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들의 감옥에서 탈주하라!
—10편의 영화로 보는 탈주의 철학,『이진경의 필로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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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필로시네마』-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인문, 서양철학, 미학/예술철학
출간일 : 2008년 5월 30일 | ISBN(13) : 9788976823120
양장본 | 신국판 변형(210×150mm)
철학자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직업, 가족, 연인, 도시 등,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를 억압하는 요소들일 수 있다는 점을 본다. 우리의 평균적인 일상은 우리에게 정해진 길로만 갈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영화에서 우리의 자신의 모습을 봄으로써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낯설게 다가오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철학의 시선은 영화를 통해 일상 밖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각 장마다 새로 삽입된 영화의 스틸 컷들은 본문과 긴장하면서 영화와 철학이 텍스트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지은이 소개

지은이_이진경 |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근대적 주체의 생산과 관련하여」라는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공부하는 이들의 ‘코뮨’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자본주의의 외부를 사유하고 실험하고 실행하고 있으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산업대 교양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은이의 말_책 속에서
이 책의 제목‘필로시네마’philocinema는 영화와의 이 우정을 표시하기 위해 내가 새로 만든 말이다. 짐작하겠지만 이 말은 ‘철학’을 뜻하는 그리스어‘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변형시켜 만든 말이다. 필로소피아란 알다시피‘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데,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를 시네마cinema로 바꾸고, ‘우정’이나‘사랑’를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붙여서 ‘필로시네마’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사랑/우정’쯤의 의미를 갖는 말인데, 동시에 철학을 뜻하는 말과의 유사성을 통해 영화와 철학의 우정을 표시하기에도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서 나는 영화를 철학과 만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나 서로를 벗 삼게 하고 싶었다. 그런 방식으로 영화에서 철학의 친구를 발견하고자 했지만, 또한 그 이상으로 철학에서 영화의 친구를 발견하고자 했다.



∎ 목차

블레이드 러너
복제인간과 안티-오이디푸스
머리말  12│“인간이란 무엇인가?”  14│표상의 외부  19│안티-오이디푸스, 혹은 ‘신의 죽음’  30│“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8│탈주-탈주  50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욕망은 어떻게 혁명과 조우하는가?
식당 앞에서  54│식당의 구조  57│욕망의 ‘주체’들  69│욕망과 죽음  86│욕망의 정치학  98

핑크플로이드의 더월
<벽>, 혹은 탈주의 철학
개요  104│광기와 TV 사이  106│벽 속의 벽돌, 혹은 사회적 상처  109│분열증과 탈주  117│“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123│심판  128│벽 밖으로?  131

모던타임스
자본주의와 유쾌한 분열자
‘모던 타임스’, 근대 혹은 근대적 시간  136│대공황과 <모던타임스>  137│<모던타임스>, 모던타임스  141│컨베이어 벨트와 근대인  148│근대적 공간과 유쾌한 분열자  154│근대적 시간과 ‘모던 타임스’  158│욕망의 유토피아  162│사랑과 욕망  169│분열자와 정신병  173

와호장룡
“강호의 공간적 특성에 관한 고찰”
화보  180│강호의 공간적 특성에 관한 고찰  198

동사서독
그 멈춘 기억의 장소를 통과하는 인연의 선들에 관하여
사막과 산 사이의 공간 216│인연의 연쇄 219│기억과 신경증 225│머묾과 떠남 232│고유한 표현의 요소들  236

허공에의 질주
잠행의 시간, 잠행자의 공간
세 가지 선과 잠행  248│잠행-기계  253│잠행자의 징표  258│잠행과 가족  261│잠행의 시간성  266│잠행의 공간  271

풀 몬티
자본주의와 남근중심주의의 옷을 벗기다
시선과 그 외부  276│노동과 거세  277│가족주의와 거세  282│신체의 연대  286│신체와 시선  294

길버트 그레이프
가족의 근대적 평면과 유목적 자유의 공간
가족영화 혹은 반-가족적인 영화  306│근대가족의 탄생  308│가족 안의 근대세계  311│욕망의 정착적 평면  329│유목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공간  339

토탈리콜
괴델적인 세계에서 주체의 동일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주체와 동일성  350│욕망과 계급투쟁  367│현실과 모사가 뒤섞인 세계  377│욕망과 동일성과 모상  394




∎책 소개

익숙한 것들의 감옥에서 탈주하라!
10편의 영화로 보는 탈주의 철학,『이진경의 필로시네마』



‘사람’이 아닌 친구를 상상해 보자. 어떤 이에게는 음악이, 어떤 이에게는 그림 또는 사진이 그런 친구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친구는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존재이고, 그러한 자극을 통해 변화를 촉발하는 존재이다. 이 책 『이진경의 필로시네마』는 ‘영화’와 ‘철학’이 만나 서로를 자극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 우정의 기록이다. ‘새로운 의미’는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영화들이 철학자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낯설어질 때 생겨난다. 이 낯섦은 결코 멀어짐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의 문제들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를 삶과 더욱 가깝게 만드는 낯섦이다.

