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자가 촛불집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6월 19일까지)의 상황을 담론적으로 구성한 글 입니다. 거친 메모 형식의 글이라는 점, 진행 중인 상황 속에 있는 글이라는 점에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블로그 포스트로 쓰기에 분량이 좀 길어서 연재 방식으로 올릴까 고민하기도 하였지만, 연재로 올릴 경우 원문의 호흡이 지나치게 끊어지는 감이 있어 그대로 올립니다. 꼭, 끝까지 읽어주세요!

추방된 자들의 귀환 - 2008년의 촛불시위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1. 어두운 전조

"처음엔 몇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온통 까맣게 되었다."(카네티, 『대중과 권력』)
대중이란 그런 것이다. 2008년 4월만 하더라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5~6월에 그토록 까맣게 되리라고. 모두가 이 사태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 100일에 그런 일이 예정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태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벤야민의 표현처럼 “매초 매초가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문”이기 때문이다(벤야민, 「역사철학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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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과 '강부자' 청와대 수석들>

결국 문제는 전조이다. 언제 번개가 칠 것인지 확정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모두가 산등성이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와 미래 사이를 떠도는 먹구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조금씩 방전이 일어나고 있는 먹구름들, ‘번개를 낳을 구름들’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쌓이고 또 쌓였다. ‘고소영’, ‘강부자’, ‘S라인’ 등으로 희화화된 초대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야기한 ‘영어몰입교육’, ‘우열반 편성’, ‘소위 0교시 문제’,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비즈니스 프랜들리’와 각종 규제 완화, 법질서에 대한 강조. 공기업 민영화(전기, 가스, 수도, 의료보험 등), 국토 전체를 가르는 대운하, 그리고 마침내 미국산 쇠고기 협상 처리.

어두운 전조. 신정부의 새로운 조치들은 대중의 ‘불안’을 ‘더 크게’ 증폭시켰다. ‘더 크게’라는 말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불안’은 이전 정부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이명박 정부를 낳았다. 집권자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이명박 정부를 낳은 것은 그들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바로 대중들의 ‘불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십여 년 동안 대중들은 극도의 삶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은 삶의 안정된 구조가 해체된 사태, 아예 하나의 ‘구조’로 자리잡은 영속적 ‘재구조화(리스트럭처링, restructuring)’, 일상이 된 예외적 시간 등이 낳은 정서였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내부’에 있지만 ‘보호’받을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감정, 우리 사회 안에 있지만 지구적 시장의 폭력이 곧바로 타격을 가한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울타리가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것인지, 저 정부가 과연 우리의 정부인지 의심스러운 사태. 대중들은 거기서 어떤 ‘상실감’을 느낀다.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소득의 상실, 고용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삶의 안전보장 상실’이 있다. 현 집권자들은 지난 십 년을 ‘잃어버린 십 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 보여 주듯 상실의 의미는 그들과 대중들에게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집권자들이 지난 십 년 간 무엇을 잃어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재집권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어떤가. 그들은 여전히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어떤 힘에 삶이 내맡겨져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대중들은 자기 삶을 좌우하는 모든 결정들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으며 그것이 도무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것이 불안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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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안단테'가 다음 아고라에 올린 탄핵 청원>

이 먹구름들이 얼마나 농밀해졌던가.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도 전체가 요동칠 수 있다는 조짐들. 사실 아주 강력한 신호가 4월 6일에 포착되었다. ‘안단테’라는 아이디를 쓴 한 고등학생이 한 인터넷 사이트가 마련한 ‘국민청원’란에 ‘대통령’ 탄핵 청원을 올렸다. 사실 온갖 ‘안티’ 카페들이 만들어지고 온갖 청원들이 난무하는 세태를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장난’이었을지 모른다. 서명 목표를 천만 명으로 잡은 것도 그 탄핵청원의 어떤 비현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탄핵 청원에 동의한 인터넷 서명자는 가볍게 백만 명을 넘어버렸다. 서명자 수가 매일 십만 명 단위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누구나 느꼈다. 집권자들을 제외하고는.

먹구름이 가득하다면 아주 사소한 사건도 방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작은 방전은 무시무시한 번개로 발전한다. 그 작은 방전을 일으킨 것이 ‘쇠고기 협상 타결’이었다. 그 타결 소식을 듣고 부시를 만나러 가던 이명박은 환호성을 질렀다는 어떤 전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방전을 일으켰다. 이런 전조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쇠고기 협상’에 대해 “이전 정부가 벌여놓은 일을 설거지 했을 뿐”이라는 말이나, “광우병 위험이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정부의 말이 이 정도의 반발을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지난 정부에서도 ‘쇠고기 협상’은 ‘스크린쿼터 축소’ ‘의약가 조정’ 문제’, ‘자동차배기가스 규제 기준’ 문제 등과 함께 ‘한미자유무역협정’ 추진을 위한 소위 ‘4대 선결과제’ 중 하나이긴 했다. 현 정부의 말마따나 광우병 위험도 다소간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집권 세력은 그들 자신이 모아 놓은 먹구름, 그 어두운 전조의 형성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4월 30일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문제를 거론했을 때의 파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방송 프로그램의 농간에 놀아난 무지한 대중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위 진보 진영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태인은 경향신문이 주최한 시국토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느낀 놀라움을 이렇게 전했다.

