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풍경』 깊이 읽기
중국의 근대를 재현한 시각매체, 화보(畵報, illustrated newspaper)



민정기 (인하대학교 중국어중국학전공 교수,『중국 근대의 풍경』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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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갖 것들의 ‘기원’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우주의 기원에서부터 인류의 기원, 사회의 기원, 문자의 기원, 전쟁의 기원, 산업의 기원, 연애의 기원 등등에 대해.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근대’의 기원에 대해 왕성하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원에 관한 모든 질문이 그렇듯 ‘근대’의 기원에 관한 질문 역시 우리의 현재를 이해․평가하고 미래를 가늠하고자 하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질문이 특히 현재 삶의 부조리함에 대한 반성과 대안적 미래에 대한 탐색과 관련될 때 ‘근대’의 기원은 단일한 역사시간의 출발점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던 지점(들)으로 재해석․재발견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중국학도로서 중국 근대의 기원에 대한 다각도의 관찰과 검토는 일차적으로 ‘중국’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 대한 이해에도 기여하게 된다. 중국 근대의 기원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다양한 양상은 잊어버린 우리 근대의 여러 가능태들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근대의 기원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과 짝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 ‘문화’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문화’란 사회적 삶의 모든 양상이자 사회적 관계 맺기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를, 또한 사회적 삶과 관계들을 지지하고 재현하는 표상 체계로서의 문화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지적․예술적 활동의 결과로 얻어진 작품과 관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전통적 용법에서 탈피하여 문화를 보다 넓게 규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층위의 ‘문화들’에 대해 학제를 가로질러 논의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이렇듯 넓게 규정된 ‘문화(사)’ 연구의 견지에서 근대의 기원에 관해 탐구함으로써 특정 학문의 방법론에 의해 수행되는 특정 장르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새로운 ‘구석’들이 발견될 것이다.

중국의 화보(그림신문)는 더 많은 본격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자료의 밭으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중국의 근대를 들여다보고자 할 때 대단히 유용한 매개가 된다. 시각적 재현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매체는 문자 재현이 그 성격상 소홀히 취급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사회와 문화의 세부 측면들을 잘 포착하고 있어, 근대 중국의 시공 속에서 펼쳐진 다채로운 양상의 실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보들이 담고 있는 풍부한 시각 재현들은 그 자체로 중국에서 막 형성 중이던 근대적 시각문화의 중요한 일부로, 당시 중국인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는지 살필 수 있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화보의 역사와 근대 중국의 화보

근대시기 중국의 화보들은 그 시각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보다 풍부한 상상/사유의 계기들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펼쳐진 보다 본격적인 시각문화의 시대를 예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당시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 외래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의 만남과 길항을 통해 이루어졌다.

화보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통상 1832년 런던에서 창간된 Penny Magazine을 시각적 재현을 중심에 두는 최초의 근대적 정기간행물로 본다. ‘유용한’ 지식의 대중적 보급을 발간 취지로 내세운 이 화보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유럽과 신대륙 각지에서 잇달아 유사한 성격의 화보가 발간되었다. 그런데 이 화보들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시각적 매체를 통해 대중화하는 데 목표를 두었지 새로운 소식(news)을 전달하는 것과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화보’(illustrated media)에 들기는 하지만 신문의 기능을 하는 엄밀한 의미의 ‘화보’(illustrated newspaper)라고는 할 수 없다. 신문보도를 위주로 한 본격적인 화보로서는 1842년 런던에서 창간된 Illustrated London News를 최초로 꼽을 수 있다. 이 간행물은 영국 안팎의 두드러진 사건을 목판화로 재현하여 실었는데 이후 화보의 모범이 되어 유사한 매체가 발간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러한 종류의 화보는 양적인 면에서나 그것이 독자 대중에게 행사했던 영향력 면에서나 서구 근대 저널리즘의 주요한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화보들은 재현에 관한 사실주의적 믿음에 근거하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곳곳의 경물을 ‘벌어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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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1898년 10월 10일자 "Puck"지 표지.

