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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와 근대성: 주체 생산의 역사이론을 위하여』
 시리즈: 트랜스 소시올로지 018
이진경 지음
사회과학|신국판 양장(152×224mm)|372쪽|20,000원
2014년 1월 25일 발행|ISBN : 978-89-7682-780-7 03300

1997년 문화과학사에서 출간되었던 『맑스주의와 근대성』이 2014년 새롭게 단장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 이진경이 ‘사회주의자’로 수감되어 맞닥뜨린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암담한 경험 이후 7~8년간, 맑스주의와 근대성, 이행과 주체라는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천착했던 내용들을 담고 있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맑스주의의 해체 앞에서 “삶 전체를 걸었던” 맑스주의를 쉽게 던져버릴 수도, 기존의 맑스주의를 고집하고 그것에 안주할 수도 없었던 딜레마. 그 속에서 저자는 “기존의 맑스주의를 뒤집고 변이시킴으로써 맑스주의 내지 맑스의 사유를 새로운 방향으로 추동”하고자 했고, 그 첫 결과물이자 출발점이 바로 이 책 『맑스주의와 근대성』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동안 지배적 맑스주의를 구성해 왔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전제들을 비틀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극복과 혁명을 위한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맑스주의는 진리이자 과학’이라는 통념, 노동가치론, 역사유물론,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이행기로서의 사회주의라는 맑스주의의 공식적 정설 등, 기존 맑스주의의 이론적 전제 속에 도사리고 있던 ‘근대적’ 한계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맑스 자신의 사유를 통해, 그리고 괴델, 니체, 로자,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와 같은 “다른 지적인 동료”들의 사유를 통해 코뮨주의적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운동과 혁명이 삶 전체를 건 것이었을진대, 맑스주의나 사회주의가 삶 전체를 건 꿈과 희망이었을진대, 몰락한 사회주의 앞에서, 해체된 맑스주의 앞에서 “이제 그건 끝났어”라며 그것을 쉽게 던져 버릴 수 있을까? 다양한 이념 가운데 맘에 드는 하나를 골라낸 것이었다면, 복수의 체제 가운데 그럴듯한 하나를 선택한 것이었다면 그건 차라리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건 진지함이었고, 죽음을 무릅쓴 열정이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혹은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한 것인지.—그리고 이런 점에서 쉽게 버리고 발빠르게 다른 ‘대안’을 찾아낸 영리한 사람에 비하면, 뼛속 깊이 허무를 느끼며 방황하던 사람들은 차라리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는지. / 그러나 그렇다고 기존의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고집하고 그것에 안주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삶을 건다는 것이 낭만주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신념에 대한 열정적 고집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현재 속에서, 현재의 문제로서 미래를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_ 20쪽.
그렇다면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유는 차라리 ‘쉽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주의 인민 없는 사회주의 사회가 붕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 인민의 국가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사회에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거대한 감시와 통제조직이 필요했던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근대인이란 위계화되고 분절된 통제를 통해 활동하는데, 자본주의에서 이는 많은 경우 자본에 의해 수행되지만, 자본이 자본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따라서 자본이 통제할 수 없는 사회라면 이를 대체할 별도의 통제와 감시조직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가 동요하고 해체되는 상황, 그리하여 의사당에 대포를 쏘아대는 상황에서, 대중들이 혁명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무관심과 냉담함으로 대처했던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정치란 자신들의 일이 아니며, 국가 역시 자신들의 국가가 아니고, 체제의 동요나 해체는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_ 26쪽.
이런 점에서 맑스의 철학적 혁명이 창출한 탈근대적 사고의 공간에 들어가 공간 자체를 확장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 자체와 역사까지도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맑스의 정신에 따라 근대적 한계를 넘어서 맑스주의를 밀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는 맑스의 철학적 혁명을 통해 마련된 지반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어쩌면 ‘다시 맑스로’ 회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맑스가 제시한 어떤 ‘과학적’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만 그가 마련한 ‘공간’일 뿐이란 점에서 단순한 회귀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근대 너머를 사고할 수 있는 그 공간만으로 근대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_ 72쪽.
여기서 맑스는 “노동이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노동가치’라는, 가치론의 중심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노동 자체가 가치인 것도 아니다. 대신 그는 노동을 ‘노동력의 사용가치’로 정의하지만, 이처럼 노동가치론 입장에서 곤혹스런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왜냐하면 사용가치란 질에 속하는 것인 반면, 가치는 양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용가치는 가치론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을 사용가치로 정의한다는 것은, 노동이란 가치론의 공리계와는 전혀 별개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은 노동력 상품이라는 가치의 계열과 전혀 다른 질의 계열에 속하며, 더 나아가 양적으로도 전혀 별개의 계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_ 87쪽.
노동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라면 ‘노동의 정치’는 그러한 능력이 ‘정치화’하는 것을, 다시 말해 정치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되고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활동으로서 코뮨주의적 정치의 잠재성을 형성한다. 반면 그것은 또한 근대적 노동의 체제를 통해서, 노동하는 신체를 장악한 생체권력과 노동 그 자체에 새겨진 자본의 흔적이 만들어 내는 정치적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 자신의 욕망의 배치인 만큼 발견하기 어렵고, 이미 습속화되어 버린 일상적인 생활양식의 무의식적 지반인 만큼 제거하기 어려운 것. 결국 ‘노동의 정치’가 자본주의의 극복일 뿐만 아니라 ‘근대’의 극복일 수 있다면, 그것은 노동 자체에 새겨진 이 자본의 흔적을 변이시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닐까? _ 267~268쪽.
더 이상 코뮨주의에 의해 이행을 정의해선 안 된다. 반대로 이행에 의해, 이행운동 그 자체에 의해 코뮨주의를 정의해야 한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코뮨주의,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발전을 통해 도달하게 될 역사의 목적이나 종착지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부재하는 이상향으로서 유토피아도 아니다. 혹은 과학이나 철학 등의 주변에서 미끄러지듯 형성되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것은 맑스 말대로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이행운동 그 자체”며,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것의 지배에 반하여, 그것과 투쟁하고 그것을 무시하며 그것을 침범하기도 하는 코뮨적인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행운동 그 자체다. _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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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8 17:52 2014/01/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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