“지난 5월 2일 청계광장에 나갔을 때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500회 정도 기고·강연을 하면서 그때마다 광우병 얘기를 했는데도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았는데 단숨에 여중생에 의해 돌파된 게 놀라웠다. ... 그 다음 발전 과정은 더 놀라운데, 대운하, 민영화, KBS 지키기까지 의제가 확장됐다.”(경향신문, 2008/6/18)

정말 왜 그랬을까. 광우병 위험을 그가 그토록 떠들 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는데, 지금 이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낯선 게 아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가 일으킨 사고로 ‘미선’, ‘효순’ 두 중학생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건은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미국을 규탄하던 시위대는 응원 군중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월드컵이 그 사건을 삼켜버렸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나고 그 사건은 다시 조명을 받았고 대규모 촛불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대책위 관계자가 정태인과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그토록 싸울 때는 돌아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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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오른쪽 2002년 미선, 효순 추모 촛불집회>

대중이란, 메시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것을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것은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매초 매초가 그것에 열려있다.  


2. 광장으로 난입한 대중, 그들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그들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몇몇이었다가 갑자기 새까맣게 몰려든 이들. 그들 낱낱을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를 알 수 없다. 그들은 한편으로 학생이고, 주부이고, 노동자이며, 실직자고, 노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이름과 직업을 밝힐 때조차 익명의 대중으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가능한 물음일 뿐 아니라 꼭 필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중이라는 흐름에서 특이점에 대한 물음일 때 의미를 갖는다. 특이점과 보통점을 구별하는 것. 이것이 관건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 중 다수는 누구였는가?’라는 물음은 그다지 좋은 물음이 아니다. 단순히 수가 많다는 것 때문에 대중이 그 집합의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번 시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집단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탄핵 발의를 했던 ‘안단테’, 그리고 초기 시위를 특징지었던 (여)중고생들, 그리고 일명 ‘유모차 부대’의 주부들. 형식적 의미에서든, 실질적 의미에서든 이들은 기존의 정치적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다.(하승우는 경향신문 시국토론에서 “여성과 청소년이 주체로 나서 ‘시민-되기’를 체험했다”고 지적했는데 의미있는 지적이다.) 문제는 이들이 쇠고기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이지만, 또한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청소년들이나 유모차부대, 그들은 광우병 쇠고기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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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이 넘도록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

이것은 또한 익숙한 풍경이다. 작년 가을 ‘비정규직 보호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노사정위원회의 파행 사건의 본질이 그것이었다. 회의장에 난입해서 회의를 파행시켰던 기륭전자, 코스콤, 이랜드 노동자들의 외침은 하나였다. 왜 비정규직의 보호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 정작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는 참여하지 못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의장에 난입했던 사건, 그것은 결정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의 ‘권리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사실 ‘소수자’ 일반의 것이기도 하다. 소수성은 장 자체의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즉 소수적 투쟁은 장 안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아니라, 그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는 장 자체에 대해서 벌이는 투쟁이다. 그것은 그 장을 규정하는 척도의 배제적 성격과 관련이 된다. 그래서 소수자들의 정치적 투쟁은 척도나 논리 자체의 정치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근거나 대의조직을 갖추지 못한 채, 근거나 대의기구 자체를 문제 삼을 때, 이들은 투쟁은 근거가 없고 기구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직접행동, 즉 난입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매개 없는 대규모 진입’의 형태를 띤다. 이와 관련해서 하승창은 <한겨레>의 좌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민단체가 매개되지 않은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사실상 기존의 시민단체의 역할과 지위가 끝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한겨레, 2008/6/12)

문제는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양극화’가 의미하는 바가 ‘대중의 소수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데모크라시는 최근 들어 부쩍 ‘데모스를 추방하는 데모크라시’ 형태를 띠고 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추진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지만, 대중들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사안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정부의 테크노크라트와 의회의 의원들, 주류 언론들, 그들이 어떤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배제의 정치를 작동시킨다. 즉 ‘합의로부터의 배제’, ‘합의를 통한 배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수 대중들은 추방된 자, 배제된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범위의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수의 대중들은 그런 점에서 소수성을 품고 있었다.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소수자들의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많은 이들이 품고 있던 소수성이 들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대중들의 매개 없는 난입! 그것이 이 사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3. 미디어: ‘im-media-tion’과 ‘onoff-line’

 
‘매개가 없다’, ‘매개되지 않는다’는 말이 가장 강력하게 부각된 것은 ‘미디어’ 영역이었다. ‘미디어’는 단순한 ‘미디에이션’, 즉 ‘매개작용’을 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임시로 하나의 조어를 하자면 미디어는 ‘미디에이션’에서 ‘이미디에이션(im-mediation)’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매개에서 어떤 직접 행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시위에서 드러난 몇몇 행동 속에서 미디어는 ‘미디어 액션’이었고, 그런 점에서 ‘행동-미디어(action-media)’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민경배는 이번 시위에서 디지털 매체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시위 참가자 유형을 참가자, 기록자, 분석자, 전파자 등으로 나누었는데, 그 분류를 따라가면서 이번 시위에서 미디어의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민경배, “X마스 트리처럼 점멸하는 민주주의”, 시사인, 2008/6/14).

