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장’을 기억하십니까? 저에게 있어 논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책 포장지입니다. 마치 한지에 인쇄한 듯한 감촉과 은은한 논장 특유의 문양이 참 좋았습니다. 대학을 청주에서 다닌 저는 서울이 집인 친구가 다녀오겠다 하면 책 목록을 적어 주며 부탁했던 기억이 새록합니다. 청주에도 시내 중심가 공원 맞은편에 아주 작게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쯤(음....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로군요.. -_-;) 서점이 없어져 좀 구하기 어려운 책은 친구에게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 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던 것이. 그래도 2000년 언저리까진 몇몇 서점은 간판은 차마 내리지 못하고 사회과학 전문서점이라는 특색을 벗고서라도 유지되긴 했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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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_오마이 뉴스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책방"(바로가기)>

얼마 전 거의 유일무이한 사회과학서점 서울대 앞 ‘그날이오면’엘 방문했습니다. 언젠지 기억에도 없을 만큼 오랜만이었습니다. 서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그날이오면’을 사랑하는 지킴이들이 만든 플래카드였습니다. 십시일반 모금해 ‘그날이오면’의 재정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 후원회원을 모집한다는 그런 내용의 플래카드.


사회과학서점이 영영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 깜박이는 필라멘트 전구처럼 아슬아슬한 존재의 안타까움, 하지만 추억으로 보낼 수 없는, 보내서는 안 될 소중한 공간.
‘그날이오면’을 오랜만에 마주한 저의 복잡한 심경입니다.

기억의 시간을 좀 멀리 돌려 봅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8년 2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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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1998년 출간된 섹슈얼리티 전문지 버디 1호의 표지

MBC 9시 뉴스에도 언급이 될 만큼 파격적이었던 책, 섹슈얼리티 전문지 ‘버디’가 신당동의 작은 사무실에서 소수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세상에 나오던 때가. 일부 서점에선 마지못해 형식상 받기도 했고(서가 저~ 구석에 감추어 두고 판매했었습니다) 대형 서점에선 청소년 유해 도서라고 일괄 반품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감추고 쉬쉬하는 것이 싫어, 그저 성소수자들의 동호회 소식지만으로 남는 것이 싫어 정식 출판 등록을 한 ‘버디’로선 그것을 묵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판로를 확보하겠다며 돌아다닌 1차 대상이 대학가 앞 사회과학 서점이었습니다. 배낭 하나 가득 책을 짊어지고 서점으로 갔습니다.   

“섹슈얼리티 전문지 버디라고 합니다. 거래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생뚱한 표정으로 혹은 귀를 의심하듯이 물었습니다.

“뭐라구요? 뭔 책이라구요?”

그러면 저는 약간은 민강하고 상기된 표정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섹슈얼리티 전문지 버디입니다. 동성애 전문지(그땐 성소수자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버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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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디 2호의 표지_

그제야 알아들으시곤 의아하고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기꺼이 받아주겠노라고 진열도 해주시던 그 분들의 감사함을 아직 기억합니다. 심지어 좋은 책, 꼭 필요한 책이라며 거리 쪽 유리 공간에 책을 진열해 주던 서점도 있었습니다. 제 마음에 그려진 서점은 그런 배려가 넘치는 곳입니다. 그 분들이 단순히 매출만 생각했다면 제 배낭 속 책을 감히 꺼내 놓지도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그런 불편한 책 하나쯤 팔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계산보다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마음이 먼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책’은 ‘새우깡’이 아니니까요.

책을 일컬어 문화상품이라 합니다. 책은 일반 공산품처럼 이것이 아니면 저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 하나 하나의 품에는 오랜 시간 공들인 그 저자만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단 한 명의 독자가 책을 읽었다 해도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고, 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작은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사회과학 서적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본의 논리로만 서점이란 공간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책은 바로 문화상품이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사회과학서점이 없었다면 어쩌면 ‘버디’는 늘 서점 한 구석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두고 몰래 몰래 독자를 만나는 책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아주 정감 넘치는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을 꿈꾸어 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 세미나실에서 아동 철학 도서에 관해 수다를 풀어 놓는 공간이 있는 서점, 아무렇게나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오래도록 책을 살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서점, 가격 할인은 없지만 도서구입 도장 열 번이면 향긋한 차 한 잔 내어주는 서점, 저자와 독자의 만남이 이벤트가 아닌 함께 공부하는 일상으로 만나질 수 있는 그런 서점. 베스트셀러는 많이 팔리는 순이 아니라 좋은 책을 독자가 직접 투표하여 선정하는 서점. 일반 서점에서 절판된 책이라도 그 책을 원하는 단 한 명의 독자가 있다면 POD+로 책을 만들어 주는 서점.

+POD - Print On Demand. 도서 데이터를 이용하여 일종의 프린트 형식으로 책을 제작하는 시스템.
POD 시스템이 정착되면, 단권만 제작하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절판'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이런 서점이라면 있다면 대형 서점이 주는 자본의 편리함을 훌쩍 이겨내고 정겨운 나눔이 넘실거리는 서점이 되지 않을까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꿈꾸면 꼭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 냄새 푸~풀 풍기는 '책방 그린비‘(^^;)에서 만나 뵙고 싶습니다.

마케팅팀 이군

2008/06/27 10:27 2008/06/2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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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06/28 02:29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노임연실 2008/12/22 00:06

    그런 서점을 구상하다니 제 꿈 중의 하나였는데 기대됩니다.

  3. 파란혜성 2008/12/22 12:06

    오홋. 그 논장을 기억하시는 분을 이렇게 만나다니... 저는 논장에서 '반갑다 논장'이란 소식지도 만들고... 송년회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나는데... 작년 초에 거기 주인장 하시던 분을 우연히 만났는데 지금은 FC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것도 꽤 좋은 성적을 올려서 1류 FC들 모이는 행사에 나가셨다는... 참 여러 가지가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논장을 기억하시는 분을 만나니 또 기쁘네요. ㅎ