버리셨다는 종말론적 좌절감 속에서 ‘새로운 영국’ 뉴잉글랜드를 건설하고자 미국 땅을 밟았던 그들. 도를 넘은 경건과 욕망 덕분에 그 땅의 원주민마저 ‘깨끗하게’ 청소했던 그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세계의 건설’이라는 ‘신적 소명’은 그들이 경건의 이름으로 세속 질서의 재편을 욕망하게 만든 동력이었다. (12쪽)

번영신학과 그 추종자들은 신자유주의적 환경(무한 경쟁과 고용 불안정)이 일반 대중들의 삶의 조건이 된 1990년대 이후에 또다시 눈에 띄게 번성했다. 물질적 헌금을 ‘믿음의 씨앗’처럼 심는 자들에게 병의 치유와 물질적 형통을 보장했던 오럴 로버츠의 후계자들이 발달된 매체 수단을 적극 활용하여 전 세계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마가복음」 10장 30절에 나오는 예수의 ‘씨앗’ 비유를 가져와 ‘100배의 보상’을 설교하고 다닌다. ‘한 알의 씨앗을 땅에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라는 예수의 비유에서 씨앗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다 잘라먹고 씨앗을 돈과 성공으로 치환시킨 이들은 이 씨앗을 드리고 청구하면 하나님이 영수증도 발급하신다고 가르친다. (146쪽)

이 전통 안에서 자란 교회 여성들은 하나님께 신실하고 교회의 인정을 받는 ‘완전한 여성’이 되고자 ‘상응하는 돕는 자’로서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영적 파트너요, 그가 세상 유혹으로부터 굳건히 신앙을 지켜 낼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매력적으로 가꾸고 남편의 성욕을 만족시켜 주며 아울러 재생산 기능을 수행하는 성적 파트너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규정짓게 된다. 또한 남편이 집안 걱정 없이 바깥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야무지게 집안 살림을 하고 똑똑하게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을 신적 소명으로 여긴다. 아내요 엄마로서 주어진 이 모든 행위들은 ‘경건’의 이름으로 신성시되었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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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09:00 2013/03/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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