한편 거의 동시에 이전의 풍자화와 해학적 민중판화의 정신을 근대적 매체에 구현한 화보들도 출현하였다. 유럽의 Le Charivari(파리, 1832), Punch(런던, 1841)는 이 같은 경향의 화보를 선도했지만, 화보의 대세는 신문화보였다. 미국에서 본격적인 풍자화보가 출현한 것은 비교적 늦은 1870년대로, 대표적 풍자화보였던 Puck(영어판)이 뉴욕에서 첫 출간된 것은 1877년의 일이다. 이 부류의 잡지들은 세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과장된 화법을 통해 수행하며 그림을 통한 풍자의 가능성을 확대해 갔고, 만평(cartoon)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진술과 그것을 매체에 구현하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건과 경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신문화보의 영역에서 그림은 서서히 밀려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매체에 실리는 그림의 풍자성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 대중매체의 영역에서 그림은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만평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중국에서 근대적 저널리즘의 일부로 등장한 초기 화보들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간행물이었다. 중국 최초의 화보로 종종 거론되는 간행물은 1875년에 창간되어 1905년까지 발행된 『소해월보』(小孩月報)다. 서양인 선교사 프랜햄(J. M. W. Franham)이 발행한 이 간행물은 아이들을 위한 운문, 이야기, 전기, 과학지식 등을 싣고 있는데, 동판화로 제작된 삽도를 곁들였다. 이 동판화는 서구의 여러 간행물에서 사용된 동판을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이 간행물은 성격상 넓은 의미의 화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엄밀히 말해 시각적 재현이 위주인 간행물로 보기는 어렵다. 삽도의 비중에 차이는 있지만 이전의 중문 간행물에도 특히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종종 그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아영(阿英)은 중국 최초의 화보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876년 5월에 창간된 『환영화보』(寰瀛畵報)라고 했으며 이후 많은 논자들이 이를 정설로 간주하고 있다. 이 화보는 뒤에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를 창간한 영국인 어니스트 메이저(Ernest Major; 중국명 美査)가 발행한 것으로, 대부분의 그림을 영국의 Illustrated London News에서 그리고 일부는 역시 영국에서 발행되던 The Graphic에서 가져왔다. 세계의 갖가지 풍물을 소개한 그림을 주로 실었으며 본격적인 신문화보는 아니었다. 1880년까지 5년 동안 5권까지 발행된 이 간행물을 정기간행물로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이렇게 보면 1884년에 창간된 『점석재화보』를 중국 최초의 본격적 화보로 꼽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점석재화보』

『점석재화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메이저가 운영하던 석판인쇄 전문 출판사 점석재석인서국(點石齋石印書局; 1876년 창립)에서 발행한 시사화보다. 메이저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신속한 보도로 정평이 나 있던 『신보』(申報; 1872년 4월 창간)의 발행인이었으며 점석재석인서국을 비롯한 여러 계열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출판․언론인이었다. 점석재석인서국은 당시 상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출판사에 속했는데, 화보를 발간하기 전에는 주로 사서(四書) 등 고전과 자전(字典) 등을 석판인쇄의 장점을 발휘해 축소 인쇄해 간행하여 많은 수익을 올린 바 있다.
청불전쟁(1884)으로부터 청일전쟁(1894~1895) 그리고 무술년의 변법운동(1898)에 이르는 격동기의 온갖 크고 작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포괄하고 있는 『점석재화보』는 중국의 근대가 그 기원의 시공에서 빚어낸 다채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보물 창고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화보는 서구의 저널리즘과 ‘필기’(筆記)로 대표되는 온갖 시시콜콜한 일들에 관한 전통적 기록문화, 사실주의적 시각 재현에 관한 근대적 믿음과 중국 전통의 그림체, 이미 중국 문화 곳곳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그것을 내면화한 혹은 그것에 저항하는 중국인의 시선 등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어우러진, 그 자체가 특별한 문화현상이기도 하다.

