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유한한 언어의 규칙에서 무한한 세계의 창조로!!
- 이야기, 철학, 세계―언어가 있는 모든 곳에는 은유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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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도서관』 ― 철학에서의 은유
시리즈명: 클리나멘 총서 009
김애령 지음
인문ㆍ철학 | 신국판 변형(150x220) | 276쪽 | 18,000원
2013년 5월 30일 발행 | ISBN: 978-89-7682-408-0  93100

은유가 건네는 이야기로부터 철학은 사유를 구체화하고 사유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획득한 관점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고 확장해 나간다. 『은유의 도서관』은 은유를 소통과 창조의 능력이자 세계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쓰이게 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한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은유 이론에서 출발하여 은유에 대한 철학자들의 다양한 설명과 분석을 정리하고(1부 ‘움직이는 말’), 은유와 경쟁/병렬하는 직유・알레고리・환유 등의 다양한 언어적 도구를 밝히며 은유가 언어 현상 전반에 깔려 있는 본질임을 이야기하고(2부 ‘경쟁하는 문채들’), 은유 없이는 철학이 가능하지 않으며 은유는 철학자의 사유를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임을 드러낸다(3부 ‘철학, 은유, 이야기’). 은유라는 거대한 도서관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같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는 이 도서관 안에서 우리는 유한한 언어의 규칙으로부터 무한한 창조적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를 실어 나르는 은유를 타고, 또한 우리가 실어 나르는 은유를 가지고, 우리는 모든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종(種)과 개념이 전혀 다른 두 대상인데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하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전혀 그럴 리 없는데도 ‘정치가 8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걱정하며, 애초부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고 비난한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이는 문장들을 단어의 정확한 뜻에 한정하여 해석한다면 그 의미에는 균열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러한 은유들을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걸까? 아니, 이러한 은유 없이 과연 우리는 단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의미가 ‘이동’된 채 사용되고 있으며 사전적 의미만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단순한 언어의 대체를 넘어서서, 하나의 이야기 그 자체가 은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호르세 루이스 보르헤스는 무한으로 이어진 육각형의 방과 방 안에 빼곡 들어찬 세상의 모든 책들, 그 가운데 단 한 권의 ‘완전한 책’을 찾으려는 사서들의 광기를 ‘바벨의 도서관’으로 묘사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의 분노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언어를 갖고 뿔뿔이 흩어진 성서의 이야기에서 혼돈을 뜻하는 ‘바벨’을 빌려온다. 또한 세상의 모든 책이 있는 도서관은 우주라는 또 다른 이야기를 상징한다. 신의 질서에 비해서는 분명 혼돈이지만 그렇다고 카오스는 아닌 이 세계를 끝없이 이어지는 육각의 방들이 만드는 무질서 속의 질서, 우연 속의 필연을 가진 하나의 도서관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이때 보르헤스의 상징은 ‘혼돈’의 자리에 ‘바벨’이, ‘우주’의 자리에 ‘도서관’이 위치한 단순한 자리바꿈이 아니다. 단어의 범주를 넘어 이야기의 차원에서 해석되고 숙고되어야 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다양한 관점과 통찰로 은유는 사태를 평범하지 않고 새롭게 기술한다. 은유가 발생시키는 의미 속에서, 우리는 무한한 해석과 조우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수사적 언어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철학마저도 은유 위에서 그 사유를 펼친다. 『은유의 도서관』은 그동안 주로 문학에서 다루던 수사학의 문채(文彩)이자 특정한 언어 현상의 하나로만 여겨졌던 은유가 사실은 일상적이고 철학적인 언어 사용이라는 점, 은유를 통해 우리 개념과 사고가 재배열되고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점을 담은, 은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드러낸 저작이다. 저자 김애령은 이해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의 다중적 의미와 유사성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 온 여성 철학자로, 은유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일상 언어에서 이야기, 철학, 그리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한 세계까지―에 걸쳐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페르디낭 드 소쉬르, 폴 리쾨르 등의 수사학・해석학으로서의 은유 이론은 은유가 철학/세계에 맞닿아 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은유의 도서관』은 주로 은유 이론 분석이나 비유적 수사들과의 비교에 중점을 두었던 여타의 은유 이론서들과는 달리, 신화와 철학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은유들을 예로 들며 사전적 의미로는 환원되지 않는 살아 있는 은유가 세계를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 낸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은유의 도서관’은 닫혀 있지만 열려 있는, 같은 책은 두 권을 갖지 않는 창조적인 언어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은유는 어떻게 철학과 세계를 구축하는가?

