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상도 그 외부를 가지며, 그 외부를 통해 형성되고 작동한다. 아니, 어떤 사상도 그 외부를 나름대로 수용하고 사용하는 방식으로 형성되고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외부는 모든 사상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외부는 모든 사상, 모든 철학의 내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철학은 자신의 모든 사유에 내부성을, 형식을 부여하고자 한다. 즉 특정한 조건과 결부된 사유로 다루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사유 자체의 내적 성질로, 혹은 인간이나 주체 자체의 보편적 양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마치 어떤 조건과도 무관한 보편적 진리를 자신이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자 한다. 아마도 바로 이 순간이 철학이 세계와 분리되고 이별하는 시점일 것이다. 바로 여기가 관념론이 시작되는 지점이다.(이진경, 『철학의 외부』중에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철학사상은 그 자체로 어떤 ‘완결’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존재다’와 같은 하나마나한 정의들을 내리곤 합니다. 물론 그러한 정의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니고,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다른 생각들 중에 의미있는 한가지이거나, 우연히 지금 그 사상을 읽고 있는 독자의 ‘조건’과 맞아떨어졌을 때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또는 ‘선하다’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9시 뉴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에 관한 뉴스가 나오고 있으면 “역시 인간은 본성은 악한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도,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할머니의 뉴스가 나오면 즉시 우리의 본성은 반대로 뒤집힙니다. 다시 말해서 본성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러한 규정이 참고한 ‘외부’와는 다른 이질적인 ‘외부’와 만나면 즉시 변경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의 철학자들은 미친 듯이 약동하고 있는 ‘외부’를 멈춰 세우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고 합니다. 그때 그가 하는 것이 ‘해석’입니다.
‘모든 해석은 창조’라는 니체의 말마따나 해석 행위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해석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창조한다....세계를 바꾸는 실천도 하나의 해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자의 다른 발은 기호와 표상, 언어에 묶여 있다. 실천은 자주 텍스트 안으로 회귀한다. 변혁하는 책이 세계에 뛰어든 전사이자 기계라면, 해석하는 책은 그 자체로 책일 뿐이 세계와 마주한다. 세계 자체가 텍스트로 축소되는 것이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머리말 중에서)
‘해석’은 외부-세계를 기호와 언어에 묶어 놓으려고 합니다. 얼마나 잘 묶어 놓는가에 따라서 그 사상과 이념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가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맑스-레닌주의라는 사상체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소련이 망한 이후로 ‘맑스의 사상’은 대개의 경우 ‘낡은 것’으로 취급받곤 합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칼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의 11번째 테제)
맑스의 철학비판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는 저 문구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합니다. 우리가 ‘낡은 것’으로 취급했던 ‘맑스주의’가 오히려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낡은 것’은 우리가 낡았다고 할 때만 낡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펄떡거리며 숨쉬고 있는 우리의 삶이 멈추지 않는다면, 거기에 접속되는 그 어떤 책도 낡은 것이 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철학의 외부란 그 철학이 철학일 수 있도록 하는 조건, 즉 우리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유행으로 치부해 버리는 맑스주의가 낡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무언가에 의해 낡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거대한 네트워크로 이미 연결되어 작동하는 집합적 신체나 ‘집합적 지성’을, 근대과학이 지옥에서 불러낸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처럼 비난하는 순간에조차 이미 우리는 그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그 집합적 신체가 생산한 것 속에서 생활하며 그 집합적 지성이 산출한 것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중에서)
책은 낡은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접속점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다시 새것으로 만들어 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은 책을 책이게끔 합니다. 즉 그것이 읽히도록 해서 온전한 한 권의 책이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천년 전에 읽히던 ‘낡은 책’도 지금 여기에서 삶과 접속되고 ‘새 책’으로 거듭납니다. 결국 ‘외부’는 각자(책과 삶, 서로에게 외부인 것들)를 싱싱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책을 통해 타인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타인을 통해 다른 책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자극이되고,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관계'들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그런 '관계'가 확장될 수록 우리의 능력,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외부를 통해 관계를 확장하고 우리 삶을 늘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철학은 지루하고 낡은 것이기를 멈추고, 우리의 삶이 가진 고정된 흐름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 웹 기획팀 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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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 블로그의 글 애독자입니닷
사부작 들어가고 깊디 깊게 읽고 갑니다
특히 정군님의 글에선 늘 감동/ㅇ/
좋은 글 좋은 책으로 널리널리 이롭게해주세요
윤미님 안녕하세요!
그린비 블로그에 애독자시라니 감격적이랄까요. ^^
앞으로도 꾸준히 찾아주세요.
그런데 '사부작'은 뭔가요?
제가 그린비 블로그에 들어오는 소리입니다
쉼도 없이 가벼이 들락날락 거리지요 ㅎㅎ
최근에 열하일기 책을 샀는데 앞으로 그린비 도서와 물질적 만남을 자주 갖도록 노력하려고요
좋은 책 많이 만들어 주세요
'사부작'! 그런 소리였군요 ㅋㅋㅋ
제가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만(전 웹 기획자라서요 ^^;) 우찌되었든 초 열심히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물질적 만남은 중요한 것 같아요(음흉).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