영화를 만난 철학,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일상을 익숙한 것들 속에서 보낸다. 그것들은 단지 물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 습관과 규칙, 사고방식 등 우리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우리 삶과 친해지는 방법일까?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익숙함 속에서 삶을 제약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허공에의 질주」에 등장하는 아버지 아서는 반정부활동을 벌인 급진적인 운동가였다. 기존 권력을 거부했던 운동가답게 그는 아들에게 “권위에 도전하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은 아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엔 참지 못한다. 이렇게 익숙해져 버린 습속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습속은 삶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탈주’는 바로 그러한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세번째 『필로시네마』―풍부한 이미지, 지속되는 ‘탈주’의 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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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오른쪽 : 2002년 소명판, 왼쪽 : 1995년 새길판
1995년 판에 없었던 <동사서독>과 <와호장룡>에 대한 글이 2002년 판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와호장룡> 화보와 <허공에의 질주>에 관한 글 한편이 추가되었다.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새길, 1995), 『필로시네마 혹은 영화의 친구들』(소명출판, 2002),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그린비, 2008), 이 세 권의 책은 같은 책이면서도 다른 책이다. 무엇이 그 ‘다름’을 만들어 내는가?


▶ “탈주란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탈주하는가?”로 바뀐 질문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누구나 ‘탈주’에 관해 말하던 때가 있었지만, 정작 ‘탈주’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부정적인 경우로 받아들여진 ‘탈주’는 ‘도망’을 비난하는 데 쓰였고, 긍정적으로 말할 때조차 그것은 ‘도망’의 면죄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난하는 무리에도, 스스로를 면죄하는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탈주는 무엇인가?” 그렇게 누구나 ‘탈주’를 말하는 동안에, ‘탈주’는 소외되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탈주는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탈주인가?”로 말이다. 그러한 질문의 전환 속에서 우리는 ‘탈주’를 말하는 대신에 실제로 ‘탈주’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소외되어 있었던 탈주를 다시 묻는다.

1995년 초판이 나올 당시부터 이 책은 ‘탈주의 방법’에 관해 말하고 있었고, 그러한 문제의식은 2008년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2008년 지금 우리의 주변을 보자.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처럼 우리는 온갖 첨단기기로 무장하고서 모든 곳을 자신의 작업장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이동과 이전은 지배적 가치를 확장하지, 전복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을 ‘탈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탈주’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탈주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 많아진 만큼 이제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탈주는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어디에서 탈주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가령 영화 「풀 몬티」에서 주인공들은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지만 기존 삶의 방식으로부터 ‘탈주’하기 시작한다. 일자리를 잃은 주인공들은, 자본이 떠나고 황량해진 마을만큼 점점 희망을 잃어 간다. 하지만 그들은 직장을 제공하는 자본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탈주’를 감행한다. 그들은 직업이라고 하기조차 힘든 남성 스트립쇼에 도전해 버린 것이다.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라서고 그들이 걸치고 있던 옷이 벗겨지는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지배적인 척도들, 익숙해진 척도들은 내던져진 옷과  함께 나가떨어진다. 지배적 척도들이란 직장을 가진 남자만이 남자구실을 한다는 척도이며 그것은 남성주의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심어 놓은 자격지심이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과 함께 그러한 척도들을 벗어던지자, 마을 사람들을 휘감고 있던 황량함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스트립쇼가 벌어지는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내뿜는 활기에 전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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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몬티>중에서, “리듬, 복수의 신체를 하나로 만드는 끈(band)"


그들은 일터의 익숙함을 포기함으로써 행복하게 살 용기를 얻는다. 이제 그들은 어디로도 떠나지 않았지만, 떠날 수 있는 모든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탈주는 커다란 절망 속에서 작아질 대로 작아진 기쁨을 확장하는 ‘생성’이요, 타인과의 경쟁을 강요하고 삶의 즐거운 순간들을 미래를 위해 저당잡히라고 요구하는 지배적인 척도들에 대한 ‘전복’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 영화의 스틸 컷과 철학적 텍스트의 만남
이미지와 소리가 영화의 이야기를 엮어 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언어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이미지들을 보여 주기도 한다. 반대로 철학은 언어를 통해 사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이미지가 표현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심층을 파고든다. 책 속에서 영화의 스틸 컷과 철학적 텍스트는 이렇게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고, 서로 대결하기도 하면서 책의 리듬을 만들어 간다.