1884년 5월 8일에 첫 호가 나온 『점석재화보』는 1898년에 정간되기까지 15년 동안 순간(旬刊; 열흘에 한 번 발행)으로 발행되었는데, 매 호 통상 아홉 편의 화보가 실렸다(1889년 발행분까지는 7, 8편의 화보가 실린 호도 더러 있으며, 1890년부터는 규칙적으로 아홉 편씩 실림). 매호는 음력으로 발행 연(年)-월(月)-순(旬)이 적혀 있으며 호수와 정가가 밝혀져 있는 앞표지가 붙어 있고, 뒤표지에는 광고가 실려 있다. 제6호부터는 부록으로 왕도(王韜)의 문언단편소설이 『송은만록』(淞隱漫錄)이라는 큰 제명 아래 한 편씩 게재되기도 했으며 그의 유럽 기행문이 실리기도 했다.

『점석재화보』는 책을 접었을 때의 크기가 가로 142mm, 세로 240mm이며, 맨 앞뒤에는 한 쪽에 화보기사 한 편이 실렸고 중간에는 두 쪽을 한 면으로 하여 화보기사가 실렸다. 『점석재화보』는 독특한 이원적 번호 매김 방식을 채택했다. 제1호부터 일련번호로 호수를 표시하는 동시에 ‘甲一, 甲二 …… 甲十二’와 같은 방식으로 12호를 단위로 따로 번호 매김을 했다. 이 같은 12호 단위의 번호 매김과 창간 당시 광고, 상해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첫 12호의 합집 등을 근거로 매 12호씩 즉 4개월 분량을 선장(線裝) 제본(책의 오른편 가장자리 쪽에 세로 방향으로 구멍을 뚫고 끈으로 꿰어 엮는 책 장정법)으로 묶어 다시 발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재발행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12호를 단위로 번호 매김 하는 것은 정간 때까지 지속되었다. 상해도서관 근대문헌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甲一~甲十二 합집은 전체 표지와는 별도로 각 호의 표지를 남겨 두고 있다. 그런데 각 호 표지에 발간 연월순과 호수는 빠져 있으며 광고 부분도 누락되어 있고 왕도의 소설도 실리지 않았다. 정간 이후에 발간된 전체 합집본은 12호 단위의 합집본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발간물의 당초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점은 이 정기간행물의 화보기사들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필기 양식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점석재화보』에 실린 내용들은 근대적 신문보도에서부터 지괴(志怪)적 성격이 농후한 필기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은데, 당시 ‘신기’(新奇)에 대한 전통적이며 근대적인 관념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근대적 저널리즘이 주조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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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그림과 기사가 함께 있는『점석재화보』. 합집본으로 재발행하는 과정에서 그림 아래에 기사가 추가되었다. 위 그림은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공간을 잘 재현해 주고 있는 19세기 후반 상해의 대표적 거리 모습이다.
(『중국 근대의 풍경』156쪽 참고)


그림과 기사가 함께 있는『점석재화보』. 합집본으로 재발행하는 과정에서 그림 아래에 기사가 추가되었다. 위 그림은 전통과 근대가 뒤섞인 공간을 잘 재현해 주고 있는 19세기 후반 상해의 대표적 거리 모습이다.

