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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투명한 펑션박스가 되고 싶어요.
집어넣는 숫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놓는 함수 말예요.
그런 편집자가 되고 싶어요. 꼭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 없이.
- 작년 봄, 메신저 대화창에서.

20대 초반. 수업 시간에 아폴론, 디오니소스, 헤르메스로 나뉘는 문명론을 수업에선가 배우고는, 미셸 세르의 책은 한 줄도 읽지 않은 주제에 내 멋대로 ‘나는 헤르메스형’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일단 말부터가 경계인, 회색분자보다 멋지지 않은가. 일단 그렇게 헤르메스형 인간이라고 생각을 하자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감이 생겼다. 창조자이기보단 매개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심지어 천칭자리인 별자리조차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왔다갔다 하는 바쁜 운명을 상징한다고... 이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고정된 직업이 아니라 여기저기 접속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10년 후... 6년차 편집자가 되어서야 드디어 미셸 세르를 만났다. 헤르메스가 아니라 천사라는 메타포와 함께. 세르 가라사대, “저자auteur는 증보자augmemteur다.” 저자란 신이 창조한 세계에 무언가를 덧붙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스티븐 킹 가라사대, “저술은 인간이, 편집은 신이 한다”. 왜 메시지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편집이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일까? 편집자가 저자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라 편집자는 늘 완벽해야 하는 신을 대신해서 인간(저자)을 위해 일할 뿐이라는 말은 아닐까?(또 이렇게 산산이 부서진 말들을 내 멋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편집자의 창조성은 시작된다고 우기면서)

지난 번 편집 후기에서 나는 “편집자는 오직 책으로 말할 뿐”이라고 했다. 사실 편집자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그 표어(?)의 전신全身은 이렇다. “편집자는 그늘 속의 존재, 오직 책으로만 말할 뿐입니다.” 편집자가 국정원 직원은 아니니, 굳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집자가 저자, 독자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분야들을 연결해서 매번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이 탄생하도록 도우려면, 섬김의 철학이 필요하다. 편집자도 인간인지라, 때때로 저자를 넘어서서 문장을 이렇게 저렇게 고치고, 제목을 섹시하게 뽑고, 현란한 디자인으로 독자를 현혹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편집자가 아니라 ‘편집의 신’이라도 된 양 눈이 멀 때다.

『천사들의 전설』에는 이름 없는 천사,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 음악의 천사, 수호천사, 기적을 일으키는 천사, 지혜의 천사, 사랑의 천사가 등장한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품천사의 다른 이름들이다. 모두 세상 모든 일이 그분의 뜻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존재들이다. 천사와 편집자의 공통점이 뭔지 감이 팍팍 온다. 세르는 철학 선생이, 아나운서가 메시지보다 앞서는 것을 배우자감을 못 보고 매파와 결혼하는 격이라 한다. 정말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 자체를 위해 뒤로 물러서는, 빛으로 투명해지는 천사의 도리라고. 스스로 소통의 경로로서만 작동하는 관계의 철학, 천사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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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프라 안젤리코「수태고지」
1445년, 230*321cm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스러운 임신을 알리러 간 대천사는 그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신의 어머니가 될 그녀에 대한 존중이다. 뜻밖의 메시지에 놀란 마리아도 천사에게 머리를 숙인다. 메시지 보낸 이에 대한 존경이다. 이 상호 존경의 장면을 말씀 그 자체인 분의 투명한 현존이 빛으로 감싼다. 겸손하게 서로 존중할 때만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흐름을 만든다고, 그것이 편집자의 역할이라고, 그림 앞에서 나 또한 고개를 숙이고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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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전설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갈래 : 인문, 철학

발행일 : 2008년 3월 15일 | ISBN : 978-89-7682-307-6
국배판 변형 양장|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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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0 15:29 2008/03/2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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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독자 2008/05/23 20:08

    몇주전에 서점에서 우연히 천사들의 전설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결국 며칠전에 질렀습니다. 옮긴이의 서문이나 책 소개 기사에 나오는 어려운 말들을 차근차근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요. 아직 본문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고요, 책과 관련된 이미지를 찾아보다가 그린비 홈피까지 왔네요. 한눈에 반해버릴만한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린비 2008/09/10 11:18

      와우~ 이토록 감동적인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이제야 봤네요. 잘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