본래 수사학적 언어는 철학에게는 언제나 곤란한 개념이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담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철학에게 은유는 과장, 장식, 기만, 속임수 등의 부정적인 힘과 연결된 문제였다. 특히 로크나 콩디야크,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들은 “오류와 속임수의 본질적인 원천”인 비유적 언어를 경계했으며 언어의 “순수하지 않은 사용”을 피하고 철학에서 이 위험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은유의 도서관』은 해체주의 이론가 폴 드 만(Paul de Man)을 앞세워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토대도 그들이 믿고 견지하는 것보다 훨씬 수사학적 비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은유에 관한 데리다의 글 「백색신화」에 근거하여 “철학은 결국 문학”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수사학의 언어는 철학의 언어와 확연히 비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상적인 사유 과정을 가시화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이 비유적 언어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철학은 은유 위에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비유가 가득한 감각적인 수사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를 설명했지만 이후 이 감각적 언어가 증발되면서 사유만 남았고, 사유는 마치 처음부터 비감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건조한 이성적・논리적인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장자와 데카르트의 ‘꿈’, 플라톤의 ‘동굴’, 하이데거의 ‘고향’과 ‘숲길’ 같은 은유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사유를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은유의 목적이 대상과 사유를 단순히 ‘알기 쉽게’ 말하거나 수사적으로 ‘아름답게’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은유의 ‘발견론적 기능’을 주장하며 은유가 “새로운 관점의 개시이자 현실의 새로운 기술(記述)”로 작용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빌려온다. 『시학』은 은유가 미메시스(모방)와 뮈토스(이야기 구성)와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이해되며, 은유를 살피는 일은 은유가 모방한 세계,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경험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은유가 ‘말하는 바’는 단지 그 문장에 ‘표현된 것’에 한정되어 분석될 수 없다. 우리가 은유적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은유에 대한 논의는 문장 차원의 의미론을 넘어 그것이 구성한 전체적인 텍스트의 해석학으로 나아가야 하며, 은유적 발화에서 ‘의도된 것’을 알고자 한다면 관심을 그것의 ‘대상’이 되는 세계로 향해 언어 외부 세계가 함께 성찰되어야 한다. 이 성찰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의 차이를 발견하고, 새로운 각도로 자신의 삶을 조명할 수 있다.

은유는 소통과 창조의 능력이자 통찰이다. 은유가 대상의 세계를 담아 완성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것이 구성된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을 제공한다. 따라서 은유를 읽어 낸다는 것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관점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쓰이게 하는 힘, 삶을 확장하는 은유의 힘이다.

언어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힘, 은유


이처럼 은유는 일상적인 소통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사유와 세계를 완성하는 매혹적인 언어 현상이다. 언어가 일상적으로,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곳에서 은유는 주제화될 수 있다. 한편 은유는 개념들을 “원래 그것이 속하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경계를 무시한 채 팔아넘기”며 언어의 의미론적 규칙을 파괴하는 인식론적 위험을 지니기도 했다. 수사학자들은 문채들의 세심한 분류와 규정을 통해, 언어철학자들은 은유의 기능과 작용을 분석하며 은유 만들기의 한계를 규정하고 설명함으로써 은유를 “안전하고 유용한 문채로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은유의 역동성은 구조적 차원이나 의미론적 차원으로는 한정 지을 수 없는 현상이었으며, 은유는 정체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대상이었다.

“은유는 은유적으로밖에 정의할 수 없다”는 불변의 법칙을 최초로 사유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은유에 관한 모든 이론은 이 ‘은유의 역설’에 발을 담그고 설명과 분석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 현상을 철학적 사유세계 안에서 처음으로 다루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은유에 대한 논의의 전(全) 영역을 터 잡아 준 가장 명증적인 은유 분석을 시도한 철학자였다. ‘은유는 전의(epiphora)’라는 정의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상적・사전적인 단어의 의미를 전용하여 다른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 은유임을 설명했다. 하지만 일의성을 우선으로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단어의 전용은 문자적 의미와 문법적 규범의 ‘위반’이자 ‘일탈’이다. 즉 은유는 의미 규범과 일탈이 동시에 일어나 두 층위의 의미가 공존하고 있을 때 성립되는 해석적 긴장인 셈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바탕으로 은유가 가진 일탈과 규범, 이중의 메커니즘을 구조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다의적 언어와 수사적 문채를 언어학적으로 다룬 벨기에 리에주 대학 시학연구센터의 학제적 연구 집단인 뮈 그룹(Groupe μ)은 소쉬르와 로만 야콥슨이 연구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영향하에서 수사적 언어의 특질을 기호체계 내에서 모두 해명해 내고자 했다. 그들은 은유를 ‘풀이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관습적인 개념 사용의 체계를 재구성하고, 하나의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어떠한 관계 안에서 작용하는지를 밝혀낸다면, 그리고 이것을 도식화할 수 있다면 은유의 신비는 풀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뮈 그룹의 시도는 은유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은 비껴간다. 은유가 단지 수사적인 장식에 불과한 것인지, 그것은 문자적으로 말끔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 은유가 가진 특별한 인지적 능력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논리실증주의나 언어분석철학의 측면에서 은유를 분석하고자 한 I. A. 리처드, 맥스 블랙, 먼로 비어즐리, 도널드 데이비드슨 등의 현대 수사학자들과 언어철학자들은 은유에 대한 기호학적 체계화, 화용론적 이해, 해체적 독법을 통해 ‘은유의 역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은유를 기호로 구조화하고 언어 사용의 다양한 기능으로서 분석 가능하게 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이론들이 보여 주는 한계가 바로 은유라는 독특한 언어 현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은유는 우리가 아직 해석하지 못한 역동적인 힘과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같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는 은유의 거대한 도서관 안에서 우리는 유한한 언어의 규칙으로부터 무한한 창조적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은유의 도서관』을 통해 우리를 실어 나르는 은유를 타고, 또한 우리가 실어 나르는 은유를 가지고, 우리는 모든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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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1 09:38 2013/07/0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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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ff14gilhub

    Tracked from ff14gilhub 2016/07/24 11:55  삭제

    My way or the high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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