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볼 때, 독자들은 보통 활자보다는 새겨진 내용에 집중할 것입니다. 책을 사는 이유도 내용에 대한 궁금증∙필요를 위한 것일 때가 많겠지요. 그런데 편집자들은 책을 볼 때 그 내용뿐만 아니라 활자나 레이아웃(layout) 상태(책을 펼쳤을 때의 양면 모양새), 그림 배치, 오탈자∙띄어쓰기같이 일반 독자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책에 대한 이런 감식안은 책을 물질로서 다루는 편집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과정입니다. 저자에게 받은 원고를 판면에 앉히고(보통 맥킨토시의 쿽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판형을 짠 후 옮깁니다) 문장과 단락별로 통일된 스타일을 부여한 뒤 낱낱의 글자를 확인하여 안정적인 책 모양새를 만드는 일은 편집자의 기본적인 업무이기 때문이지요.

그린비 편집부에서는 안정적인 책 생산 공정을 위해 타이포그래피 운용에 관한 몇 가지 기준과 그 구체적인 매뉴얼을 정해 두고 있습니다. 원칙은 편의상 크게 ‘가독성’, ‘일관성’, ‘적절성’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 각각의 시리즈마다, 책 안에서는 각 제목별(절제목∙소제목), 단락별로 일관되게 서체를 사용하며, 내용상 인용이나 강조 부분이 정확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유용성을 검증받은 서체를 사용합니다. 보통 시중의 책 본문에 쓰이고 있는 서체는 크게 sm체, 윤체, 산돌체로 나눠 볼 수 있는데요, 이것들은 오랜 시간 쓰이면서 독자들이 편하게 대하는 서체로 자리를 잡은 것들입니다. 저희는 이 가운데 sm체를 주로 사용하고 있고, 명조를 쓸 땐 장평을 약간 늘려 통통한 느낌이 나도록 하는 걸 선호하고 있습니다. 본문 서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 sm신명조 10.15포인트(10~10.2pt), 장평 100.5%(100~101%), 자간 -20.5pt(-20~-21pt)를 기준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쓰는 이유는 글자를 조금만 놓고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지만 뭉텅이로 모여 있는 글자들을 볼 때는 이 미세한 차이가 엄청나게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희 편집부에서 오랜 시간 그 느낌들을 비교하면서 내린 결론이 이와 같은 기준으로 잡혀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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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1) 유용성을 검증받은 서체-- sm체, 윤체, 산돌체


둘째는 너무 많은 서체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독자들이 활자보다는 내용에 집중한다고 말했는데요, 바꿔 말하면 편집자는 독자들이 활자에 신경 쓰지 않고 내용에 집중하도록 돕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 판면 안에 여러 서체가 쓰여 있다면 독자들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목과 강조 등 두드러져야 할 부분을 빼 놓고는 본문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서체의 크기 변화도 잦으면 편하게 읽기 힘들게 되며, 한자나 외국어 원문 병기도 여러 번 반복되면 읽는 데 방해가 됩니다. 병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맨 처음 혹은 장별로 한 번 정도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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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2) 너무 많은 서체를 사용하면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셋째는 글자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본문에서 sm신명조에 -20.5pt의 자간을 주었다면 이 기준은 끝까지 유지시켜 주어야 합니다. 오래된 레이아웃 원칙 중에 ‘단락 마지막 한 행에 한 글자만 남아 있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자간을 조절하면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엔 쉼표와 같은 부호나 괄호로 병기된 글자를 넣거나 빼는 방법으로 눈에 거슬리지도 않고 내용상에도 변화가 없도록 하여 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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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3-1) 자간을 줄여 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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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3-2) 자간을 늘여 쓴 경우


넷째는 고딕체 사용법입니다. 고딕체는 주로 소제목이나 그림 제목을 나타낼 때 쓰이며 간혹 본문이나 강조하는 단어에도 쓰입니다. 소제목이나 그림 제목에 쓸 때는 sm견출고딕이나 sm태고딕을 사용하며, 본문에 쓸 때는 sm중고딕을 쓰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고딕체는 명조보다 작게 쓰여도 눈에 확연히 띄기 때문에 본문에 쓰인 글자보다 작게 사용하며, 명조를 사용할 때와는 달리 날씬하게 보이도록 장평을 92~95% 정도로 줄입니다. 자간은 -10~-15pt를 주어 너무 딱 붙어 보이지도,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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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4) 소제목으로 사용된 고딕체


다섯째는 영문과 숫자, 한자에 대한 서체 사용법입니다. 영문과 숫자의 경우, Garamond체를 주로 씁니다. 16세기에 클로드 개러몬드가 고안한 이 서체는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상용되고 있는 꽤 보편적인 서체입니다. sm체의 영문과 숫자가 미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우리 눈에 익숙한 이 서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간혹 Bembo, Formata, DIN 등의 서체가 쓰이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강조나 디자인적 효과를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본문 안에서는 Garamond체를 자간 -2~-3pt 주어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한편, 한자는 한글과 마찬가지로 sm신명조를 사용하는데, 한글 서체에 비해 조금 큰 느낌을 주기 때문에 0.5pt 작게 크기를 줄입니다. 그리고 한자의 특성상 글자가 꽉 찬 느낌을 주기 때문에(‘나라 국’자를 연상해 보세요) 자간은 -10~-13pt 정도로 하고, 글자가 붙었는지 여부를 눈으로 확인해서 아주 조금씩 조절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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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5) 숫자, 한자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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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운용된 화면과 타이포 원칙 예시> (그림을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본문 : sm신명조 10.15pt 100.5% -21pt (들여쓰기 6.3pt, 행간 20.5pt)
                       영문 : garamond -3pt
                       한자 : 자간 -13
                       강조 : 윤명조140 9.6pt -24 (영문강조 Bembo Semibold)
                       본문각주 : Bembo Semibold 5.5pt 100.5% 자간 0 기준선 5pt (에스테리카 기준선만 3pt)
                       각주 : sm신명조 7.7pt 100.5% -20pt (행간 11pt)
                       각주에스테리카 : 8.3pt 기준선 -2pt


아주 미세한 규정까지 다 쓰진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타이포를 운용하는 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편집자들에게도 이 원칙을 몸에 배도록 숙달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리고 실제 책을 편집해 가면서 저마다의 감각을 동원해 좀더 최적화된 가독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구요. 조판 상태, 다른 서체들과 그림 이미지 등등과 적절하게 타이포를 운용할 때에야 원칙의 실효성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편집부 주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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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1 11:33 2008/04/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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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혜아룜 2008/04/12 07:44

    헤에, 이렇게 편집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신선하고 재미있네요. 이런 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말이죠.

    • 그린비 2008/04/14 10:38

      혜아룜님 안녕하세요! ^^
      "출판·편집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 됩니다.^^v

  2. joogunking 2009/05/02 20:35

    저역시 책을 읽을 때 내용에만 신경썼는데 편집자님의 이런 세심한 배려로 내용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것이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그린비 2009/05/04 09:32

      joogunking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