영화의 스틸 컷과 본문의 관계는 각자가 서로에게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보완적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연결되는 동시에 이미지들과도 연결되고, 텍스트 역시 다른 텍스트들과 엄밀한 관계들을 형성하는 동시에 스틸 컷들과 관계하면서 고유한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령, 1995년 판에는 글 자체가 없었고, 2002년 판에는 스틸 컷조차 없이 실렸던 「와호장룡」 부분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저자가 직접 선별하여 구성한 영화의 스틸 컷들은 주인공들의 능력에 따라 확장되는 ‘강호’의 공간들을 보여 줌으로써, 현실의 우리가 ‘탈주’를 감행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즉, ‘탈주’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는 만큼, 즉 자신의 삶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만큼 빠르고, 멀리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 그러한 ‘탈주’의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이미지가 말하는 그러한 방식은 텍스트로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적 묘사가 그러하듯이 텍스트로 환원된 이미지는 본래의 인상을 완벽하게 적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텍스트는 그러한 이미지가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이미지의 심층에 관해 말한다. 즉, 논리적 논증을 통해 이미지가 준 장면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강호와 대비되는 도시의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는지, 그러한 통제 속에서 다른 차원(강호의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는 지점들은 어디에 있는지를 읽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과 어떻게 포개지는지 섬세하게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스틸 컷들과 텍스트들은 서로에게 단순한 보조 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의미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첫번째, 두번째 『필로시네마』와 구분되는 새로운 『필로시네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삶을 표현하는 영화에서 길어 낸 철학의 현실성

철학은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도 어렵다. 그렇다고 그러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쉬운 말로 바꾸는 순간 철학의 화살은 본래 의도했던 문제를 적중시키지 못하고 빗나가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은 현실의 사건들을 개념적으로 정제하여 현실이 가능한 지반을 밝혀내거나, 지금 이후의 세계를 구축한다.

반대로 영화는 그것이 공상과학물일 때조차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현실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는 철학처럼 현실을 정제하여 명료한 개념으로 제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인상만 남고 근거는 빈약해진다.


철학은 영화의 현실인접성을, 영화는 철학의 엄밀성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철학자과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철학자는 자신이 가진 철학적 개념들에 현실적 영향력을 불어넣고 싶어 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화의 이야기는 철학의 용법을 시험하고, 개념이 현실과 어떻게 접합되는지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반대로 영화감독의 경우,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자신이 만들고 있는 영화가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주장의 엄밀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철학자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자, 영화감독이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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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그레이프> 중에서 “거긴 아빠가 있었어”


「길버트 그레이프」의 예를 통해 철학과 영화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길버트에게 가족의 무게는 그의 삶을 짓누르는 무게가 된다. 아버지가 죽은 후 집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뭍에 올라온 고래”처럼 육중한 체구를 지녔고 동생은 틈만 나면 가스 탱크 탑에 올라가는 정신지체아다. 우리의 삶은 영화 속의 길버트와 똑같지 않다. 하지만 가족의 무게에 눌려 정작 ‘자신’에 관해서는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길버트에게 공감한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의 삶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것과 공명하는 삶의 특정한 코드를 현실감 있게 보여 준다. 철학자의 시선은 그러한 영화의 장면들에서 가족 안에서 모든 재생산의 문제를 책임지길 강요하는 근대적 가족주의가 가진 억압을 읽어 낸다. 즉 영화의 주장을 개념화하여 보편적으로 설득력 있게 정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철학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 왔던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영화와 철학을 통해 삶을 낯설게 볼 수 있게 된다.

멀어진 삶을 다시 불러오는 ‘탈주’


우리는 이전까지 「길버트 그레이프」를 단지 감동적인 가족영화로만 보아 왔고, 「풀 몬티」를 가벼운 코미디로 보아 왔다. 하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아 온 영화들은 철학자의 시선과 만나면서 낯설어진다. 철학은 이렇게 익숙한 영화를 낯설게 만들고, 그것은 우리의 삶마저도 낯설게 만든다. 영화의 잠재성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철학이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낯설게 만든다는 역설 속에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또한 그러한 질문을 통해 멀어진 ‘현실’을 가까이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먼 것을 가까이 불러옴으로써 우리는 그것과 더욱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탈주’는 삶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진 삶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며, 이미 익숙해져서 무엇이 문제인지도 잊어버린 일상을 다시 낯설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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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11:31 2008/06/0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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