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일(금)에 독서대학 르네21의 금요대중강좌에서 4월 주제로 꼽은 ‘역사—인류사의 위대한 백년 18세기를 논하다’ 가운데 『에도의 몸을 열다』를 소재로 역자 박경희 선생님께서 하신 강연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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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_대한성공회 까페)

강의 30분 전에 당도했는데, 대한성공회 대성당의 위치는 예전부터 알았지만 막상 찾아 들어가니 강의실을 정확하게 찾기는 약간 어려웠습니다. 성당 내부 강당을 이용하는 것이라 공식적인 안내판은 없고, 바닥과 일부 벽면에 화살표를 따라 (약간 헤맸다가) 강당을 찾아 갔습니다. 강당은 소강당 규모여서 제법 크기가 되더군요.

우선 사회자 이황직 교수님(숙명여대 의사소통센터에 계시는 분인데, 「근대 한국의 초기 공론장 형성 및 변화에 관한 연구」, 「역사의 정치화와 정치의 탈역사화」,「종교사회학에서 본 개인주의와 공동체 형성의 문제」, 「공동체의 도덕적 기초에 대한 사회 이론적 고찰」 등의 논문을 쓰신 사회학자이자 독서대학 기획위원이시죠) 이 우선 저자와 독자의 직접 소통으로서 대중강좌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하신 다음, 18세기라는 주제에 대해 약간 소개를 하셨습니다. 역사학에서 19세기라는 대변동의 사회를 강조하지만, 그에 앞서 18세기라는 역동성이 축적되던 시기가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18세기 에도를 본다는 것은 일본이라는 내적 완결성을 가진 사회와 네덜란드라는 오픈된 사회의 만남을 읽는다는 재미도 있고, 그 와중에 어떤 창조적(?) 오해가 있더라도, 오늘의 한국 사회가 역시 탐구해 볼 만한 영역이라고 말씀을 이으면서, 책 내용과 18세기 에도 사회에 관한 소개를 간략히 하셨습니다. (이런 설명을 하시는 동안 청중을 대략 살펴보니, 30~40대가 주류였고, 드문드문 은퇴자로 보이는 60대나 20대 젊은이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여:남 성비는 2:1쯤 되는 듯했고요.) 강좌와 책 소개 뒤에는 역자 박경희 선생님에 대해 소개를 하셨습니다. 박경희 선생님은 이화여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셨고, 일본 고문서 전문가로서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대마도 종가 문서를 담당하시는 사료연구위원이시자 『만들어진 고대』의 역자이자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등을 쓰신 저자로서, 우리의 18세기와 짝을 이룰 에도 시대를 소개하는 데 가장 적절한 분이 아니겠느냐고요.   

이어서 곧바로 박경희 선생님께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에도 시대라 하면 우리의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시대인데, 일단 책 제목을 두 가지 코드로 이해함직하다는 것이지요. ‘에도의 몸’은 ‘에도인의 몸’이자 ‘에도라는 국가’로, ‘연다’는 ‘해부학’이라는 소재와 ‘문호의 개방’이라는 상황을 모두 은유한다는 소개를 하셨습니다.   

일단 ‘연다’의 전제는 ‘닫혀 있음’인데, 에도의 ‘닫혀 있음’이 어떠한 의미인지 오늘은 그 시대 배경을 주로 설명하겠다고 강연 의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책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용어를 이해하면 책 내용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난학, 남만인, 오란다, 화란 등의 용어 유래를 설명해 주셨지요. 강의 내용이니까 약간 정리해 보자면... 오란다는 홀란드의 포르투갈식 표기인 Holanda가 전해진 것입니다. 이 말의 발음이 화란, 화란타, 아란타 등의 표기로 전해진 것이지요. 남만인이라는 말은 15세기(대항해 시대로서 포르투갈, 스페인 사람들이 대양을 휘젖고 다니던 때지요)에 네덜란드인보다 앞서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에 들어온 포르투갈 사람들을 부르면서 생겨났답니다. 화이 사상에 따라 중국인들이 인도차이나 지역을 남만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 쪽에서 온 사람들을 남만인이라 불렀다지요. 뒷날 서양인들을 통칭한 홍모인이라는 말은 에도 시대 초기(17세기 초)에 일본에 온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의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유래한 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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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머리를 어지럽힌 자화상」(1629년)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
"홍모인이라는 말은 17세기 초에 일본에 온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의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에서 유래한 말"





박경희 선생님께서는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고문(古文)이 지닌 맛을 살리기 위해 이 말들을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사람으로 통일해 버리기보다는 좀 혼란스럽더라도 이 표현을 원문에서 쓴 그대로 살리셨다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용어들의 유래 자체가 일본이 서양을 만난 방식을 설명한다는 것이지요.   