1) 참가자. 거리에서 행진을 직접 벌이는 자.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걷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현장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다른 참가자와 소통하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지 않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상황을 전하고 참가를 독려한다. (이 점에서 그가 전송하는 문자메시지나 영상메시지는 상황의 전달이 아니라 촉발이라고 할 수 있다.)

2) 기록자. 시위의 주변부에 포진해서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노트북을 활용해서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이들. 시위의 생중계. 경찰의 채증에 대한 역채증(여기서 어떤 시선이 역전이 일어난다. 특히 경찰이 세종로에 설치한 CCTV 영상은 시위 상황을 생중계하는 중요한 화면이기도 했다). 특히 시위를 생중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뉴스 화면 등을 통해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시위의 생중계는 시위를 특정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네트워크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생중계를 보던 이들이 다시 시위 현장으로 뛰어드는 일이, 이 생중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 외 3) 분석자. 기록자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과 동영상을 판독해서 경찰 폭력을 고발하고, 집회에 참가할 때 필요한 준비물이나 숙지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해서 올리는 사람들이다. 또 위성사진 등을 통해 시위대에게, 시위대와 경찰의 이동경로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4) 전파자. 블로그와 게시판을 통해 집회 참가 후기도 올리고 정부와 경찰의 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거나 퍼 나르는 사람들. 온라인 상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소위 ‘빅마우스’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네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가 기록자가 되고, 다시 집에 와서는 분석자나 전파자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건은 ‘켜짐’과 ‘꺼짐’, ‘사이버 스페이스’와 ‘리얼 스페이스’의 연결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불가능한 조어, ‘onoff-line’라는 말로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월 10일, 우리에게 화제가 되었던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집회의 사회를 본 이가 온라인 상의 대중들에게, ‘청와대 홈페이지를 다운시키라’는 하나의 지침을 전달했다. 이것은 시위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온 라인’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1~2분 사이에 청와대 홈페이지는 다운되었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난 그 사실은 곧바로 리얼 스페이스로 전달되었다. 종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는 바이러스처럼, 서로 소통 불가능한 이질적 장을 뛰어넘은 ‘미디어’. 나는 미디어의 그런 작용이 또한 ‘이미디에이션(im-media-tion)’의 특징이라 부르고자 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던져진, 그리고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마디이다. 그것은 일종의 ‘중간’이다. 그러나 두 개체가 존재하고 그 사이에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는 차라리 하나의 리좀처럼 자라나는 줄기 토막이다. 그것은 하나의 장 안에서, 지배적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표상하거나 매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장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그 장들을 소통시킨다. 소통하는 것과 소통되는 것의 구별이 사라진 것. 말하는 자와 전달하는 자의 구별이 사라진 것.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구별이 사라진 것. 그것이 ‘이미디에이션’의 특징이다.


4. 혁명의 혁명 -바리케이트는 누가 쳤는가


매개의 실종은 대표의 실종과 통한다. 저녁에 시작된 시위가 이른 아침에야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찰이 느끼는 어떤 난감함과도 관련이 있다. 시위대에는 협상을 해 줄만한 소위 ‘대표자’들이 없다. ‘광우병 국민 대책위원회’라는 것이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들이 어떤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초기에 있었던 소위 ‘다함께 논쟁’은 운동 조직의 ‘의식적 지도’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 혹은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순간적인 지도자나 전위는 있었다. 사소하게는 대중들의 행진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그럴듯한 의견을 표할 때 그 대중의 흐름은 그들의 의견에 맞추어 경로를 택했다. 6월 초 어느 날 저녁, 내 기억에 따르면, 앞에서 대중들의 행진을 이끌던 이들이 종로와 세종로의 교차지점에 설치한 경찰의 벽에 막히자, 종로에 앉아 집회를 진행하려고 했을 때, 뒤쪽 대중들은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로구청 뒷길을 통해 청와대쪽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그들을 따랐다. 그리고 경복궁 근처에서 경찰 벽과 부딪히자 일부는 대학로로 진출하려고 했다. 최근 경찰청장이 어떤 자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찰이 이런 시위 전개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는지를 알 수 있다. (cf. 꼭 시위행진에만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탄핵발의를 했던 고등학생, 최초로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 아고라에서 중요한 의견을 내고 있는 이들, 모두가 대중들에게 하나의 출구를 제시하는 ‘일시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내 생각에, 바리케이트의 존재가 이번 시위처럼 무시되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벌인 것은 경찰과 청와대였다(소위 명박산성). 누가 바리케이트를 쳤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누가 공격적이고 누가 수세적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리케이트가 프랑스 혁명 이후,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봉기와 혁명의 기본 모델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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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응로 作 「군상」
"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것은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매초 매초가 그것에 열려있다."


