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블랑쇼, 두 사도가 집전하는 언어의 성사(聖事)!
- ‘죽음/종말의 불가능성’이라는 문학의 진리를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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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에서 카프카로』(De Kafka à Kafka)
시리즈명 : 모리스 블랑쇼 선집 11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철학·문학|신국판 변형(140×205mm) 양장|304쪽|20,000원|
발행일 : 2013년 4월 5일|ISBN : 978-89-7682-403-5 04100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는 모리스 블랑쇼가 카프카에 대해 쓴 모든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평론뿐만 아니라, 카프카가 직접 쓴 『일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내밀한 삶까지 추적하며 카프카의 작품, 재능, 글쓰기에 대해 서술한다. 이 책에서 블랑쇼는 카프카를 통해 자신이 끊임없이 던져 왔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양한 각도로 접근해 간다. 블랑쇼는 이제까지 작품은 저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손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했고, 작가는 그저 자신의 재능에 이끌려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여겨 왔다. 『도래할 책』에서 던져졌던 질문들이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며, 또한 블랑쇼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문학’은 여기서 ‘카프카’라는 인물을 통해 더욱더 전면적으로 드러나, 문학의 체험이란 죽음의 경험임을, 그리고 작품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 속에서 끊임없는 ‘떠돎’과 ‘헛발질’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 보여 준다.

모리스 블랑쇼는 20세기 후반의 문학과 철학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소설가 · 평론가 · 사상가이다. 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익명의 은둔자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뜻과는 달리 푸코,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 20세기 후반의 세계 사상계를 주도했던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언어와 윤리에 대한 블랑쇼의 성찰을 끊임없이 언급하였고, 그로 인해 블랑쇼는 해체와 탈구조주의의 비조(鼻祖)로 알려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블랑쇼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깊게 천착한 사상가였으며, ‘바깥’(Dehors)이라는 개념을 통해 현대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왔다. 그의 사유 속에서 문학은 예술의 하부 장르가 아니라 억압된 주체의 죽음이 체험되는 공간이었고, 타자에게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모리스 블랑쇼 선집 11)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완역되는 책이다. 이제까지 카프카에 관해 많은 평전들과 평론집들이 출간되어 왔지만, 블랑쇼의 카프카론은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 카프카는 블랑쇼가 생각하는 문학의 실존적 경험을 가장 탁월하게 드러내는 작가였으며, 그의 글은 독자들에게 읽힐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무한한 작품이었다. 블랑쇼는 그 무한함에 걸맞은 치열한 서술과 심원한 주석을 통해 카프카 문학의 핵심으로 돌입한다. 블랑쇼는 카프카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의 삶이 드러난 일기와 편지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며, 카프카의 사유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생동하는 알레고리, 작품과 작가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 더 나아가 카프카에게 문학이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선집 2)이나 『도래할 책』(모리스 블랑쇼 선집 3)이 블랑쇼의 문학에 관한 사유를 총론 격으로 제시한다면,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는 문학이 어떻게 현실의 작가와 작품으로부터 탈은폐(脫隱蔽)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천 년 동안, 많은 이들이 진지하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였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질문이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질문은 이른바 하나의 완결된 답으로서의 문학적 진실에 사로잡힌 채 위압적인 ‘성’(城)의 문을 만들어 잠그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질문이 문학을 압도하면서 문학은 문학의 진실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강요받은 진실 앞에서 삶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카프카의 장편 소설 『성』의  첫머리. 마을로 향하는 ‘나무 다리’ 위에서 “K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을 머물렀다”. 다리는 다리였으나 허공에 걸쳐진 다리일 따름이었다. 다리 건너편에는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고, 더 이상 가닿을 수 없는 ‘성’은 어둠 속의 어둠으로 남아 있었다. 어둠 속에 묻힌 ‘성’은 과연 진실인가? 카프카는 문학의 진실을 이렇게 물었다. 카프카의 질문을 보며, 니체의 생각을 다시금 상기해 보자. “진실은 자신의 밑바탕을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어떤 여인이 아니겠는가?”