15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처음 당도했을 때 (조선이 발터베레나 하멜을 구금해서 조사한 뒤 거주지를 제한한 것과 달리) 일본인들은 신기해하고, 그들이 가진 모든 물건에 열광하고, 그것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았고, 많은 돈을 주고 남만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이렇게 해서 남만 무역이 성립했습니다.   

서양인들 입장에서 남만 무역은 기독교 포교의(이사벨라 여왕이 콜럼부스의 대항해를 지원한 이유가 그랬듯이)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일본의 영주(다이묘)들은 남만 무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먼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그리고 영지민들을 개종시키는) 경우도 생겼다 합니다. 전국 통일의 초석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 이미 일본에는 가톨릭 신자가 1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합니다. 그러다가 도요토미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가톨릭 영주들이 집단행동을 할 것을 걱정해, 무기를 몰수하고, 불교를 장려하고, 선교사를 추방하면서 가톨릭 탄압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1592년 이때까지 종교를 바꾸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본보기로 나가사키에서 26명이 순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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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에 "남만인"이란?
"네덜란드인보다 앞서서 인도차이나 반도를 경유해서 일본에 들어온 포르투갈 사람들..."

도요토미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바쿠후 정부는 대체로 도요토미 정권의 쇄국 정책을 이어받습니다. 일본의 쇄국 정책은(조선과 달리) 공식적인 칙령을 특징으로 합니다. 흥선대원군 시대 조선의 쇄국 정책을 추진한 것은 양란 등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 이전에 공식적으로 쇄국 정책을 추진한 적은 없습니다(대규모로 서양과 접촉한 적도 없고요). 명/청, 왜국, 류큐(오키나와) 등과 사대교린을 했을 뿐입니다. 그에 반해 도쿠가와 바쿠후는 강력한 쇄국 정책을 꾸준히 펼쳤습니다.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기준을 담은 칙령을 반포했고, 그 가운데는 인도차이나 등으로 진출해서 무역 활동을 하던 일본인, 즉 해외로 나간 일본인의 귀국조차 막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회 변동 요소의 유입을 막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게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 17세기 후반 드디어 쇄국 정책이 완성되었고, 일본 전역에서 서양인의 유입은 철저히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양 문물에 관한 관심만은 여전해서, 1634년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설치된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상관 내에서만 무역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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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_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른쪽_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시대는 우리의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시대"

연 1회 상선 입국과 네덜란드 소식지 발행이 허가되었고, 데지마에는 상관원 외에 의사와 통역사 등이 거주합니다. 데지마 거주자들은 시내 출입을 할 수 없었고, 데지마 내로는 무역을 담당하는 일본 관리들과 상관원들을 위한 연회에 참가하는 창기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지요.   

조선통신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외부의 지식 창구라 할 데지마에서 나온 모든 것이 지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화란/서양에 관한 이 백과사전적, 혹은 총류적 지식은 난학(蘭學)이란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닙니다. 처음 서양 문물에 관한 지식은 남만학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해체신서』를 번역한 일본의 지식인 집단은 이와 구별되는 좀더 새롭고 멋진 지식의 창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다르다, 학문이다, 과학이다… 뭐 이런 태도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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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해체신서』의 속표지
"『해체신서』는 순수하게 의학적인 논의를 넘어선 몇몇 이유 때문에 큰 반발이 불가피한 책이었다."
(『에도의 몸을 열다』본문 중에서)