언젠가 엥겔스는 ‘과거 혁명이 새로운 혁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위 혁명을 혁명하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중 ‘혁명’ 부분 참조). 그때 그는 분명하게 바리케이트 모델이 가진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었다. 집권자들의 진보한 공격(무력과 이데올로기)에 바리케이트는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바리케이트가 대표 문제를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바리케이트는 항상 대표들을 낳고 그들에 의한 지도 문제를 낳으며, 대표들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항상 정부와 타협하고 대중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서 그는 바리케이트 모델을 버리고 좀 더 공격적인 어떤 혁명의 모델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로마 시대의 전복당, 즉 ‘기독교’의 포교 방식을 자기 글의 말미에 시사적으로 덧붙였다. 기독교는 적군과 싸우기 전에 적군을 먼저 기독교도로 만들었던 것이다. 엥겔스의 글을 참고하면 지금 등장한 소통과 전염의 각종 무기들, 그 작고 깜찍한 전자 장비들은 총칼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소위 ‘명박산성’은 소통이 아닌, 고립과 구획, 통제의 장치이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몰락하고 있는 미국이 글로벌 시대에 멕시코와의 국경에 설치한 하이테크 장벽과 닮은 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주요 국가들에서 설치하고 있는 안전 장벽들(범죄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설치된 도시 보호 장벽들)과도 닮았다. 바이러스나 테러리스트, 더 나아가 통치자들에게 반대하는 대중의 저항적 흐름을 막는 장벽들의 설치.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강력한 표정과 대비되는 나약한 방어자세.


5. 벽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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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광화문에 설치된 '벽'>

그러나 6월 19일 현재 최근 촛불 시위에서 벽은 ‘벽’으로서 다시 의미를 얻고 있다. 온갖 희화화의 대상이었던 장벽, 대중들에게 ‘문화유산’ 취급을 받으며 온갖 조롱의 대상이었던 장벽이, 최근 ‘벽’으로서 다시 의미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벽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가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중 올바른 답이 무엇이냐가 아니다. 문제는 ‘물음’ 자체에 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해졌는가.

한편에는 벽을 넘어서면 오랫동안 구축한 명분(평화시위를 포함해서)이 깨지며 지나치게 정치화된다는 주장, 더 나아가 현 정부를 물러나게 한 뒤 대안이 없다는 주장 등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벽에 가로막혀 40여일을 길거리에서 행진만 하면서 느끼는 무력감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넘어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첨예하게 되면서, 벽은 ‘벽’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느 쪽 주장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한 ‘벽’으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결과적으로 벽에 갇혀가고 있다. 어느 선까지 운동을 끌고 가야 하는가. 저 벽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분자적 대중의 흐름에 하나의 거대한 몰적 선분이 등장하고 있는 국면이다. 모두의 마음 속에 하나의 벽이 등장하고 있다. 모두에게 하나의 창의적 돌파구, 하나의 창의적 물음이 절실한 상황이다.

다만 상황이 절박하다고 지나치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진실된 눈으로 정직하게 싸운 자들에게 승리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고 기쁨은 생각보다도 크다. 만에 하나 그의 투쟁이 어느 선에서 멈춰지더라도 그는 누구도 과거로 돌릴 수 없는 새로운 땅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군의 속도가 늦춰지고 어떤 벽이 예감될 때, 당황하거나 어떤 무력감에 빠져든다면 그는 생각보다 더 빨리 패배할 것이고, 그 슬픔은 그동안 그가 얻은 모든 기쁨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남길 것이다. 스피노자가 일러 주었듯이, 후회하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항상 두 배로 잃게 된다. 마음의 여유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여전히 혹은 끝까지 이 투쟁을 즐겨야 한다.

나는 한때 친구들이 청와대로 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에 반대했다. 도대체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많은 대중들을 대통령이 만나 주지도 않을 것이고, 만나 준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권력이 물건처럼 청와대 어느 곳에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고.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만, 설령 들어간다 한들 어쩌겠는가. 오히려 잠깐의 환희 뒤에 찾 아오는 그 허무함을 견딜 수 있을까. 그 볼품 없는 건물과 잠시 가지를 흔들 뿐인 소나무. 그 ‘아무 것도 없음’에 돌연 두려움이 생기지는 않을까. 권력의 상상된 장소에 뛰어든 현실적 행위가 오히려 어떤 두려움, 가령 나라가 결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고, 다시 그것이 거대한 보수 반동의 흐름을 낳지는 않을까.

