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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라는 영화 다들 아시죠? 제가 고 3때 그 영화 개봉했었는데, 저 영화보고 광분했답니다. 제가 의심했던 것들이 전부 영화 안에 녹아 있었거든요. ‘이 세상은 뭔가 미쳐 있는 게 틀림없어. 분명히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을 거야’라는 그 당시 저의 다소 음모론적인 요런 생각들을 매트릭스는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전 예나 지금이나 사이코였습니다)

하지만, 매트릭스를 10번, 20번(정말 20번 이상 봤습니다)보면서, 네오에게 향했던 마음이 트리니티에게, 아키텍트에게 향하다가 언젠가부터 배신자 ‘사이퍼’에게 꽂히기 시작했습니다. 1편에서 애들을 배신하고 매트릭스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사람이 ‘사이퍼’입니다.  
사이퍼가 거기서 말하죠. 에이전트를 앞에 두고, “스테이크의 맛이 가짜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 맛을 잊을 수 없다” 라구요. 매트릭스 안의 세계가 구성된 것이고, 가짜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잊지 못하겠다고 하는 거죠.

제게 『중국 근대의 풍경』은, 물론 작업평가서에 여러 가지 배운 점들을 썼지만, 다른 측면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책은 제게 예를 들어 권력과 구성, 그리고 권력효과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첫 책 『들뢰즈 사상의 분화』가 ‘현실성과 잠재성’이라는 표현으로 저의 막연한 생각에 단초를 제공했다면 『중국 근대의 풍경』은 마치 영화「매트릭스」처럼 저에게 그 문제들을 펼쳐 보여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책 내용을 보면 나오지만, 우리가 영화나 뮤지컬을 보면서 즐거워하듯, 근대의 중국 사람들은 공연오락문화를 즐겼고, 지금의 우리가 교양을 쌓는다고 박람회, 전시회 열심히 돌아다니듯, 그 당시 사람들도 계몽에 대한 위압감을 느끼며 박람회며 전시회를 돌아다녔습니다. 매트릭스 안의 사람들도 그랬죠. 자신들이 멋진 현실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누군가에게 주입받은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구성적인 것이었습니다.

아편전쟁과 신해혁명까지를 근대 중국으로 간주한다면, 약간 오바해서 1세기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왜 여전히 똑같은 것일까요? 최첨단이라는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다들 자신이 합리적 주체이며, 뭔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근대 중국과 현대의 우리는 그런 면에서 선형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겹쳐 있습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들을 스스로가 구성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100년 전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비슷한 문물을 누리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스스로를 합리적인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근대적 주체들을 만들기 위해 중국 교육제도가 몇 번씩 뒤집어졌다는 것도 이 책 안에서는 드러납니다. 사실 뭐 제가 이런 이야기 하지 않아도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걸 이젠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시간 관념 같은 것들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숫자에 대한 관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다시 그것들은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재배치됩니다. 효율성은 다시 꼬리를 물고 더 많은 생산성을 위해 인간의 시간을 관리하기 시작하죠. 이것들이 정말 인간 이성의 힘인가요? 그 당시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이나 권력의 효과 아닐까요?

전 저자들이 보여 주는 다층적인 중국의 근대 모습에 처음엔 당황했습니다. ‘현실은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구성물일 뿐’이라는 다소 영화 같은 생각들이 원고 안에서 구현되는 것을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정말 우리는 백 년 전과 같은 체계 안에 굳건히 갇혀 있는 것일까요? 사실, 현대인들은 누가 가둬 놓아서 못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걸 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이퍼’들이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현재와 근대라는 이름의 과거는 왜 그렇게 닮아 있는 것일까요?

다소 이야기가 거친가요?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근대 중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만들어 간 시발점입니다. 그런데 그 형성 방식이 이성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강제적으로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신문물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금 이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중국 근대 속에서 제도나 문물들의 형성은, 그 당시 서양의 제국들로 재편된 세계 질서 하부에서 상부로 나아가겠다는 중국의 욕망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제도와 문화들 역시도 중국 근대의 모습과 닮아 있지는 않나요? 여전히 수직적 관점으로만 세계 질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위로 올라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기억력이 5초밖에 안 되는 금붕어보다 못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 풍경이 비슷한 것일까요? 정말 시간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은 전혀 상관없다는, 남들은 이미 알아버린 것 같은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런 생각들은 보도자료를 쓰면서 명확해졌습니다. 책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점을 막판에야 느꼈다고나 할까요. 권력과 담론의 효과물이 근대를 구성했고, 그것이 현대를 지탱하는 힘이라면 권력이란 정말 뭘까요?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지금의 우리를 보거나 원고를 몇 번씩 읽어 나가면서 느끼겠는데 그걸 구성하는 권력은 뭔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자본주의? 인간의 욕망? 사실 이런 것도 답이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조차도 하나의 구성물이니까요. 물론 권력은 저 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겠죠. 어쩌면, 도드라진 점 하나 없는 평평한 면에서 인간들의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해 주는 수행 가능성 자체가 권력이고,(스피노자가 말하는 능력과 비슷한 게 제가 생각하는 권력입니다) 그 개개의 인간들이 선택하고 수행하는 것들이 권력의 표현이 아닐까 다소 추상적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첫번째 책을 진행하면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들이 『중국 근대의 풍경』을 작업하면서 어떤 지점에서 교차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그 팽팽한 면을 찢고 뛰쳐나가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사이퍼’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계속 우리는 ‘사이퍼’인 채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중국 근대의 풍경』은 그런 면에서 저에게 또 다른 문제제기를 합니다. 너의 권력에 관한 생각이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이 하나의 구성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권력이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수행 가능성으로만 잠재되어 있는 그 무엇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너에게 ‘전복’이란 무엇인가?

편집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또 다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질문들은 여러 갈래로 엉켜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직은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번 책을 만나고 난 후, 다른 시작점에 서게 된 것 같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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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의 풍경
문정진, 민정기, 박소현, 백광준, 이성현, 차태근, 천진, 홍영림 지음|갈래 : 인문, 역사

발행일 : 2008년 3월 25일 | ISBN : 978-89-7682-503-2
사륙배판 변형 양장|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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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16:51 2008/03/2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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