블랑쇼는 니체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받는다. “작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건네지지 않는, 중심이 없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언어에 속해 있다.” 이 언어, 소통 불가능한, 더 이상 표현의 도구가 아닌, 세계 재현의 체계도 아닌, 이 문학이라는 한 줌의 말에 속한다는 것은, 모든 해답 즉 종국의 모든 결론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밑바탕을, 자신의 관점을, 자신의 소유를 점유하지 못하는 미결(indeterminate)의 실존 속으로 들어서는 완전한 추방으로서의 생(生)을 말한다. 헤겔과 후쿠야마는 틀렸다. 역사는 결코 종말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죽음의 불가능성’ 혹은 ‘죽음보다도 강한 죽어감’으로서의 이 실존을 ‘근원적 경험’이라고 불렀다.
 
카프카와 문학
 
문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이 모든 미사여구들은 그냥 문학일 뿐이다.” 가치 있는 것은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드는 노동이다. 그러나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책을 만든다. 심심파적, 시간 때우기를 위한 여흥일 뿐이다. 물론 사람은 쉬어야 하고, 여흥을 만드는 것도 무가치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몇몇 사람들은 어떤 작가를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인물이라고 외친다. 신문 한 면을 통째 차지하기도 하는 사진 속의 작가는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상의 수상자라고도 한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무게로 독자를 압박한다. 하지만 작가는 상상 세계의 주인일 뿐이다. 결국 문학은 실제의 삶과는 다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학은 일상적 현실들과 간극을 두고 있고, 실상 문학이야말로 바로 이 간극이다. 문학은 불가피하게 일상을 고려하지만, 일상을 멀어짐으로, 순수한 낯섦으로 묘사하는, 일상 앞에서의 물러서기이다. 노동하고 실천할 것을 종용하는 이들은 세계를 직면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달성치를 평가한다. 그러나 문학은 세계의 외곽에 머물며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다. 도대체 문학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왜 카프카 같은 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그르치면서까지 작가가 되는 것이 진실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문학은 모호해지는 언어이다. 문학은 서슴없이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면서 일상세계의 시선과 관념을 벗어나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영역 속으로 이행한다. 한 남자가 갑자기 벌레가 되고, 측량기사는 성 앞에서 그 자신이 부조리가 된다.

일상어는 애매성에 한계를 정한다. 지금 앞에 놓인 삶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불확실한 이해의 싹을 잘라 낸다. 그러나 언어의 일반적 의미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말은 근본적으로 자의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래서 헤겔은 일찍이 부정성이 언어의 본질이라고 했다. 일상인들은 이러한 언어의 본성에는 무관심한 채 눈앞의 목표를 향해 타협해 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한시적인 것일 뿐이다.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개념 틀인 사회적 제도와 체계의 범주화는, 관계들과 담론들의 복잡한 그물망이 출렁이는 가운데 떠오르는 잠정적인 효과일 따름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개념적 운동의 부정성이 절대정신 속에서 궁극적으로 지양되고 역사는 종말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블랑쇼에게 헤겔의 절대정신은 언어, 나아가 인간의 진실을 가리는 우상(偶像)일 뿐이다. 미결과 부정의 실존, 그것은 인간이 시시포스의 바윗돌처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숙명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긍정할 수는 있으되 피할 수는 없는. 카프카는 이 미결정성의 매개를, 혹은 블랑쇼의 표현에 따르면 ‘중성적인 것’을 중성적인 방식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카프카에게 이것은 절대적이고 절박한,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문학에의 요구로 나타난다. 문학은 ‘미결의 잠정성’이라는 이 근원적 경험의 실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블랑쇼가 카프카에 그렇게도 천착한 이유는 카프카야말로 비로소 그 실존의 경험을 그에 맞갖게 드러낸 이이기 때문이다.