그러나 이 모든 걱정과 우려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것은 유머를 모르는 사람들의 기우가 아닐까. 벽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 넘을까 말까에 너무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그 진지한 사람들에게나 그 허무함이 공포로 변할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은 아무 일도 아님을 알고 있다면, 종로의 길바닥이든, 시청 앞 광장이든, 설령 그것이 청와대 앞마당이든,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진은영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대한 지젝의 해설에 참으로 적절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코뮨주의 선언』). 지젝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말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객관적 믿음의 질서를 파국으로 몰아 넣었다고 우려했다. 결코 말해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불쑥 말해 버린 것. 그러나 동화에 따르면 아이의 말은 파국을 낳지 않았다. 임금님은 위선적 행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대중들은 웃고 떠들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_ 이미지 출처 "오드리" 블로그(바로가기)

과장된 공포, 과장된 두려움, 과장된 우려는 ‘미래의 진실된 유토피아’에 대한 과장된 희망만큼이나 우리 안에 두꺼운 벽을 쌓는다. 소강상태에 빠진 현 상황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이상한 역사주의 도식을 여기에 투여할 필요도 없다. 다만 진실되게, 하지만 또한 즐겁게 나아갈 뿐이다. 대중들이 그 권위적인 상징들을 앞에서 굴하지 않고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투쟁에, 우리 욕망에 선험적인 금기는 없다. 벽은 넘어도 좋고 넘지 않아도 좋다. 벽 뒤에 진실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들이나, 벽 뒤에 괴물이 있고 그것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 모두 벽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다. 애당초 벽은 없다. 만약 벽이란 게 있다면, 언젠가 우리가 투쟁을 멈추었을 때, 그곳이나 그렇게 불릴 수 있을까. 아직 우리는 우리가 싸우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즐기고 있는 상황 속에 있다.

-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추장)

2008/06/22 23:45 2008/06/2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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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자그니의 생각

    Tracked from zagni's me2DAY 2008/07/10 14:56  삭제

    추방된 자들의 귀환 - 2008년 촛불 시위..고병권의 글. 프린트해두고 읽을 것.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구냥 2008/06/23 15:36

    잘 읽었습니다

    국민과 소통을 한다던 이명박정권의 실체가 명박산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소통 그것은 자신들의 우리안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기에 그 밖에서의 외침에도

    두번의 담화에 반영이 안됄정도니.. 그리고 이제 벽을 넘어서 어느정도의 실력행사를 해야할때라고 봅니다

    우리가 벽앞에서 우물쭈물대는 동안 이미 탄앞은 거세게 시작되었습니다

    • 그린비 2008/06/23 15:54

      구냥님 안녕하세요.
      일단 우리가 '벽'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벽'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는 그저 자유로운 줄 알았던 '환상'이 가시화된 벽(명박산성)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고, 우리는 이제 진짜 '자유로움'에 관해 사고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하구요, 앞으로도 종종 들러주세요! ^^

  2. 까막새 2008/06/23 15:41

    우리는 오랫동안 학습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대한 거부로 일어나는 소위 '혼란'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밖의 적들에게 쳐들어 올 기회를 준다는 논리였지요. 지금의 극렬우익행동주의자들도 그런 학습에서 자유롭지 못 하여 '구국'이라는 가치에 이끌려 지금의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이기에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물들지 않았기에 '잘못되었다!'고 외칠 수 있었겠지요. 그 아이들의 외침은 우리 속에 숨어 있던 두려움과 게으름, 부끄러움을 깨뜨린 것일 거고요. 아마도, 나랏님이나 나으리들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의 약함이 아니라 깨어나는 다수의 의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 깨어남의 단초는 자신들이 스스로 던져주었으면서도 말입니다. 배후죠.

    • 그린비 2008/06/23 15:57

      까막새님 안녕하세요!
      달아주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구냥님 댓글에 달았던 내용하고 거의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벽'을 '벽'이라고 말하고 비웃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본 것을 '배후'에 의해 본 것이라고 말하는 저들의 이야기가 황당하게 되어버린 것이구요.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주세요!

  3. 그린비 2008/06/23 15:58

    운영자 공지!
    댓글에 달리고 있는 댓글은 저자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4. 지키자 2008/06/23 16:46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진정 직접민주주의 이자 무식한 포퓰리즘인가

    • 그린비 2008/06/23 19:42

      예! 저희들이 원하는거 그거 맞습니다. ^^

  5. 명박산성 2008/06/23 16:49

    명박산성이 쌓아 올려진 순간.. 소통이 불가능 하다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 그린비 2008/06/23 19:44

      저는 그들과의 소통단절이 우리들의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 고맙기도(농담입니다) 합니다. ^^

  6. 카뮈 2008/06/23 17:15

    한마디로 이기주의죠 처음에는 지들일이 아니니까 생까고 살았었는데 자기네들 식탁에 오른다고 생각하니까 거리로 나온거죠 한마디로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애들이 냄비주의 근성과 만나 촛불집회에 일어난 것이죠, 저는 이명박과 보수골통들의 정권이 싫어 촛불집회를 지지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따지자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죠,

