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EBS 지식채널e’를 봤습니다. 광우병에 관해 꽤 흥미로운 동영상이 있다고 해서 함 들어가 봤지요. ‘17년 후’라는 제목의 그 광우병 동영상은 접속자 폭주로 볼 수 없었고, 제가 본 건「밤 2부」였습니다. 이동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허락된 게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노동자들이 3교대를 하면서 일을 해야 했다는 건 잘 몰랐습니다. 또 하나,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0교시 수업을 지금 학생들도 듣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보다 야자시간이 한 시간 더 늘어났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 다음 나온 장면이 쇠고기 수입 반대를 주장하는 10대 여고생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번 촛불문화제는 10대 여성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저 역시 광화문을 지나며 교복 입은 학생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있기에 이번 교육부 지침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었죠.


<EBS 지식채널e 「밤 2부」: 이게 어제 제가 본 동영상입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언니(정말 이런 분들이 언니입니다)는 쇠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도 결국 남아돌기 시작하면 군대와 학교 같은 곳으로 올 거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입을 반대한다고 말하더군요. 고등학교 1학년 언니는 어떻구요. 누가 시켜서 나온 거냐는 말에 요새 애들 중에 누가 나오라고 해서 나오는 사람들 있냐고 맞받아치는데 참 멋졌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라고만 하지 마시고, 공부할 환경을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모습 보면서 좀 놀랍고, 부럽고, 샘도 나고, 기특하기도 하고 온갖 복잡다단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언니들을 청계광장으로 오게 만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고 아플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가장 피해를 볼 수 있는 집단이 학생들인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 언니들을 이해하기 위해 뭘 읽어 볼까? 하며 책을 찾다가, 10대 여성들을 위한 여성주의 서적들은 거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히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읽을 만한 책들은 많았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없었는데, 지금도 없었습니다. 이른바 ‘소녀들의 여성주의’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소녀’라고 검색해서 나온 책이 『불량소녀 백서』였습니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라 기대됐습니다.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편안한 글쓰기, 적당한 완급 조절, 허를 찌르는 비유. 이 언니는 소녀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가부장제로 꽁꽁 뭉쳐 있다는 걸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풀어서 설명하고, 또한 자본이 어떻게 소녀들을 포획해 가는지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점 자라나는 몸과 그에 따른 변화, 성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설명한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어설픈 성교육은 사절이거든요.

여러 주제들이 있지만, 분노 표출을 설명한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뭐 제가 안 좋아하는 게 있겠습니까만~) 분노는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성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상황은 꽤 많습니다. 자기 몸은 생각하지 않고 ‘안여돼’(안경․여드름․돼지)라고 부르는 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고, 뭐라고 불평하는 여성들을 보며 ‘드센 여자’라고 무언의 압박을 넣는 주위의 몇몇 남성들도 언니들을 열 받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니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대부분은 그렇죠. ‘아유 내가 말한다고 달라지겠어, 걍 참자~’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선생님에게 매를 맞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어떤 선생님들은 ‘니네가 공부하는 이유는 똑똑한 아들을 낳기 위해서야’라고 말하는 선생에게도 별 말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대들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을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친구들은 저를 불평쟁이로 알고 있는데 “그만 때려요!”라거나 “너 그 입 닥쳐!” 요런 소리까지 하면 이제까지 선생님들에게 쌓아 온 좋은 이미지도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고, 얌전한 제 친구들은 저랑 놀아 주지 않을 테니까요. 한번 찍히면 어릴 때부터 인생이 피곤해지는 곳, 학교. 전 어쩌면 영리하게 판단을 잘 한 아이였고, 어떤 면에선 최악의 비겁자였습니다.

항의는 어려운 일입니다. ‘조그만 게 와서 까분다’라는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이죠. 뭐 세상이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포털 사이트에 달리는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교감이라는 인간이 휴대폰으로 한 여학생의 다리를 촬영했을 때에도, ‘요새 애들 치마가 짧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니까 사진 찍는 거 당연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요런 남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입니다. 제가 목소리 높여 항의하면 이상하게 내 잘못으로 변하는 요런 세상에선 다음번에 비슷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를 위축시키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뭘 해도 안 먹힌다라는 무기력과 우울로 변합니다. 이 언니는 직접적인 방법이 두렵다면 우회적으로 항의하라고 합니다. 분노는 어떻게든 표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에너지들이 더 커질 테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사임당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Circe Offering the Cup to Odysseus」. 키르케(Circe)는 오디세우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로 팜므파탈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세상에 선택지가 이거 두 개밖에 없을까?








또 이 언니는 분노하기 위해선 세상이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이미지, ‘현모양처/팜므파탈’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두 개 밖에 없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남성들이 자기 좋은 여자 만나려고 만든 이분법이지, 우리가 만든 건 아니니까요. 나에 대한 이미지들은 내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열 받는 거 참는다고 현모양처 되는 거 아니고, 열 받았다고 외친다고 해서 내가 나라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우리가 시시해 보이는 사소한 폭력이나 차별들에 항의할수록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말합니다. 이 언니 말처럼 별 거 아닌 일들이 어쩌면 가장 정치적인 문제죠.~
   
『불량소녀 백서』라고 하지만 올해 이팔(28) 청춘을 맞는 저에게도 꽤나 유용한 책이었습니다. 다 아는 내용이야 하면서도 이 책을 쓴 언니는 아는 만큼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거기서 느낀 일들을 썼기에 재미있게 또 진지하게 읽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10대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이라기보다는 많은 경험을 해본 언니가 동생들에게 전하는 삶의 지침처럼 읽힌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가진 의미가 축소되는 건 아닙니다. 만약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저도 ‘내 인생의 8할은 삽질’ 요런 이야기는 안 하고 다녔을 테니까요.

