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마트롱이라는 걸작이 한국에 도래하다




알렉상드르 마트롱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심지어 프랑스 철학에 친숙한 독자들에게도 매우 낯선 이름이다.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은 비록 철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흔히 듣게 되는 이름들이지만 마트롱이라는 이름에는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사실 마트롱은 외국 학계나 심지어 프랑스 안에서도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직접 읽어본 사람들에게 그는 깊은 찬탄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비단 스피노자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마트롱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었으며, 그가 프랑스의 철학사 연구, 특히 스피노자를 비롯한 고전주의 시기(16~18세기) 철학자들의 연구에 미친 영향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다. 40여 년에 걸친 그의 연구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방향과 지반 그 자체를 바꿔놓아서 이제 마트롱을 모르고서는 누구도 더 이상 스피노자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중심에는 바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 저작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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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로 여러 가지 점에서 경이로운 저작이다. 우선 이 책은 스피노자 철학이 지난 300여 년 동안 지속됐던 범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단초를 마련해주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가 사과나무의 철학자라면, 철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범신론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신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은 사람, 자연 만물 속에 깃들인 신성(神性)을 관조한 신비스러운 사람, 세속적인 삶을 초월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철학자가 바로 스피노자 아닌가? ‘스피노자는 서양의 노자’라는 철학적인 우스갯소리는 사실은 스피노자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을 대표하는 문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마트롱의 책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스피노자를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과 자연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이는 당대의 유럽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던 초월적인 신성의 주술에서 벗어나 자연의 역동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함이며, 자연 만물이 피동적인 존재자들이 아니라 신의 양태들이라면, 그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들 각자가 만물의 원인인 신의 일부로서 독자적인 행위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보여주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삶을 초월한 존재들이 아니라 욕망과 정념, 인식과 합리성을 지닌 복합적 존재들이며, 무엇보다도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희노애락, 갈등과 협동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존재들이다. 이러한 세계에는 몽롱한 범신론이 들어설 만한 자리가 없다.     

따라서 이 저작은 놀랍게도 스피노자의 정치학이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바깥, 그것도 가장 어두운 그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체계의 핵심에 놓여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마트롱 이전까지 과연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주목했던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그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스피노자의 종교비판에 관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저작을 제외한다면,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이나 미완성으로 그친 <정치론>(Tractatus Politicus, 1977)은 기나긴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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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

하지만 스피노자가 <윤리학> 집필을 중단한 채 1665년에서 1670년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공들여 저술한 저작이 바로 <신학정치론>이 아닌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 저작,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유언이라고 할 만한 책은 바로 <정치론> 아닌가? 또한 19세기~20세기 내내 <공산당 선언>이 유럽의 지배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듯이 17~18세기에 걸쳐 유럽의 군주들과 귀족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된 저작이 <신학정치론>이 아니었던가?   

마트롱의 이 책은 오랫동안 의문의 대상이 되었던 이 사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준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정치에 관한 사유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삶 속에 가상과 미신, 갈등이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보다는, 신의 모상이기보다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존재,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미약한 인식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의 삶 속에서 가상과 착각, 미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욕망을 하되, 비합리적이고 가상적인 방식으로 욕망하는 인간의 삶은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자에 대한 착각,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가상, 신의 대리인들에 대한 미신과 복종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들이 수동적인 가상과 미신, 예속과 복종의 삶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호혜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  

마트롱은 비할 데 없이 엄밀한 분석을 통해, 스피노자의 성숙기 철학을 지배했던 물음이 바로 이것이었음을 드러낸다. 또 더 나아가 스피노자가 <윤리학>과 <정치론>에서 이 물음에 대해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긍정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트롱이 이룩한 업적의 핵심은, 이처럼 정치학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두 권의 저작(<신학정치론>과 <정치론>)만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를 집약하는 <윤리학> 역시 사회적 관계, 정치적 관계에 관한 물음을 근본적인 화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엄밀하게 논증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만이 아니라 철학사 연구 전체의 지평에서 보더라도 그것과 어깨를 겨룰 만한 저작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사상사 연구의 큰 봉우리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감히 헤아려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피에르 오방크Pierre Aubenque의 저작, 장-마리 베이사드Jean-Marie Beyssade의 데카르트 연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관한 헨리 엘리슨Henry E. Allison의 연구서 정도가 이 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트롱의 이 저작이 그토록 높은 수준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그 엄밀함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스피노자 연구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방법을 도입했다’는 평판을 받을 만큼 탁월한 분석과 재구성으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책 제 2부에서 제시되고 있는 <윤리학> 3부와 4부에 대한 논리적 재구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능가하기 어려운 엄밀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우리가 스피노자 철학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일개 연구서(이것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스피노자를 비롯한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일급의 대가들의 저작을 읽으면서 ‘철학함’을, 철학적인 사고 방법을 배우는 것처럼, 마트롱의 이 대작을 읽으면서도 철학하는 한 방법을 배우게 된다. 철학사 연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일 수 있다는 것, 철학함의 탁월한 전범일 수 있다는 것을 빼어나게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이 지닌 궁극의 경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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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4 12:20 2008/04/1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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