『점석재화보』는 『신보』 배급망을 통해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배급되었으며, 후에 별도로 중국 각지에 20여 개의 자체 영업점을 갖게 되었다. 시각적 재현이 갖는 파급력을 고려해 볼 때 적지 않은 양이 유통된 이 화보는 근대 중국인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을 구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점석재화보』는 당시 중국 내외에서 출간되던 다른 화보 및 기록 사진들처럼 서양인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중국인 독자층을 대상으로 중국인의 관점을 보여 준 첫 화보집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발행인이 서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점석재화보』의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주체는 중국인 화가와 지식인으로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점석재화보』를 필두로 중국은 석판인쇄에 의해 제작되는 시사화보의 시대로 접어든다. 『점석재화보』는 여러 면에서 이후 약 35년 동안 발행된 여러 화보의 모범이 되었다. 『점석재화보』의 초기 주요 화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오우여(吳友如)가 독립해 발행한 『비영각화보』(飛影閣畵報, 上海, 1890)는 내용에 ‘백수도’(百獸圖), ‘사녀도’(仕女圖) 등 전통 회화에 가까운 그림들도 싣고 있는 점이 다소 다를 뿐 신문보도화의 경우 『점석재화보』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은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뒤이어 나온 화보들 역시 기본적으로 『점석재화보』를 모델로 했다. 이들 화보는 석판인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점석재화보』와 유사했다. 『성속화보』(醒俗畵報, 天津, 1907), 『성세화보』(醒世畵報, 北京, 1909) 등과 같이 계몽적 성격과 풍자적 성격이 보다 강해진 화보의 경우에서도 그 영향을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컷 혹은 네 컷 만평에 가까운 지면을 선보인 『민권화보』(民權畵報, 上海, 1912)와 같은 경우도 신문화의 경우에는 『점석재화보』식 화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후 사진기술의 발달과 인쇄매체에의 적용이 확산됨에 따라 시사보도화는 사진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정기간행물에 실리는 그림은 풍자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어 시사만평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비교적 큰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점석재풍’(點石齋風)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화일보』

경쟁적으로 창간되었다 또 얼마 가지 못해 폐간되곤 했던 숱한 청말의 화보들 가운데 몇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화보로 『도화일보』(圖畵日報)를 꼽게 된다. 이 간행물은 우선 일간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며, ‘점석재풍’의 기본적인 영향 속에서 몇 가지 영역에서 혁신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또한 특별하다.

『도화일보』은 상해 『시사보』(時事報)의 부간(副刊) 화보를 제작·인쇄하던 환구사(環球社)에서 1909년 8월 16일자로 창간한 일간 화보다. 『도화일보』 역시 음력으로 발간일을 표시했는데, 창간호 표지에는 “기유년 칠월 초하룻날 출판”(己酉七月初一日出版)이라고 적혀 있다. 얼마 후부터는 ‘선통’(宣統)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호인 404호의 발간일은 “선통이년 팔월 이십구일”(宣統二年八月念九日)로 양력 1910년 10월 2일에 해당한다. 음력 7월 첫날에 창간되어 이듬해 음력 8월의 마지막 날까지 꼬박 열네 달 동안 발행된 셈으로, 첫해 음력 12월 25일(1910년 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3일(2월 12일)까지 설을 전후로 9일 동안 휴간한 것을 제외하고는 위 기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발간되었다.

크기는 접었을 때 가로 길이가 85mm이며 세로 길이가 200mm이며 통상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2도 인쇄된 표지가 씌워졌다. 『도화일보』는 표지를 제외하고 매호 12면 발간되었으며 이는 창간호부터 마지막 호까지 일관되었다. 표지 앞면에는 제호와 호수, 발간연원일(음력)과 가격(상해에서의 판매 가격과 여타 지역에서의 판매 가격)이 명시되어 있으며, “상해환구사편집발행”(上海環球社編輯發行)이라고 적혀 있으며 발행처의 주소도 적혀 있다. 붉은색으로 인쇄된 배경은 몇 차례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대개 지구의를 그려 놓았다. 이는 ‘환구사’라는 발행사의 명칭과도 관련되며 ‘세계를 향해 열린 시선’이라는 『도화일보』의 기본 지향과도 관련된다. 표지 뒷면에는 출판사 각 부서 및 인원 등에 관한 정보와 판권에 관한 명시가 들어가 있거나 부간에 관한 알림 등 광고가 실렸다.