    • 그린비 2008/06/23 19:46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뭐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에 발끈하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발끈함을 위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표현한 것이 정말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7. nijinsky 2008/06/23 17:53

    평소 수유+너머에 관심이 있던 터에 재빨리 클릭했는데 글 정말 좋네요!! 이런 글은 아무리 길어도 좋습니다ㅎㅎ 우리 스스로 벽에 갇혀 가고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청와대 가서 정말로 이명박을 끌어내릴 것이 아니면 사실 청와대 가는게 별 의미가 없죠.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늘 되풀이되는 집회 패턴에 매너리즘에 빠지고 무기력증을 느끼는 것이 걱정입니다. 전경버스를 끌어내고 시민산성을 쌓는 건 일종의 액션이라고 봅니다. 이제 또다른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단계 더 올라가야 할 시점인데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말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물리적인 벽이 아닌 심리적인 벽은 많이 넘은 것 같아요. 집회와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이 바뀌었고 공권력이나 국가제도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게 됐고요. 이번 기회에 저는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뼈저리게 느끼는 참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

    • 그린비 2008/06/23 19:48

      니진스키님 반갑습니다! 글 올릴 때 길다는 이유로 외면 받는 포스트가 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니진스키님 같은 분 때문에 많이 읽히는 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드리구요, 종종 방문해서 여러 이야기들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

  8. Mr조군 2008/06/23 19:29

    글 잘읽었습니다. 현시국에 답답한 모습을 정말 잘 풀어내셨어요...읽으면서 감탄..ㅇ,.ㅇ;; 확실히 우리는 이순간 이미 승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에겐 촛불시위를 즐겁게 노는것만 남은건가요?? ㅎㅎ 다만 부디 빨리 우리 대통령깨서 정신을 차리셨으면 좋겠습니다.. (i _ i ) ;;;

    • 그린비 2008/06/23 19:50

      Mr조군님 안녕하세요.
      저랑 같은 마음으로 읽으셨군요!
      더욱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욱 이기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역시 이명박이 얼른 정신 좀 차리길 기원합니다. ^^

  9. 초섬 2008/06/23 19:34

    와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린비 블로그에 좋은 글들이 정말 많군요. 앞으로 자주 애용을..
    지지 않는 싸움이 중요한 것 같아요. 신나게 즐기고, 싸우고! 그러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죠~
    관리자님 수고하시구요~ ^^

    • 그린비 2008/06/23 19:51

      초섬님 안녕하세요!
      그린비 블로그에는 정말 좋은 글이 많습니다!(아 부끄럽군요 ^^;)
      신나게 즐기고, 싸우고, 마음 껏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길 바랍니다!
      초섬님도 수고하세요!!

  10. kay 2008/06/23 20:09

    우연히 읽게 됐네요. 고병권씨의 글이 복잡했던 생각들을 잘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듯 합니다.
    불과 3년전만 해도 유희와 놀이가 정치를 (탈)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도무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는데... 요즘 상황을 보면 이런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다 좋은데...
    축제는 언제나 비일상의 영역이지 않은가요? 비일상이 일상을 전복시키는 순간 비일상이 일상으로 변화할텐데...
    파티가 끝날 시간이 다가온 것은 아닐까요?
    요즘 느끼는 즐거움이나 해방감도 다시 돌아가야할 일상의 자리로부터의 거리감에 의한 것만 같습니다.

    • 그린비 2008/06/23 20:25

      kay님 안녕하세요!

      전 지금 중요한 것은 '선험적 금기'를 넘어서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축제'라는 비일상적 상황에서 '일상'을 생각하며 조급해 하는 순간, '일상'의 압박은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권력에 맞서 놀았던(?) 그 기억을 잊고 다시금 권력에 포획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일상'이 권력의 힘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한다면,그리고 지금 우리의 행복감이 그와 멀리 떨어진데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멀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11. 쩡이 2008/06/23 20:47

    경기도 수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몇몇의 주부들이 뜻을 모아 촛불에 참여하며
    서글픈 현실도 잊게 하는 축제의 마당에 주말마다 참여합니다.
    억눌려 소리내지 못하는 외침을 마당에 나가 함께 큰목소리로 낼 수 있다는 기쁨.
    거기엔 소용돌이치는 젊음과 내 주권을 찾으려는 열망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 그린비 2008/06/24 14:54

      쩡이님 안녕하세요.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열망들이 바로 그런 '축제'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12. 파사 2008/06/24 01:03

    저도 소고기가 도화선은 될지언정 촛불시위에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나오는 전파자나 기록자들도 소고기가 아닌 다른문제를 너무이슈화하면 촛불이 분열될가
    스스로 대중을 믿지 못하고 가두어 둘려는 경향이 있는듯해요.하지만 제생각엔 촛불은 작은 불씨가 남을망정
    꺼지진 않을듯 보입니다.꺼지지않은 불은 다시 바람이불면 살아나듯이 정부가 대운화나 공기업사유화등을
    발표한다면 또다시 더 크게 번질것이고 정부가 멍청이들만 있지않다면 함부로 못할거라봅니다.
    하지만 정부나 한나라당은 자기뒤를 바주는사람들을 무시할수없기에 멍청한짓을 또 할것이고 그땐 돌이킬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가지고 있습니다.같은 국민인대 상생할수있는 방법은 없을가요.
    촛불에 끝에 모든 국민이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길 바랍니다.