18세기는 일본에도 실학의 시대였습니다. 6~7대 쇼군의 실정으로 바쿠후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봉건제의 근본인 농민의 삶은 피폐했습니다. 8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습직하면서 전대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쳤습니다. 교호 개혁이라 불리는 이 개혁은 에도 시대 3대 개혁의 첫 번째로, 식산흥업을 목표로 합니다. 즉 농민들의 생산량을 늘려서 국가 세액을 늘리겠다는 속셈이지요. 서양의 봉건제가 그러했든, 피폐한 농민 생활은 농촌 붕괴와 도시 빈민층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도시의 상품 경제가 번성하자 지위가 낮은 대신 자유로웠던 상공인들은 신분제 사회를 벗어나 부를 축적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지배층이 오히려 실학/자연과학 등을 장려해 농업 생산량을 늘리려 했습니다. 요시무네 시대에 서양 과학서의 수입이 허락되었고, 일부 관료들을 네덜란드에 파견하거나 상관원들에게 서양 지식을 배우게 하는 등 난학 수용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1774년 『해체신서』가 번역되면서 해부학이 성립했는데, 이것은 화란어-일본서 사전이 출간되기 무려 22년 전이랍니다. 정말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네덜란드어 실력으로, 거의 해부학 그림을 해독하는 수준으로 해낸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 『해체신서』가 일본 사회가 변화한다는 진정한 신호였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에도의 몸을 열다』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번역자 집단은 해부학도 잘 알지 못했고, 네덜란드어 능력은 부족했고, 게다가 직접 해부를 하기에는 너무 고귀하기까지 했습니다. 사형장에 가서 망나니가 사형수의 시체를 갈라주는 대로 대충 보고, “오오~~~ 이 책이랑 똑같구만.” 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변화도 없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습니다(그래서 이 책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이황직 선생님은 저자의 이 모호한 태도가 살짝 푸코 냄새가 난다고 평하시더군요). 어찌 되었든 일본 국내의 경제는 발전하고 있었고, 일종의 잡학이긴 했지만 서구식 인식론은 이미 유입이 되었습니다. 위정자들은 때에 따라 난학을 이용하기도, 탄압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200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난학이 새롭게 조명 받은 것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편전쟁 패배 이후였습니다. 세계의 중심 중국이 서양 전쟁에 패하자, 일본 위정자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연스럽게 난학의 중심은 자연과학에서 군사학으로 초점이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얻은 승리는 바로 그 결과입니다(한편으론 군사 비용에 쏟아 부을 만큼 에도 시대에 일본이 축적한 경제력이 상당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자, 이렇게 해서 에도 시대에 관한 설명이 끝났고요. 마지막으로, 박경희 선생님께서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미술사학(New Art History)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고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특정한 미술 사조, 어느 천재가 살다 간 시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시각 자료가 그 시대의 정신성을 어떻게 담지하고 있는지 분석하는 이 방법론은 말하자면, 시각 자료를 통한 담론 분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신미술사학을 통해 페미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등 다양한 문예 이론이 미술사 연구에 흘러들 수 있었다 합니다.

 이 정도 내용으로 한 시간 정도로 첫 번째 세션이 끝났고, 15분 휴식 후에 두 번째 세션에서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질의응답 시간도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습다만, (스크롤의 압박을 걱정하여) 여기에 전부 옮기지는 않겠습니다. 이번 달 첫 강의라서 그런지 책 내용보다는 결국 일본이 왜 먼저 개항하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서양은 왜 조선에는 접근을 안 했는지 등의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이었는지라…… 박경희 선생님도 질문을 조금 빗겨가서 짐작해 봄직하고, 생각해 봄직한 배경, 맥락 설명 등으로 화두를 던져주시는 방식으로, 그러나 성실하고 꼼꼼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질문 중에는 어떻게 한일 교류사를 전공하고, 일본 고문서 전공자가 되었는지 하는 개인적인 질문도 있었습니다. 4월 첫 강의라서 그런지 질문들이 상당히 포괄적이기는 했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정말 진지했습니다(졸거나 중간에 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요, 수업 중에 기침 소리 한번 안 들렸습니다). 이렇게 인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로 가득한 공간에 다녀오니, 편집자로서 참 흐뭇한 경험이었습니다.  

- 편집부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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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20:31 2008/04/2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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