『도화일보』는 펼쳤을 때 표지 뒤편에 등을 대어 붙인 쪽을 포함해서 인쇄가 되었기 때문에 맨 앞뒤로도 두 쪽에 걸친 화보기사가 실릴 수 있었다. 두 쪽에 걸쳐 하나의 화면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다수 면을 이루며 하나의 쪽이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첫 화면을 제외한 화면의 상단에는 각종 광고가 실린 점이 『점석재화보』나 여타 화보와는 다른 점으로 눈에 띈다.

『도화일보』의 가장 독보적인 면은 매호 12면의 지면을 특정 난들로 구분한 점으로 이는 지식을 분류하고 명명하려는 지향의 대중적 층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보이는 분류는 당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근대적 학적 체계에서의 지식 분류는 물론이고 일반 신문에서 소식과 정보를 분류하는 방식과도 사뭇 다르며 관심을 두는 대상의 범위도 달랐다. 그 가운데 여러 다른 화보와의 비교 속에서 단연 도드라지는 것은 ‘장소’들에 대한 관심이다.

발간 기간 내내 연재된 ‘세계의 경물’[大陸之景物]로 대표되는 ‘장소’들 자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도화일보』의 시선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며 당시 대중적인 지식을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이 세계에 관한 인문지리적 지식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19세기 중엽에 세계를 향해 문호를 연 이래 세계의 인문지리/역사지리에 관한 지식은 이른바 ‘신지식’의 가장 중요한 구성 부분 가운데 하나였다. 아편전쟁의 여파 속에 위원(魏源)에 의해 편찬되어 수차례 증보를 거듭하며 한자권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에 큰 영향을 준 『해국도지』(海國圖誌)가 이러한 지식의 가장 정련된 형태를 보여 준다면 『도화일보』의 화면들은 그것의 대중적인 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 중국의 대중이 과연 무엇을 매개로 세계 속의 중국을 사유했을지 그 일단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 거론할 만한 것은 시각적 풍자성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풍자성의 강화는 시국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요긴했던 이 시기의 전문 화보와 일반 신문잡지의 부간 화보 공히 대체로 『점석재화보』와 결별하는 지점인데, 전란 체제를 도입한 『도화일보』는 이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는 난에 ‘신지식의 잡화점’[新知識之雜貨店]이란 명칭을 부여해 특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대한 ‘풍자’와 ‘경고’야말로 새로운 지식의 정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시각적 재현에 의해 수행되는 ‘풍자’와 ‘경고’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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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도화일보』는 시각적 재현을 통해 풍자와 경고를 시도하기도 했다. 위 그림은 목을 맨 여성을 보여 줌으로써 자유롭지 못한 결혼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장면(『중국 근대의 풍경』407쪽 참조).



아동 계몽용 화보였던 『소해월보』가 창간된 것이 1875년이고 신문보도화를 중심으로 한 엄밀한 의미의 화보로서 『점석재화보』가 창간된 것이 1884년이고 보면 중국의 화보 출판은 유럽이나 미대륙과 비교했을 때 출발에 있어서 약 40년의 격차가 있으며 발간물의 형태나 화풍 등에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화보의 쓰임새가 넓어져 간 수순은 대체로 동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아동·부녀용(계몽용) 화보 → 시사화보 → 풍자화보 순으로 출현(유행)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바, 이는 저널에서의 ‘그림’의 사용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며, 그림이 문자를 통한 지식 전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데에서 지식과 정보 전달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매체가 되고, 나아가 특정한 관점을 전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가운데 『도화일보』는 시사화보를 기초로 하면서 계몽성과 오락성 그리고 나아가 풍자성까지 포괄하고 있는 청말 화보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흥미로운 매체로 신해혁명을 앞둔 전환의 시공 속의 중국인들의 일상과 의식, 그리고 청말 대중매체에서의 시각적 재현 양상을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긴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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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6 11:00 2008/04/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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