카프카 문학의 경험은 오늘날 수없이 겹쳐진 컴퓨터의 윈도우 위로 삶의 유일한 해답인 양 자신을 드러내는 사회제도와 체계의 완결된 내적 논리가, 기실은 방편적인, 일시적인 실용을 위한 허상이었음을 밝혀 주는 블루스크린과도 같다. 그것은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머리 위로 울리는 천둥처럼 재난과 곤경을 투사한다. 물론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지겹도록 계속되는 이러한 재앙의 복기, 혹은 재앙의 시뮬레이션이 일상의 불가결한 도구가 되는 언어의 유용성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체계의 언어는 우리의 삶과 사회 속으로 진짜 재난을 불러들인다. 카프카의 언어는 파시즘의 발호를 위한 사회적 환경이 조형되던 시절의 그 추악한 어둠을 쓸고 삶의 숨통을 틔우려 했다. 우리의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 블랑쇼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블랑쇼의 주석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주석을 종 위에 떨어지는 눈에 비유한 바 있다. 눈은 종을 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종 위에 쌓인 눈이 녹아 스러지면서 종을 울리는 것이다. 주석은 작품을 드러내지 못한다. 주석이 자신을 작품이 소통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펼쳐 놓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작품의 드러남을 위해 사라질 때, 그렇게 주석은 시간의 말을 들리게 한다. 주석은 작품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작품을 위해 스러질 수 있을 뿐이다.

블랑쇼가 카프카를 말하는 방식은 그러한 것이다. 끝없는 부재 속으로 말을 지워 나감으로써. 그러므로 “카프카에서 카프카로”라는 이 책의 제목은 실로 적절한 것이다. 블랑쇼의 글쓰기가 진행되면서 작가 ‘카프카’는 이미 떠나 온 출발점(‘~에서’)처럼 배경으로 드리워지다가도, 또 끝없이 도달하고자 하지만 끝없이 멀어지는 목적지(‘~로’)처럼 불가능성으로 현현하기도 한다. 다시 카프카의 작품 『성』을 생각한다. 나무 다리 위에서 바라본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고,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거리, 마을의 한길은 언덕으로 통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가기만 했다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휘어지며 설령 성에서 멀어지진 않는다 해도 성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이 K의 접근을 거부하는 악의 환영인 것만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K 역시 성이나 성의 관리인과 같은, 목표를 뻔히 눈앞에 두고도 여인과의 쾌락이나 코냑 마시기에 탐닉하는 일과 잠에 취하는 등 목적 대신 끊임없이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관능을 따라간다. K 역시 성의 접근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영원히 이행하는 차이의 운동만이 산출된다. 블랑쇼가 독자인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실 카프카를 좇는(혹은 카프카로부터 떠나는) 블랑쇼를 좇으며(혹은 블랑쇼를 떠나며) 끊임없이 발걸음을 역방향으로 돌리는 것일 터이다. 결론을 영원히 유예시키며……. 블랑쇼에게 ‘카프카’란 이름은 다름 아닌 ‘해석의 운동’으로의 순교-죽음-이며, 동시에 ‘죽음/종말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순교이다.

앞서 우리는 주석이 작품을 드러내기 위해 스러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 작품이야말로 세계의 주석 아닌가. 그 말이 녹아 스러짐으로써 세계가 자신의 자취를 드러내도록 하는. “쓴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것, 끊이지 않는 것이다. 카프카는 놀랍게도 홀린 듯이 기뻐하며 ‘나’를 ‘그’로 대체할 수 있었을 때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변화는 훨씬 심각하다. 작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건네지지 않는, 중심이 없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언어에 속해 있다……. 쓴다는 것, 그것은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이 말에 나는 나의 침묵의 결정과 권위로 다가선다. 나는 침묵하는 나를 통하여 중단되지 않는 긍정을, 거대한 웅얼거림을 느끼게 한다. 그 웅얼거림 위에 언어는 열리고 그리하여…… 공허라는 어둑한 충만이 된다”(『문학의 공간』 중에서). 블랑쇼는 그의 삶을 ‘문학과 그에 합당한 침묵’에 바쳤다. 카프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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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6 09:00 2013/04/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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