    • 그린비 2008/06/24 14:59

      안녕하세요 파사님.
      저 역시 쇠고기 수입 문제 이전에 불이 붙을만한 요소들이 산적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대중'은 가둘려고 한다고 가둬지고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본문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것은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매초 매초가 그것에 열려"있으니까 말입니다.

  13. 명박탄핵 개한당 탄핵 2008/06/24 07:49

    부폐한 정권 언제쓰레기덜을 치울날이 올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집회에 나간다..

    • 그린비 2008/06/24 15:00

      명박탄핵 개한당 탄핵님 안녕하세요!
      화이팅입니다!

  14. 후다닥 2008/06/24 09:04

    명박산성은 이정권이 가진 소통의 한계를 여과없이 보여준 정말 희대의 코미디였던 것 같습니다.
    시위대를 막겠다고 시내 한복판에 콘테이너박스를 쌓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 창의적인 마인드로 협상에 임하고 정치에 임한다면 온 국민이 정말 좋아할텐데..
    그나저나 산성 보면서 한가지 다행이었던 건 시내 도로 파내고 운하 건설해서 시위대 막을 생각 안한게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 그린비 2008/06/24 15:01

      후다닥님 안녕하세요.
      명박산성 정말 대규모 설치형 개그였지요. 그들의 그런 창의력이 축제의 무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

  15. 다수&소수 2008/06/24 09:39

    그러나 진정 무서운 사실은 정부의 테크노크라트, 의회의 의원들, 주류 언론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컨센서스에 의해 배제되고 정보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진정한 다수자"들이 이러한 끝임없는 투쟁?과 승리?속에서도 4.19와 6.10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힘있는소수자"들에게 배재된다는 것이죠...

    • 그린비 2008/06/24 15:06

      '다수'와 '소수'는 단지 수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지배적인 척도(법 질서, 자본 등)를 점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적들은 '다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광우병 쇠고기를 먹길 강요 당하고, 비정규직의 확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있는 우리는 '소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소수성'이 일반을 형성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상황은 '힘있는 소수'의 '다수성'에 대한 '진정한 다수'의 '소수성'이 폭발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 다수&소수...2 2008/06/25 11:06

      '진정한 다수'의 '소수성'이 폭발한 상황이라하더라도...결국에는 김대중과 노무현과 일부386정치인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것입니다.

      물론 지난10년간 작은변화는 있어지만...근본적인 변화는 없어다고 생각된다.

      "진정한다수의 소수자"들의 지지에 의해 권력을 잡은자들이 "소수적 다수자"들에 편입되면서 자기자신을 지지해준 지지자들(국민)을 기망하고 뒤통수를 치고 배신하고 자기 자신들이 최선인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는 것이죠...
      이렇게..."내가 권력을 잡았다. 이제 민주화가 됐다 너희들은 내가하는대로 따라와라 왜 파업하는데...?왜 데모하는데...? 왜 정부정책에 반대하는데...?

      이러한 지난결과와 바탕위에 지난 대선과 총선의 결과도 있지않나하는 생각이듭니다.

  16. 명박퇴진 2008/06/24 09:46

    잘 정리된 글.. 잘 읽었습니다. 퍼가겠습니다. ^^;;

    • 그린비 2008/06/24 15:06

      명박퇴진님 안녕하세요!
      마구~~~ 퍼가세요!!

  17. 줄리안 2008/06/24 11:42

    와! 오랫만에 블로그를 읽다가 전율을 느껴보는 군요. 글쓴이의 현 정세 풀이와 의미부여에 공감합니다. 저는 5월초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뛰쳐나오고 아고라에서의 의견개진이 익명하에서도 민주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지역에 관계없이 (숫자나 열성의 차이는 있지만) 한 뜻으로 모아지는 것을 보면서 한층 진화된 68혁명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기존의 보이지 않는 지배질서에 대한 약자들의 연대-제가 그동안 꿈꿔왔지만 실현되지 않아 항상 제게 의문을 던졌던-가 제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68혁명과 이번 집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정리 및 풀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님의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 그린비 2008/06/24 15:08

      줄리안님 안녕하세요!
      아 이런 연유로 저희 블로그에 '68혁명'이라는 키워드로 방문하시는 분이 많으셨군요! 나중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올려보겠습니다. 그런데 뭔가 '확답'을 드리기엔 초큼 망설여지는 군요. ㅎㅎㅎ

  18. 해피 2008/06/24 12:15

    잘 읽었습니다. 블로그에 퍼갈께요 ^^

    • 그린비 2008/06/24 15:08

      해피님 안녕하세요!
      10000000000000번 퍼가셔도 됩니다!