청계광장에 있던 그녀들에게 ‘10대 여성 만세’라거나 ‘우리의 희망’, ‘새로운 세대의 탄생’ 같은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유명한 학자를 끌어들여서 그녀들을 설명하고 싶지도 않구요. 저에겐 그녀들을 그렇게 규정할 권리도 없고, 게다가 추상적인 말들로 묶어 버리기엔 그녀들이 가진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니까요. 제가 이 책을 빌려 말하고 싶은 건, 이번 촛불문화제를 주도한(?) 그녀들이 이 책이 말하는 ‘불량소녀’와 비슷하다는 거죠. 거리에 나온 그녀들이 모든 10대 여성의 정서를 드러낸다고 보진 않습니다. 『불량소녀 백서』의 언니가 말하는 것처럼 10대 언니들이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는 점에 저는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10대라고 생각하지만(물론 20대를 더 그렇게 생각하긴 하죠) 이 일로 인해 절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됐으니까요.

- 편집부 강혜진

p.s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질문이 생겼습니다. 뜬금없이 책 이야기하다가 무슨 헛소리? 하시겠지만, 책을 읽으며 한참 웃고 떠들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던진 질문들이 유효한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성인 여성의 관점에서 비-성인 여성들의 여성주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거죠.  
 잠깐 샛길로 새서 말하자면 어쩌면 이런 호들갑이 10대를 가르쳐야 하거나 계몽시켜야 하는 기성세대들의 시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0대들을 통제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언론과 정부를 보며 어느 누구도 나이주의(ageism)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느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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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8 11:38 2008/05/2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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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스물여덟 2008/05/28 12:46

    동년배 여성으로써 글 잘 읽었어요

  2. peanut 2008/05/28 12:53

    이미지 출처가 오마이 뉴스 인가요?

    애들 얼굴 좀 가려주지....OTL...

    • 왜요? 2008/05/28 13:35

      애들얼굴 왜가립니까?

      자신이 택한일이고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텐데요?

      뭔가 켕기기라도 하나?

    • 왜냐면. 2008/05/28 14:03

      아이들은 당당한데
      뭐가 켕기는 어들들이
      저 아이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는데 활용하기 때문이에요.
      참 못난 어른들 많아요. 글쵸?

  3. ㅋㅋ 2008/05/28 14:58

    요즘 학부모들이 어떤데 그고기가 학교로와여? 말도 않되는소리하네요 역시 아직 어리시고 생각이 단순하시네요 요즘 학부형들 선생님이 손바닥 때리면 그날로 그선생 목아지 잡아 비틉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학생들조차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않보는데 그고기가 학교로 와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 어린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잘듣고 잘배워서 나중에 커서 본인들이 국회나 나라를 위해 큰힘을 쓸수 잇을때 그때 이나라를 위해 지금 처럼 잘못된것들을 바로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4. 신사임당 2008/05/28 15:15

    신사임당이, 조신하고 다소곳한 여자?
    물론 그 시대에 여자에게 요구되는 처신을 다 했지요.
    그 여자가 그 시대를 얼마나 당당하게 살았나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어려서 바다가 보고 싶다 하여 외조부의 도움으로 바다를 보았고
    (당시 여자는 집밖으로 나가면 절대로 안 되었슴.)
    2. 그 여자는 함께 성장하자고, 갓 결혼한 새댁이 남편을 타지로 보내 공부하게 만들고
    (이원수는 사임당만한 그릇이 못 되었슴.)
    3. 칠거지악에 대해, 삼불거를 만들어 여자의 권익을 보호했고
    4. 바른 판단으로 잘못된 권력에 눈치보는 남편을 권해
    나중에 연루되지 않도록 하였다.

    얼마나 현명하고 뛰어난 여자인데,
    나는 여학교에 있는 사임당의 동상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항상 의심스러웠다.

    대한민국 여학생들 파이팅!!!

  5. dd 2008/05/28 15:38

    안녕하세요~

    글잘읽었습니다,...그런데 이팔청춘은 28살이 아니고요. 두개 곱해서 16살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춘향전같은 곳에서도 보면 주인공이 이팔청춘이네 뭐네~하고 나오지요.

    어린 소녀들로 나오는데 16살이 맞는것 같습니다,

  6. dd 2008/05/28 15:38

    안녕하세요~

    글잘읽었습니다,...그런데 이팔청춘은 28살이 아니고요. 두개 곱해서 16살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춘향전같은 곳에서도 보면 주인공이 이팔청춘이네 뭐네~하고 나오지요.

    어린 소녀들로 나오는데 16살이 맞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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