  19. 김수림 2008/06/24 18:37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읽으면서 정말 글을 잘쓴다는 생각이 든 적 처음이에요^^ 님의 글쓰는 스타일이 제 스타일과 맞는 것 같아요. 이런 좋은 글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감사하게 블로그로 스크랩해갑니다.
    참, 의견에도 굉장히 동의하는 부분이 맞네요^^;

    • 그린비 2008/06/25 09:15

      김수림님 안녕하세요!
      역시나 막 퍼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종종 들러주세요. ^^

  20. 비트 2008/06/24 19:20

    정말 공감할 수 있는 글입니다.
    지난 6월 21일 아침, 촛불들의 사진 보셨습니까.
    너무나 아름다웠지요.
    너무나 행복했지요.
    우리 국민이 자유와 평화와 해학의 민족이라는 주장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는 아침이었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극히 평화롭게요.
    그리고 제 개인적 감상이지만,
    우리 국민은 "세계를 평화롭게 선도하는 자"가 될 수 있을겁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악의축"과 전쟁을 남발하는 누구와 다르게 말이죠.

    • 그린비 2008/06/25 09:17

      비트님 안녕하세요!
      촛불 사진이 아름답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굳이 '선도'해야할 필요까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악의 축"하고 전쟁하려고 하는 누구의 행동에도 물론 반대하구요.

  21. alclssjaemf 2008/06/24 19:27

    온통 억지에 고집물통들이군
    한개래 신문 광고주들 심판합시다 .

    • 그린비 2008/06/25 09:20

      예에, 우리 고집불통 맞습니다. ㅎㅎㅎ

  22. pluto 2008/06/24 21:10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다 읽고나니 정말 공부하고 가는 느낌이예요^^
    다음에 다른 글도 읽어볼려고 즐겨찾기 했어요.

    • 그린비 2008/06/25 09:21

      pluto님 안녕하세요!
      앞으로도 쭈욱~! 좋은 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3. sanna 2008/06/25 03:47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미처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퍼갑니다.

    • 그린비 2008/06/25 09:22

      sanna님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인사드렸습니다. ^^

  24. 소룡이 2008/06/25 08:43

    흠... 과연 이명박만의잘못인가???
    대통령 선거때 이명박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당선된것은 누구의 표란 말인가?
    과연 정동영이나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쇠고기 협상, 공기업 민영화등등은 나오지 않았을까?
    이명박이 아니었어도. 한미fta는 이번정권에서 협상이 이루어졌을것이다. 쇠고기 협상은 그중 일부분이다.
    국민 건강을 무시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들고 일어나야할 일인가?
    광우병? 과연 그렇게 무서워해야할 병인가? 에이즈, 암 보다도...
    지금 대한민국엔 광우병 말고 다른 희귀병이나 중병에 걸린 환자들도 많이있다.
    이런 환우들이나 그 가족들에겐 아직 걸리지도 않은 광우병 때문에 국민들이 시끄럽게 하는것은 오바라고 생각되어질것이다.
    미리 막는 것은 좋은일이다. 그런데 미리 막았는데 에이즈는 일어났다. 다른 병들도.
    재협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국민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안먹으면 되지 않는가? 정부가 규제한다고 한다. 30개월 미만만 들여온다고 한다. 검역 잘 한다고 한다. 이정도면 한번 믿어 볼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또 무슨 재협상 하라는 것인가?
    이제 그만 그칠때가 된것 같다. 이명박 파면? 6개월도 안되었는데 무슨 파면인가. 아직은 지켜보아야 한다.
    피면 되면 또 누가 할것인가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 그린비 2008/06/25 09:28

      소룡이님 안녕하세요.
      물론 그게 꼭 '이명박' 개인의 잘못일 수는 없죠. 그건 글에서도 잘 밝혀놓은 것 같구요. 그리고 사실 압도적이라고 해도, 투표율이 워낙 낮아 절대 득표수에서는 여느 대선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인 그렇게 당선시켜놓았더니 뻘짓만 하고 있다는데 있구요.

  25. 라라라 2008/06/25 14:17

    모 국회의원이 국민이 다 노망났다고 했을 정도로 진보측에서 국민을 무지몽매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촛불정국에서는 혁명이라고까지 평하며 긍정적인 단어를 총출동시키고 있습니다... 갑자기 몇 달 만에 달라진 여론이 어리둥절 하겠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비난하시던 분들이 국민을 극찬을 하는 것도 듣는 국민입장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물론 저도 이명박을 지지하는 아버지와 싸우기도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국민이 뭘 모른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는 거죠.. 오히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진보 정치권과 선거결과가 곧 이명박이 하는 모든 정책에 대한 지지이며 국민을 종업원취급하는 생각한 정부여당 모두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양비론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거든요.. 요즘처럼정치권을 이렇게 미워해 본 적도 없네요.. 답답해요. 시위에 참석은 합니다만..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시위에 참석하면 힘을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기력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